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 *
“멍청한 놈들!”
전화를 내던지며 버럭 호통친 부신은 책상 위의 물건을 냅다 쓸어 버렸다. 분노를 진정시키려 애썼으나 들끓던 화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격해져 서재 안에 보이는 것들을 마구 부쉈다.
도대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36년 전으로 돌아가는 건가! 박화희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던 그때로?
아니, 상황은 더 나빴다. 최소한 36년 전에 부신은 화희의 계집을 죽이기라도 했다. 그러니 박화희가 사라졌을 거라며 천 년 전의 자신이 말해 주었다.
3년 전, 시간이 반복되는 것처럼 다시 박화희와 그 계집을 만난 건 신의 안배라 여겼다. 신이 지난 일들의 치욕을 갚으라 기회를 준 것이라고.
그래서 그때처럼 그년만 죽이면 화희도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고 일을 진행한 것이었다.
민수아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박화희 때문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다중 추돌 사고까지 꾸며 냈다. 하지만 천윤성, 그 빌어먹을 놈이 키워 준 은혜도 배신하고 그년을 구했다.
무능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고아 새끼가 감히 내 일을 방해해?
부신이 계획한 모든 것이 틀어졌다.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일들이 물거품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박화희가 건재하는 한 회사도, 자신의 야욕도 한낱 꿈이었다. 오히려 그년을 없애려 한 걸 들켰으니 박화희는 더더욱 자신을 없애려 안달 낼 것이다.
차라리 이대로 외국으로 갈까. 전처럼 숨어서 시간을 좀 끌다가 놈이 방심할 때 민수아를 다시…….
그래,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신은 자신의 편이었다. 천 년 전에도, 36년 전에도 할 수 있었던 일을 지금에서야 하지 못할 리가 없다. 결코 자신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리가…….
씩씩대던 부신은 떨리는 손을 느끼고 밭은 신음을 흘렸다. 다리의 근육이 굳기 시작하면서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윽…… 어서 야, 약을…….”
그는 안간힘을 써서 책상까지 기어 갔다. 빨리 약을 주사하지 않으면 끔찍한 고통이 찾아들 것이다.
조급하게 서랍을 뒤지는 그의 손이 경련하듯 크게 떨렸다. 막 약을 찾아 손에 쥐고 희색만면한 순간 기긱, 등 뒤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뭔가 긁적이는 것처럼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불길한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부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검은 슈트를 입은 장신의 남자가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집을 지키는 경호원들이 수십이었을 텐데 어떻게 뚫고 들어왔지?
“어, 어떻게 여기에…….”
기긱, 손에 든 물건으로 소파 손잡이를 성의 없이 긁어 대던 화희가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섬뜩한 살기에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권 실……!”
경악하여 뒷걸음질 치던 부신은 버릇처럼 권 실장을 부르려고 겨우 입만 달싹였다. 그러나 곧 허무하게 깨달았다.
맞아, 권 실장은 내가 죽였지. 그나마 쓸모 있는 놈이었는데 귀신 같은 저놈 때문에.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난 화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툭 내뱉었다.
“하, 그 썩은 내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뭐?”
“역겨워서, 원.”
모욕적인 말보다 그가 들고 있는 단검이 더 눈에 거슬렸다. 오래된 것처럼 날이 무디고 검게 변한 검으로 곧 자신은 난도질당할 것만 같았다.
서랍 안에 든 총을 떠올린 부신이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것을 본 화희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따악, 작은 소리였음에도 고막이 터져 나갈 것처럼 크게 들렸다.
“으윽…….”
갑자기 서재 안의 공기가 진동하며 그를 짓눌렀다. 떨리는 손으로 귀를 감싸 쥐던 부신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눌린 것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공기가 점점 더 무거워져 급기야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납작 엎어지고 말았다.
그의 머리맡으로 걸어온 화희가 표정 없이 그를 내려다보며 손끝으로 단검을 돌렸다.
스스슥,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어디에선가 벌레 떼처럼 보이는 것들이 무리 지어 날아들었다.
