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80화 (80/100)
  • 80화

    * * *

    “더 쉬어야지, 난 괜찮다니까 뭣 하러 와?”

    다행히 송 여사는 하루 사이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수아는 엄마에게 멋쩍게 웃으며 몰래 화희에게 잘 둘러대 줘서 고맙다고 눈짓했다. 교통사고를 당한 엄마가 ‘납치’에 관한 것까지 알게 될까 걱정이었는데 한시름 덜었다.

    그러나 갑자기 수아가 병원에서 사라진 이유로 둘러댄 말이 하필이면 ‘과로와 충격으로 인한 기진맥진’이었던 탓에 송 여사의 염려 섞인 목소리는 점점 꾸지람으로 바뀌었다.

    “그러게 일 좀 작작 해야지! 네 몸 상할 정도로 일만 하면 누가 알아준다니?”

    “잘 알아주실 거예요, 고용주님께서.”

    “그 고용주도 일 좀 작작 하고 시간 좀 내 달라고 투정 부린 것 같은데요.”

    화희가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 거들자 수아는 순간 배신감에 그를 흘겼다. 송 여사는 미래 사위의 손을 붙잡고 하소연했다.

    “얘가 날 닮아서 감기도 안 걸릴 정도로 건강한 체질이거든. 그런데 공부며 일이며 제 몸 생각 안 하고 미련 떨다가 이렇게 가끔 탈이 난다니까요?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그런 거니 잘 좀 돌봐 줘요.”

    타박과 칭찬 사이를 넘나드는 애매한 말에도 화희가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그를 흘기던 수아는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어른들에게는 ‘1000살’을 핑계로 안하무인인 그가 미래의 ‘장모님’에게는 참 공손한 게 뿌듯했다.

    “네, 제가 잘 살피겠습니다. 과로도 과로지만 사고 소식에 충격이 컸던 탓이니까 어머님께서 빨리 나으셔야지요. 교통사고 처리에 관한 건 강 변호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아무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아유, 강 변호사님이? 가뜩이나 바쁘실 텐데 내 일까지 고마워서 어떡하지.”

    “제가 법을 너무 잘 지켜서 어차피 할 일 없는 사람입니다.”

    한 발 물러나 듣고 있던 민철이 제 명함을 꺼내 송 여사에게 내밀다 억울함에 돌처럼 굳었다. 그러나 화희가 곁눈질하자마자 어색하게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네, 그렇습니다. 저희 이사님이 법을 아주 잘 지키십니다. 굳이 법이 필요가 있을까 의심이 될 정도, 흠흠……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인사를 마치고 병실에서 나오자 민철이 수아에게 귀엣말을 하듯 작게 말했다.

    “민수아 씨, 저 되게 바쁜 사람입니다. 형사, 민사, 고소, 고발, 장르 불문하고 요즘처럼 바쁜 적이 없습니다. 그 와중에도 어머님 일은 거의 처리를 끝냈고요.”

    말은 수아에게로 향했는데 시선은 화희를 힐끔거렸다. 꼭 전해 달라는 말투 같았다.

    팔짱을 낀 채 한 발 물러서 있던 화희가 수아를 제 품으로 당기며 그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더 말 섞을 필요 없습니다, 수아 씨. 바쁘다잖아요.”

    그러나 채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가 고양이처럼 날아와 수아에게 덥석 안겼다. 아니, 안기려고 했지만 화희가 민철을 밀치는 바람에 대신 그의 품에 안착할 뻔했다.

    “언니……? 아이씨, 강 변 오빠잖아!”

    “주해린 씨? 여긴 웬일이에요?”

    놀란 수아가 묻자 제 팔을 킁킁대며 투덜거리던 해린이 뒤를 가리켰다.

    “이 쿰쿰한 냄새는 또 뭐…….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언니, 큰일 났어!”

    해린이 가리키는 뒤쪽에서 윤성이 급히 달려오다가 그들을 보고 멈춰 섰다. 그도 수아와 화희를 보고 놀란 듯 해린에게 마뜩잖게 물었다.

    “……도와줄 사람이 저 사람이었어?”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야? 그럼 한창 예쁠 때 시커먼 감옥에서 썩겠다고?”

    “감옥? 그게 무슨 소리야?”

    그들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란 수아가 윤성에게 다가서자, 화희를 힐끗거린 그는 고개를 저으며 흘리듯 말을 얼버무리려 했다.

    “신경 쓰지 마. 쟤가 오버하는 거…….”

    “오버는 만두, 네가 하는 거지! 아빠 죄를 전부 뒤집어쓰고 감옥에서 썩겠다는 게 제정신이야?”

    “아씨, 제일 이상한 사람한테 제정신이냔 말까지 듣……. 아, 좀 그만 가! 내가 알아서 해.”

    말과는 다르게 얼굴을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는 윤성은 매우 초조해 보였다. 그를 무시한 해린이 화희의 팔을 아이처럼 잡고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오빠가 꼭 좀 도와줘, 응?”

    시종 표정 없이 서 있던 화희가 손끝으로 해린의 손을 툭 쳐 내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내가 왜.”

    “이 얼굴이 썩는 건 아깝잖아! 얘 썩은 내를 내가 어떻게 뺐는데? 그리고 그 집안을 뒤엎은 오빠 탓도 있잖아.”

    “아, 좀 그만하라고! 내가 알아서 한다니…… 윽!”

    “알아서 하긴, 개뿔!”

    발끈한 윤성이 해린의 팔을 잡아채며 말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돌아보며 마주 버럭 소리를 지른 그녀는 냅다 그를 화희에게 떠밀고 손을 흔들며 가 버렸다.

