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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79화 (79/100)
  • 79화

    수아는 그의 말에 당연하다고 대꾸하려다가 드러난 그의 팔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칼로 그은 것처럼 길게 난 상처 여러 개가 흰 피부 위에 두드러졌다. 아물지 않고 금방이라도 피가 날 것처럼 붉었다.

    왜 낫지 않는 거지? 버스 사고로 뼈가 부러졌을 때도 하룻밤 만에 붙었던 것 같은데.

    “아프진 않아요?”

    그녀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묻자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수아만 응시하던 화희가 제 눈썹을 문지르며 웃었다.

    “곤란하군요. 수아 씨가 날 걱정해 주는 건 좋은데 약한 남자로 보이는 건 싫어서.”

    “힘을 쓰다 다쳤는데 약해 보일 리가 있어요? 안 되겠어요, 일단 응급 처치라도 좀 해요.”

    그녀는 안타깝게 상처를 보다가 얼른 구급상자를 꺼내 와서 침대 옆자리를 두들겼다. 그녀를 따라 일어났던 화희가 묘한 표정으로 팔을 내밀었다.

    아픈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인데 속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이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게 마음 깊이 묵직하게 와닿았다. 하지만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밖에서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는 그에게 차마 티를 낼 수 없었다.

    수아는 조심스럽게 약을 바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돌렸다.

    “오늘은 할 일이 많네요. 엄마 병원에 들렀다가 강 변호사님도 만나야 하고 윤성이도 괜찮은가 연락해 봐야 하고요. 아, 회사에도 잠깐 들러서 휴가계를 내…… 어?”

    소독약을 바른 후 따가울까 봐 입바람을 부는 그녀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화희가 사납게 팔을 빼냈다. 순간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린 그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왜 그래요?”

    놀란 수아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 눈을 내리깐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억양 없이 중얼거렸다.

    “팔이 이 모양이니 큰일이군요. 예쁘게 하고 장모님을 뵈러 가고 싶은데. 이 팔로는 혼자 머리 감기도 힘들고 샤워도 불가능하니까.”

    “……갑자기요?”

    “네, 갑자기.”

    1분 전에 구급상자를 가지러 일어나던 그녀가 끙끙대자 번쩍 안아 들려고 했던 사람이?

    싸늘했던 분위기는 그녀의 착각이었던 듯 화희가 엄살을 부렸지만, 적응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그는 상처를 눈짓하며 연이어 신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어진 수아는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설마 전처럼 수발들라고 그러는 건 아니죠?”

    “수발이 싫으면 수청은? 어차피 한 글자 차이 아닙니까.”

    “……나머진 주치의 선생님을 부르는 게 좋겠어요.”

    말문이 막혀 상처와 그를 번갈아 보던 수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구급상자에서 밴드를 꺼냈다. 아프다는 팔로 팔짱을 낀 화희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무정하게 이럴 겁니까?”

    “몸이 안 좋으면 쉬어야죠. 혼자 갔다 올게요.”

    “혼자? 그 몸으로?”

    “이 몸으로 수청보다는 덜 무리지 않겠어요?”

    “숙청보다는 나을 텐데요.”

    숙청? 수아가 되묻자 슥 시선을 돌린 화희가 허공을 노려보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수아 씨의 관심을 가져가는 것들은 싹 다 조져 버리고 싶어지니까.”

    다분히 진심이 담긴 듯 그의 어조가 싸늘하게 들렸다. 뭐지, 설마 방금 화를 내려고 했던 게 ‘내 관심’ 때문인 건 아니겠지?

    그녀의 미심쩍은 시선에도 눈살을 찌푸리며 한참 허공에 시선을 주던 화희가 불쑥 고개를 돌렸다.

    “다 싫다면 어제 한 말, 한 번만 더 해 주면 안 됩니까? 그럼 다 나을 것 같은데.”

    “무슨 말요?”

    “수아 씨가 욕조 안에 섹시하게 앉아서 물기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면서 사.랑.스럽게 했던 말 말입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건 이기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다음.”

    “……어, 기억 안 나는데요.”

    “그래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박력 있게 탁자를 치고 일어나서 귀엽게 허리에 손을 얹고 외친 말. ‘심지어 내가 당신을 많이 좋……!’”

    하, 어떻게 이렇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하지?

    뜻하지 않게 제 고백들을 맞닥뜨린 수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은 화희는 원하는 말을 해 줄 때까지 비키지 않을 것처럼 고집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어서 말해 줘요. 팔이 아파서 서 있기도 힘드니까.”

    “팔이랑 다리랑 무슨 상……. 설마 이젠 섹 타령이 아니라 사랑 공격이에요?”

    “둘 다죠. 아주 좋군요, 메뉴가 다채로워지니까.”

    “왜 그렇게 시옷 자가 들어간 단어에만 집착하는 거예요? 혹시 시옷 강박증이라도 있어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수아, 사랑, 섹스, 수청, 수발…….”

    “…….”

    “병 맞는 것 같습니다. 시옷에 집착하는 병. 하지만 모든 건 오로지 수아 씨가 해 줘야 의미가 있는 겁니다. 사실 팔이 완전히 나으려면 수아 씨에게 사랑받으면서 섹…… 읍!”