“가, 감히 이게 무슨 짓이냐! 나, 나는…… 너, 너를 낳은 아버지였…… 으윽!”
부신은 겨우 고개를 쳐들고 중얼거렸다. 한없이 수치스러웠으나 사람의 능력을 넘어선 존재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할 뿐이었다.
“아버지라…….”
무표정하게 코웃음 친 화희가 단검을 치켜들었다. 검은 그림자처럼 몰려들었던 벌레 떼가 손바닥 길이만 한 단검에 들러붙었다.
어느새 화희는 꿈틀거리는 긴 검날을 가진 장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네놈이 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시끄러워.”
그가 검을 휘두르자, 짐짓 악을 쓰던 부신은 팔과 다리의 살이 찢기고 뼈가 잘리는 격통에 자지러졌다.
“으아악! 내 파, 팔이!”
화희는 극통과 공포에 몸부림치는 그를 무감하게 내려다보다 비웃듯 말을 던졌다.
“그래, 친자였던 도리로 너의 장수를 기원하마.”
“사…… 살려…….”
“부디 고통만 느끼면서 오래오래 살아라.”
끝없이 커지는 고통에 더 이상 허세도 부릴 수 없었다. 부신은 애원하며 손을 뻗어 화희를 붙잡으려 했다.
소, 손이 있……. 잘린 줄 알았던 팔과 다리가 붙어 있음에 찰나 안도했으나 그뿐, 화희가 곧장 부신의 머리에 검을 내리꽂았다. 무표정해 보였던 그의 눈에 살의가 희게 번뜩였다.
그러나 찾아온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부신의 눈앞에 부신 건설의 회장실에 처음 입성했을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깝던 기억은 곧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다음에는 처음 유 의원의 약점을 잡아냈을 때의 장면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 안 돼! 부신은 본능적으로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화희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인생에 그나마 좋았던 기억이 하나둘, 극악한 고통과 함께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머릿속에 남은 것은 그가 그토록 잊으려 애쓰던 기억뿐이었다. 그를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비웃던 목소리와, 시선. 그를 경멸하며 휘두른 폭력에 당했을 때의 고통과 억울함만이 남았다.
좌절감에 몸부림치던 부신은 헐떡거리며 바닥에 늘어졌다. 아무리 애를 써 보았으나 자신이 무엇을 떠올렸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려 애쓸 수도 없었다. 몸을 좀먹던 고통 또한 극도로 생생해졌다. 사지가 말을 듣지 않고 근육이 수축되는 고통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헐떡대던 부신의 눈앞에 흰 것이 꿈틀거렸다. 구더기가 눈알을 파먹고 들어가는 느낌이 끔찍했다.
“으악……!”
구더기가 들끓는 느낌이 선연해서 부신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 자신에게조차도.
“내 아가씨가 깨실 때가 됐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작품을 감상하듯 고개를 모로 기울여 그를 내려다보던 화희의 목소리가 어느새 멀어졌다.
더 이상 비명도 지를 수 없게 된 부신은 침을 흘리며 꿈틀거렸다.
* * *
‘……신부와 끊어질 수 없는 끈이 있으면 좋겠…….’
나는 마지막에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부디 다음엔…….
눈을 감는 순간 떠오르는 건 당신에 대한 나의 간절한 바람…….
복받치는 감정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잠결에 흐느끼던 수아는 눈을 떴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데 꿈의 잔상처럼 남은 지독한 감정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아!”
눈물을 닦으며 일어나려던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도로 누웠다.
꿈의 여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싹 사라졌다. 당장 욱신거리는 건 감정이 아니라 온몸이었다.
아픈 것보다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통증에 수아는 얼굴을 붉히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옆을 살폈으나 밤새도록 괴롭히던 화희는 보이지 않았다.
눈뜨자마자 그를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정말 있는 힘껏 때렸을 것 같았다.
흰 눈은 무슨!