    “어쨌든 오빠가 책임져! 언니, 다음에 봐!”

    자신에게 닿기 전에 휘청거리는 윤성의 어깨를 잡아 가볍게 세워 놓은 화희가 그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물었다.

    “내가 널 책임져야 하나?”

    “다, 당신이 왜?”

    인상을 쓴 윤성이 고개를 젓자마자 화희가 턱을 치켜들고 한 발 물러났다. 그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병원 입구로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천윤성 씨!”

    사복 경찰로 보이는 이들은 바로 윤성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을 억세게 꺾고 수갑을 채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에 경악한 수아는 윤성을 체포한 경찰의 앞을 다급하게 막아섰다.

    “자, 잠시만요!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었으므로 구치소에 수감될 겁니다.”

    “구치소요?”

    고개를 숙인 윤성이 힐끗 수아를 보았으나 이내 이를 악물고 시선을 돌렸다. 내내 오기로라도 괜찮은 척했으나 막상 체포되자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안타까워진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어쩔 줄 몰라 하다 경찰들이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급한 마음에 따라나서려고 했다.

    “윤성아! ……저기, 어디로 가는 거죠? 일단 제가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변호사는 있는지 모르겠…….”

    “수아 씨.”

    윤성을 불렀으나 대답하지 않자 수아는 경찰을 붙잡고 물었다. 그러나 그가 대답하기 전에 그녀를 나지막이 부른 화희가 그녀를 잡아당기다시피 품에 안으면서 민철에게 눈짓했다.

    “네가 따라가.”

    바로 민철이 명함을 꺼내 들며 경찰들에게 따라붙었다.

    “HH 법무법인 대표 강민철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천윤성 씨 법률 대리인…….”

    수아가 화희의 어깨 너머로 발돋움해서 넘겨보는 사이, 경찰들에게 연행된 윤성은 곧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 * *

    수아는 집에 와서도 내내 마음이 무거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화희에게는 윤성과의 악연 때문에 차마 도와달라는 부탁을 못 했는데, 그래도 그가 나서 줘서 다행이었다.

    화희와 민철이 나선 이상 별 탈 없을 거라 믿지만, 배신당해서 상처받은 그의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 그날, 윤성이 마지막이라면서 찾아왔던 게 이런 이유였던 걸까?

    낳아 준 생부도 아니고, 사이도 좋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키워 준 아버지가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건 정말 끔찍했다.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다 보니 방향 잃은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자신이 윤성에게 너무 박했을지도 모른다는.

    정 붙일 데 없어서 방황하던 윤성이 부리던 응석을 제대로 받아 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제 사정이 버거워 상처 주고 밀어내기 바빴다.

    그가 몇 번이나 사정 얘기를 하려고 만나러 왔었는데도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 준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천부신이 무너지면 윤성에게도 해가 갈지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납치당했을 때 그는 목숨까지 걸고 구해 주려 애썼는데.

    죽을 위기에서도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제 탓을 하던 목소리가 선했다.

    <미안해……. 다 내 탓이야. 진작에 내가 뭐라도 했어야 했는데……. 내가 비겁해서 누나까지…….>

    윤성이는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한참 있었던 것처럼 화희가 문에 기대선 채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요?”

    “어,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묻지 말아요. 대답하고 싶지 않으니까.”

    수아가 올려다보는 사이 방 안을 가로질러 들어온 화희가 침대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마주친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수아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바라보자, 화희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애송이가 그렇게 걱정이 됩니까? 나보다 더?”

    “……당신보다 더요?”

    “내가 다쳤을 때는 울진 않았잖습니까.”

    울다니? 마음이 매우 안 좋긴 하지만 울 정도는 아닌……. 수아는 얼떨결에 제 눈가를 만져 보다 흠칫 놀랐다. 손끝에 물기가 잔뜩 묻어났다.

    내, 내가 왜 이래?

    경악해서 눈을 깜빡거리자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뺨 위로 떨어져 내렸다.

    수아는 허둥지둥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면서 화희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내가 왜 이러죠?”

    다정하게 손등으로 뺨의 눈물자국을 닦아 주면서도 이죽거리며 대답하는 그의 말투가 사나웠다.

    “오지랖이 한강이라서 물이 넘치나 보죠.”

    “지금 농담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요.”

    “농담일 리가요. 흰 눈 같은 내 순정이 뜨거운 질투로 펄펄 끓고 있는데.”

    수아는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대면서 변명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어, 저기요, 윤성이는요…….”

    “압니다. 애송이 사정이 복잡하다고요. 그 아이가 당신을 약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안타깝게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죠.”

    그녀의 말을 잡아채 대신 말을 끝낸 그가 험악한 욕을 참는 것처럼 이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수아는 그의 손을 잡아 제 옆에 끌어 앉히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그것보다 많이 복잡해요. 그날요, 납치되던 날. 윤성이가 마지막이라면서 갑자기 찾아왔었어요. 그리고 내가 전생에서 본 걸 똑같이 말하더라고요. ‘비는, 나의 신부는 내가 원하는 한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

    “오래전부터 들었대요. 혹시 윤성이가 전생에 우리와 관련이 있을까요?”

    말없이 듣던 화희가 놀란 것처럼 눈썹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그뿐, 곧 코웃음 치며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뭐든, 그게 중요합니까? 키우던 고양이도 우리 주변을 어슬렁대는 판에.”

    “아무리 봐도 가벼운 인연 같진 않잖아요. 대체 뭐였길래…….”

    “하, ‘정전’ 같은 놈인 건 확실하죠. 그놈과 관련된 건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말과는 다르게 화희가 잠시 생각에 잠긴 것처럼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고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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