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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81화 (81/100)
  • 81화

    눈물은 멎었는데 마음이 아픈 것처럼 가슴이 욱신거렸다. 수아 역시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넘겨보았다.

    정신이 없어서 밤이 깊었는데도 블라인드 치는 것을 깜빡 잊었다. 맨 유리창 너머로 창백하게 빛나는 겨울 달이 보였다.

    “수아 씨.”

    흰 달에 시선을 주는 순간, 화희가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수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어깨를 밀어 가볍게 넘어뜨린 그가 침대 옆에 선 채로 허리를 숙였다.

    “앞이 깜깜한 놈 걱정은 그만하고 본인 걱정이나 하시죠.”

    그녀의 머리 옆에 손을 짚고 눈을 맞춘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묘하게 일렁거렸다. 집요하고도 짓궂게 굴기 일보 직전이었다.

    “내가 무슨 걱정을 해야 하는데요?”

    어깨를 움츠린 수아가 묻자, 그가 손을 뻗어 뺨 위로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눈꼬리가 살랑이는 눈웃음까지 쳤다.

    “밤새 나 때문에 실컷 울 텐데. 다른 놈 때문에 운 수아 씨가 아무래도 너무 야속해서 내가 좀 그렇거든요.”

    무표정일 땐 화난 것처럼 보일 만큼 위압적인 인상이 웃기만 하면 달콤한 사탕처럼 다디단 인상으로 변했다. 수아는 그 간극이 신기해서 쳐다보다가 자신을 훑는 시선에 저절로 긴장이 돼서 마른침을 삼켰다.

    화희가 그녀의 붉어진 눈시울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아담하지만 오똑한 코와 발그레한 두 뺨, 도톰한 입술을 훑었다.

    더 아래로 내려간 시선이 가느다란 목덜미와 봉긋한 가슴에 머물다 한입에 삼키고 싶다는 것처럼 사납게 변했다.

    어찌나 집요하고 노골적으로 쳐다보는지 그의 정염 어린 눈빛에 반사적으로 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수아는 손을 뻗어 그의 수려한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가지런한 눈썹부터 매끈한 이마를 지나 높은 콧날 아래 붉은 입술에 닿자, 그가 입을 벌려 손가락을 물었다.

    뜨거운 혀가 손가락을 옭아매고 지분거리며 타액으로 축축하게 적셨다. 그걸로도 모자란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아챈 화희가 나머지 손가락도 하나하나 입 안에 넣고 빨았다.

    “……읏.”

    마지막 손가락을 빼낸 그가 손바닥까지 길게 핥자 등골에 저릿한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얌전히 손을 내주던 그녀가 옅게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비틀자 그는 침대 곁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팔을 뻗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치마를 말아 올리고 곧게 뻗은 그녀의 다리를 쓸어내렸다. 커다란 손으로 발목을 한 손에 감은 화희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예쁘군요. 쓸데없는 일로 발목 잡히기 좋을 만큼.”

    “으읏, 내가 언제……. 하아, 간지러워요. 언제는 흰 눈 같다더니, 뭐가 이렇게 야해요?”

    “질투로 펄펄 끓다가 녹아서 질척거리는 중이니까. 자, 착하게 약속해 보실까요. 이 예쁜 발목은 나한테만 잡힐 거라고.”

    화희가 잡은 발목을 엄지로 간질였다. 간지럽고 멋쩍어진 수아가 다리를 빼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는 발목을 들어 올려 입을 맞추고 종아리를 길게 핥았다.

    “당연한 말을 왜 당연하지 않게…… 아!”

    “안 그럼 콱 물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말끝에 화희가 이를 세워 발목을 물었다. 따끔한 아픔에 그녀가 신음을 흘리자, 그의 입술이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종아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의 손이 허벅지의 여린 살결을 스치자 눈을 질끈 감았던 수아는 화희가 몸을 겹쳐 오자 천천히 눈을 떠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턱을 가볍게 감싸 쥔 화희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지런히 넘겨 주며 길게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다정한 눈빛과는 다르게 집요하고도 흉포한 키스였다.