천 년 동안 그녀만 기다리며 순정과 순결을 지키느라 흰 눈 같다던 남자는 한 마리의 고삐 풀린 짐승…… 그것도 발정……. 하아…….
애달픈 눈빛에 요염한 눈웃음을 치면서 “처음이니까.”, “그동안 많이 참았으니까.”, “너무 오래 참아서 자제가 안…….”, “수아 씨가 너무 좋아서 또 하고 싶…….”,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그래도…….” 등등 끝없이 졸라 대며 그녀가 기진맥진할 때까지 몰아붙였다.
혹시나 해서 이불을 들추고 제 몸을 내려다보던 수아는 차마 더 보지 못하고 황급히 덮었다.
블라인드가 쳐져서 어두운 와중에도 목덜미와 가슴팍에 울긋불긋 든 단풍이 눈에 띄었다. 이불을 들췄던 손만 해도 몇 군데 순흔이 남아 있었다.
아씨, 이 꼴로 출근은 어떻게 하라고!
달칵.
“……잘 잤……?”
문을 열며 막 방에 들어서던 화희가 입술을 깨물며 씩씩대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잘 잤겠어요?”
수아가 투덜거리자 슬쩍 문을 닫고 들어온 화희가 침대 곁에 앉으면서 웃었다. 나신에 순흔을 잔뜩 달고 막 잠에서 깬 그녀와 달리 그는 완벽한 슈트 차림이었다.
“미안해요, 수아 씨가 잠에서 깨는 걸 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깨어날 기색이 없기에…….”
“지금 그런 게 미안할 때……!”
자신에게 손을 뻗는 그를 흘겨보며 따지려던 수아는 멈칫 말을 멈췄다.
웃고 있는 그에게서 날카롭고 섬뜩한 뭔가가 느껴졌다. 놀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화희가 막 그녀의 이마에 닿으려던 손을 도로 거두고 혀를 찼다.
“역시 아는군요. 밖에서 수아 씨만 생각하면서 세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수아는 놀란 표정을 감추고 그를 자세히 살폈다. ‘수아 씨가 싫어할 만한 짓’을 했다고 고백했을 때의 느낌이었다.
“……멀리 다녀왔어요?”
그녀가 조용히 묻자, 화희가 고개를 저으며 미묘하게 웃었다.
“아니요, 지금 다녀온 건 아니고 시간을 조금 겹쳤습니다. 하지만 내 육체는 현재에 있었으니까 당신이 내 살의를 느끼는 걸 겁니다.”
“……네?”
“말로 잘 설명할 수는 없는데, 아무래도 힘은 쓰면 쓸수록 늘어나더군요.”
“힘을 썼다고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캐묻지 않으려고 애쓰던 수아는 벌떡 일어나 앉으려다 도로 침대 위로 쓰러져 버렸다.
잠깐 움직였을 뿐인데 몸 안을 내달리는 저릿한 통증에 순간 식은땀이 다 났다.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급히 부축한 화희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수아 씨, 어디 아파요?”
“하, 어디가 아프냐고요? 몰라서 물어요?”
아픈 데다 민망함까지 겹친 수아는 그의 손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움찔 어깨를 떤 화희가 한 걸음 물러나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그게, 음, 처음이라서 자제가 안…….”
“그건 당연히 미안할 거고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녀가 쏘아붙이자 화희가 곤란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적거리다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아, 수아 씨가 죽을 뻔한 게 너무 화가 나서 법을 조금 어겼……. 그런데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정말 궁금한 겁니까?”
“그게 아니라요, 힘을 썼다면서요? 어제 팔에 낸 상처도 되게 아파 보이던데 또 피를 낸 건 아니죠?”
“…….”
“봐요, 어디. 더 다쳤으면 진짜 화낼 거예요.”
화희가 잠자코 손을 내주다가 고개를 저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정말 적응 안 되네요.”
“뭐가요?”
조심스러운 손길로 셔츠 소매를 풀던 수아가 고개를 들자, 화희가 그녀의 어깨를 꽉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보다 내가 다쳤는지 더 염려해 주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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