    으악, 입으로 채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른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밴드를 그의 입에 들이댔다.

    휙 머리를 젖히며 그녀의 손을 피한 화희가 마뜩잖게 제 팔을 눈짓했다.

    “다친 덴 여기입니다.”

    “지금 상처가 문제예요?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그 입부터 틀어막아야겠어요.”

    수아가 붕대를 휘두르며 그의 입을 둘둘 감아 버리겠다는 의지를 보였는데도 개의치 않은 화희가 느물거리며 물었다.

    “내가 혼날 소리를 한 겁니까? 그럼 많이 혼내 줘요. 때려도 좋습니다. 아, 이건 수타로군요. 역시 시옷이 들어간 단어는 은혜롭군요.”

    “……제발 그만 좀…….”

    “싫습……. 아, 또 시옷이 들어가네요?”

    그의 말을 막는 데 실패한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들었던 붕대로 제 양 귀를 둘둘 말아 버리는 시늉을 했다.

    * * *

    윤성은 멀리 보이는 높은 호텔 건물을 쳐다보면서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흠씬 얻어맞은 데다 찬물에 빠졌던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러나 아픈 것보다 서글픈 마음이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대체 내 인생은 왜 이럴까.

    고아로 태어난 데다 살인자에게 길러지고. 그도 모자라 저지르지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다.

    당장만 해도 죽을 뻔했다 겨우 살아났는데도 위로를 받기는커녕 돌아갈 곳조차 없었다. 수아 납치 사건의 피해자이자 참고인으로 경찰들의 집요한 심문에 시달리다가 겨우 풀려났는데도, 아버지가 두려워서 온종일 피해 다녀야만 했다.

    하루를 고민하며 이곳저곳 방황해 봤지만 지치고 지쳐서 쉬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결국 갈 곳은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찬 저 호텔뿐이었다.

    결국 올 데가 이상한 여자가 있는 여기뿐이라니.

    “천윤성 씨죠?”

    막 입구에서 들어서려는데, 남자 둘이 위협적으로 앞을 막아섰다. 윤성이 멈칫 그들을 바라보자 둘 중 하나가 경찰 신분증을 내밀며 차게 말했다.

    “천윤성 씨, 당신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과 자본시장법 위반…….”

    죄목이 어찌나 긴지 자세히 들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부신이 짜 놓은 각본대로 휩쓸릴 걸 각오했기에 윤성은 순순히 그들에게 자신을 넘기려 했다. 차라리 어디로 갈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다행일지도 모른다면서.

    그런데 경찰의 마지막 말에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권영훈 씨 살인 교사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체념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던 윤성은 움찔 몸을 떨며 주춤 물러섰다.

    살인이라니? 다른 죄들은 키워 준 대가라 치고 대신 뒤집어써 줄 수 있어도 살인죄만은 아니었다. 그것만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무거운 죄였다.

    발밑이 푹 꺼져서 깊은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두려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지, 지금 무슨 말을……! 아니에요, 난 아무도 안 죽였어요!”

    그가 고개를 저으며 물러서자 경찰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 봤자 들어 주지 않을 기색이었다.

    “그건 일단 서에 가서……. 어, 천윤성 씨!”

    오히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주춤거리는 윤성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수갑을 피해 재빨리 물러서며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잡아!”

    근처에 잠복해 있던 사복 경찰들이 그를 잡아채려고 달려들었으나 그는 가까스로 그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지금 잡히면 변명할 기회조차 없이 살인자로 몰릴 것이다. 억눌렀던 억울함과 분노가 목 끝까지 차올라 윤성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러나 경찰들을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막 대로로 들어서기도 전에 그는 뒷덜미가 잡아채여 바닥을 뒹굴었다.

    아픔을 느낄 사이도 없이 막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아슬아슬하게 그를 칠 뻔했던 차가 끼이이익, 멈춰 서고 누군가 외쳤다.

    “야, 타!”

    처음엔 자신을 잡으려는 일행인 줄 알았던 윤성은 운전석의 해린을 보자 고민할 시간도 없이 올라탔다.

    “거기 안 서!”

    차 때문에 가로막혀 멈칫했던 경찰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해린은 그가 타자마자 엑셀을 끝까지 밟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들이 탄 차는 바로 경찰을 따돌리고 대로로 끼어들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돌아보려던 윤성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주변을 살폈다.

    한겨울 찬 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할퀴고 머리칼이 바람에 미친 듯 날려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추운 건 둘째 치고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너무 적나라하게 들렸다.

    도망치는 주제에 오픈카라니……!

    “차 좀 닫아!”

    놀랄 사이도 없이 윤성이 큰 소리로 외치자 어깨를 으쓱한 해린이 차 사이를 질주하며 큰 소리로 마주 외쳤다.

    “어, 나도 반가워! 별거 아니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고! 나, 진짜진짜 이런 거 꼭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

    “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윽!”

    뭐, 뭘 해 보고 싶었다고? 윤성은 진심으로 신나 보이는 해린을 어이없이 바라보다 찬 바람에 얼굴이 터져나갈 것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사실 기가 막혀서 더 할 말도 없었다.

    주해린은 정말 세상 모든 근심을 사라지게 할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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