    단단한 남자의 육체가 부드러운 여체를 빈틈없이 짓눌렀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며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흰 달빛을 등진 그의 얼굴이 달의 저편처럼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를 떠나는 그대의 어여쁜 발목을 잘라 버리고 싶습니다.’

    무서운 말이었지만 수아는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열에 들뜬 그의 눈빛에 사로잡힌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이내 그녀의 뺨을 떨리는 손끝으로 쓰다듬은 그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결코 해할 수 없으므로.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그대를 옭아매고 싶습니다.’

    지독하고도 절절한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파는 것처럼 아프게 했다.

    가슴의 격통이 실제처럼 느껴진 수아는 눈을 떴다.

    흰빛에 눈이 부셔서 눈을 깜빡거리는 순간, 그녀의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달빛을 가린 화희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늘진 그의 표정이 꿈과 똑같아서 잠에서 깬 건지 혼란스러웠다.

    “……왜 날 그렇게 봐요?”

    수아가 멍하니 묻자 고개를 기울인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봅니까?”

    “전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믿을 수 없으니까요. 그토록 원하던 이가 내 품에 있다는 게. 이대로 벗어날 수 없게 당신을 옭아맸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수아 씨를 옭아매고 싶어요. 당신과 내가 이어진, 절대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그를 달래려던 수아는 순간 숨을 멈췄다.

    꿈속 남자의 목소리와 화희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같은 목소리, 같은 말. 그녀는 순간 꿈에서 덜 깼나 싶어서 달빛을 넘겨보았다.

    나무로 된 창틀 사이로 올려다본 달은 매우 슬프게 보였었다. 눈물 때문에 물속에 잠긴 듯 뿌옇게…….

    달을 응시하던 수아는 기억을 더듬다 놀랐다.

    순간 달을 두고 두 개의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장면이 선명했다.

    동시에 두 남자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우리의 아이가 있었다면 나를 버리지 않을 겁니까?’

    “아이가 있으면 좋겠어요. 당신과 나의 아이가.”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발밑이 꺼지는 것처럼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이건 대체 무슨 감정이지?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수아 씨?”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는 화희의 목소리가 이쪽 현실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입술을 깨물고 감정을 억누르는 그녀를 굽어본 화희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내 욕심이 과합니까?”

    “그게 아니라 들은 것 같아서……. 혹시 이런 말 한 적 있어요? 저, 옛날에라도.”

    그녀의 질문에 대번에 화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화가 난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설마요, 이런 말을 할 상황은 결코 아니었잖습니까. ……혹시 다른 놈한테 들은 건 아니…….”

    “아니거든요? 미래를 생각한 건 당신이 처음이거든요!”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튀려고 하자, 수아는 고개를 저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왜인지 가슴이 먹먹해서 제 표정을 숨겨야 할 것 같았다.

    화희가 웃으며 그녀를 제 위로 끌어 올려 이불로 감싸고 다분히 소유욕 넘치는 손짓으로 바짝 끌어안았다.

    수아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면서 꿈을 되짚었다.

    꿈은 상상이 만들어 낸 것이었을까?

    하지만 달빛이 선연하던 장면과 가슴 아프도록 먹먹하던 감정은 기억과 매우 흡사했다.

    새삼 의문이 들었다. 정말 왜 그녀는 죽어야만 했을까. 왜 죽어서 그와 나를, 우리를 이다지도 힘든 길을 걷게 만들었을까.

    * * *

    “천윤성, 본인 맞습니까?”

    “…….”

    의례적인 절차임에도 윤성이 대답하지 않자 검사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민철이 묵비권을 행사라고 언질을 주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락을 각오했다 여겼는데 막상 이리되고 보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부터 밀려들었다. 하다못해 이름까지도.

    태어날 때부터 버려진 놈이 진짜 성은 무엇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천부신은 윤성이라는 이름이 고아원에서 지은 이름인지 본인이 지은 이름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하긴 이름뿐이던가. 그의 인생은 늘 다채로운 고난과 불행이 준비된 것 같았다. 고아로서의 삶도, 유복한 삶도, 전부 그의 삶이라기보다 그저 고난을 주기 위한 장치 같은 느낌이었다.

    얼마 전, 까맣게 잊고 있다 희미한 꿈으로 기억해 낸 고아원의 삶은 매우 빈곤했다. 좁은 방에 들어찬 또래 아이들과 신경질적인 원장, 그마저도 한순간에 다 죽고 보금자리는 새까맣게 타버렸다. 오로지 윤성만 기억을 잃은 채 살아남았다.

    완전히 하루아침에 달라진 삶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유복한 삶이었다. 하지만 늘 외롭고 두려웠다.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지만, 무의식중에 자신을 거둔 천부신이 잔혹한 사람이고 자신은 언제라도 그에게 이용당하다 버려질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 모두 그를 시기하거나 업신여기는 쓰레기들뿐이었고.

    하지만 이번에도 모두 사라지고 또 자신만 남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항상 최악의 삶 속에 던져진 그는 홀로 살아남았다.

    이것은 불행일까 아니면 다행일까. 어쩌면 자신이 불행 그 자체는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솔직하게 말해요, 권영훈 씨를 죽였잖습니까!”

    “……할 말 없습니다.”

    윤성이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입을 다물든 앵무새처럼 같을 말을 반복하든, 취조실에서의 심문은 밤새 계속되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마지막으로 낯익은 사람이 들어와 반협박 같은 말을 하고 나갔다. 천부신을 따라갔던 모임에서 만난 정계의 인사였다.

    “순순히 협조해야지. 아버지가 건재해야 윤성 군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겠나.”

    그가 나가고 나자 윤성은 취조실에 혼자 남았다. 귀가 따가운 것 같아서 수갑 찬 손으로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는데 문이 열리고 누군가 그를 다른 장소로 데리고 갔다.

    윤성은 유리 벽 너머 보이는 사람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정말 내 주위의 사람이 불행해지는 게 맞는 건가. 지독하게 강해 보이던 사람이 저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엔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빈틈없이 넘겼던 머리는 산발이고 옷차림도 매우 지저분했다. 몇 주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늙은 얼굴에는 공포와 괴로움이 가득했다.

    형편없는 몰골로 의자에 엉거주춤 주저앉다시피 한 천부신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윤성은 이쪽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들었으면서도 제 눈을 믿지 못해 유리 벽을 두들겼다.

    “아, 아버지?!”

    천부신을 거의 증오한다 여겼지만, 막상 바닥까지 망가진 그의 모습을 보니 뜨거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를 놔두고 급히 사라진 강민철과 김세원이 친숙하게 말을 나누며 방으로 들어왔다.

    “일단 구속 적부 심사로 구속은 피했지만 기소를 피하려면 천 회장이 한 짓이라는 증거를 모으는 게 관건이 되겠군요.”

    “그렇죠. 그런데 의외로군요. ‘그 박 이사님’이 천 회장의 가족까지 신경 쓰실 줄 몰랐는데요.”

    “그러고 싶으셔서 그런 건 절대 아닐 겁니다. 그런데 이제 풀어 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민철이 경악한 윤성을 곁눈질하며 말하자 김세원이 문 앞에 서 있던 남자에게 눈짓했다.

    옥죄던 수갑이 풀렸지만, 윤성은 의식도 할 수 없었다. 민철이 천부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그의 곁에 나란히 서며 설명하듯 말을 건넸다.

    “어쩐지 소환에 순순히 응한다 싶었는데 이렇더군. 정신과 의사 말로는 정신 이상 증상이 꾸며 낸 게 아니라던데. 곧 병원으로 이송될 거야.”

    “그럼 지금 아, 아버지가 미쳤다는 거…….”

    애꿎은 민철에게 버럭 화를 내려던 윤성은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멈칫했다.

    취조실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는 작았음에도 고막이 터져 나갈 것처럼 크게 들렸다.

    그러나 윤성만 들은 것처럼 민철은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김세원을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제 귀를 의심하며 다시 취조실을 돌아보던 윤성은 경악하며 유리 벽에 바짝 붙어 안을 살폈다.

    난데없이 나타난 박화희가 책상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표정 없이 부신을 내려다보며 손끝으로 단검을 돌리고 있었다.

    착각인 듯, 그들 뒤로 희미하게 눈에 익은 장소가 보였다. 아버지의 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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