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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77화 (77/100)
  • 77화

    저 멀리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윤성과 찰나 눈이 마주쳤다. 그 역시 안도와 혼란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화희가 시야를 가리듯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쉰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가 모든 소음을 압도했다.

    “나만 봐요.”

    한순간 시공간을 건너뛰어서 혼란스러운데 그녀를 안은 안온한 화회의 품만 선연하게 느껴졌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현실을 확인하듯 그를 올려다보자 마주친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안도와 환희, 애틋함과 안타까움, 염려와 초조함, 이 순간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오로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화희가 나를 구해 줬어.

    그제야 뒤늦게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수아는 그의 품에 기대며 벅찬 감정을 겨우 중얼거렸다.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사님! 민수아 씨!”

    “괜찮으십니까? 구급차가 대기 중이니…….”

    어디선가 민철이 달려와 우산을 받쳐 주고 담요를 내밀었다. 그를 필두로 낯선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낯선 목소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자, 수아는 순간 본능적인 거부감이 느껴져 움찔 몸을 떨었다.

    달래듯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화희가 주위를 노려보며 나직이 명령했다.

    “물러서.”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화희는 그녀를 안은 채 사람들 사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수아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비릿한 물 냄새보다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그의 체취가 점점 강해졌다.

    민철이 열어 둔 차 안 의자에 그녀를 내려놓는 화희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수아는 그가 잠시라도 저에게서 떨어질까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차 밖에서 담요를 낚아채듯 받아 든 그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우리, 꼭 붙어 있을까요?”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화희는 옆에 앉아 그녀를 담요로 감싸고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차 문이 닫히자 온전히 둘만의 공간이 되었다.

    멈춘 숨을 쉬듯 길게 내뱉은 화회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수아가 동시에 말했다.

    “너무 늦어서 미안…….”

    “……정말…… 고마…….”

    잠시 서로를 마주 보던 둘은 그만 말을 멈췄다.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젖은 이마에 제 입술을 꾹 누른 화희가 침음을 흘렸다. 목을 울리는 신음이 복받치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는 것처럼 잔뜩 쉬어 있었다.

    수아는 그를 힘껏 껴안으며 결국엔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 * *

    차를 타고 오는 동안 기진맥진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욕실이었다.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안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던 화희가 멈칫 물었다.

    “혹시 물이 싫어요?”

    수아는 걱정스러운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집에 도착하니 어느 정도 정신이 들어서 납치도, 물에 잠겼던 것도 한참 지난 일만 같았다.

    욕조 옆에 걸터앉아 그녀를 연신 쓰다듬는 그의 소매가 검붉은 피로 젖어 있는 게 보였다.

    수아는 놀라 몸을 일으키며 그의 팔을 자세히 살폈다. 왜 못 봤는지 모를 정도로, 양팔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 다쳤어요?”

    제 팔을 힐끗 내려다본 그는 팔을 뒤로 감추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별거 아닙니다.”

    “많이 다쳤잖아요. 얼른 치료부터 해요.”

    “난 신경 쓰지 말고 가만히 쉬어요.”

    수아는 그의 표정을 보고 화희가 자신을 구하느라 스스로 피를 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같이 가서…….”

    “싫습니다.”

    의외로 단호히 고개를 젓던 그가 욕조를 짚은 그녀의 손에 난 생채기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벨트를 풀려다가 깨진 플라스틱에 긁혀 생긴 상처였다.

    화희가 당장 손가락을 깨물려고 하자, 수아는 얼른 그의 손목을 잡아 저지하며 언성을 높였다.

    “난 괜찮다니까요! 제발 더 이상 다치지 말아요. 당신이 나 때문에 상처 입고 아프면 난 너무 폐가 되는…….

    “폐?”

    기가 막힌 듯 되물은 화희가 그녀를 응시하다 욕조를 꽉 쥐었다. 우드득, 욕조가 부서질 것처럼 비명을 지르자 그는 관절이 하얗게 질린 손을 억지로 떼어 내 얼굴을 가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깟 상처 따위가 뭐라고 그딴 말을 합니까. 어차피 난, 당신을 구하지 못하면 다 끝낼 생각이었는데.”

    수아는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숨을 멈췄다. 그녀가 죽었으면 따라 죽었을 거란 말에 실린 무게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에게 맹목적일 수가 있을까. 민수아가 자신의 세상이라도 된 것처럼 화희는 온 마음과 사활을 걸었다.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닐까? 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는데. 오늘만 해도 단 몇 시간 만에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나들었다. 죽음 앞에 한없이 무력하기만 한 내가 두렵지는 않을까.

    그러지 말라고, 그런 무서운 생각 하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꽉 막힌 목에서 걸린 말이 꺼끌꺼끌했다.

    수아는 자신을 차마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남자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어둠을 응축시켜 놓은 것만 같았다.

    그녀가 얼굴을 가린 그의 손에 가늘게 떨리는 제 손가락을 댔다. 조금 닿았을 뿐인데, 그가 불에 덴 것처럼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검은 눈동자가 짙은 감정으로 번들거렸다. 그의 가늘게 떨리는 긴 속눈썹이 고통에 지친 그의 마음처럼 보였다.

    내가 죽음에 가까웠던 만큼 이 남자도 죽음에 가까웠구나,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래, 처음엔 그의 감정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며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감정이 언제부터 어떻게 생겨난 것이든, 무엇에 기인하든 상관없어졌다.

    그의 집착에 가까운 지독한 사랑에 휩쓸려서 수아 역시 그를 그만큼 사랑하고 싶어졌다. 이렇게까지 그녀의 감정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건 이 남자뿐이었다. 아니, 벌써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화희를 사랑하고 있었다.

    “화희 씨…….”

    수아가 손을 잡아 깍지를 끼자, 시선을 올린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라는 거면 관둬요.”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건 이기적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랑해요.”

    순순히 딸려 오는 손을 끌어당기자 화희가 고개를 모로 꺾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한 말을 당장 이해할 수 없는 듯 그답지 않게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뭐라고…….”

    수아는 빈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며 내뱉듯 고백했다.

    “화희 씨, 사랑해요.”

    “……뭐?”

    “사랑한다고요.”

    “…….”

    “그러니까 그런 말은 나중에 해요. 내가 늙고 늙어서 더 살 수 없을 때, 그때.”

    하, 짧게 숨을 토해 낸 화희가 눈길을 내려 깍지 낀 손을, 그녀 손의 생채기를, 그리고 다시 눈길을 올려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어리는가 싶더니 투명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것처럼 화희는 그녀를 응시하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아롱지어 떨어져 멈추지 않자, 먹먹해진 수아는 한껏 고개를 들어 그에게 입을 맞췄다.

    잠시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있던 화희가 욕조 안에 몸을 반쯤 기울여 그녀를 사납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대번에 수줍게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아프도록 빨고서 입 안으로 뜨거운 혀를 쑤셔 넣었다.

    이리저리 맛을 보듯 헤매던 혀가 그녀의 것을 찾아내서 집요하게 옥죄고 서슴없이 비벼 댔다. 진득한 키스에 온몸에 저릿해졌다.

    “……아…….”

    그녀가 옅은 신음을 흘리자마자 아무리 삼켜도 모자란다는 듯 입술과 혀를 정신없이 삼키고 빨던 화희가 그녀를 안아 욕조에서 끄집어냈다.

    물에 흠씬 젖은 그녀를 제 무릎 위에 앉힌 그의 눈빛에 그녀를 향한 소유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제 난 어떡합니까.”

    “……왜요?”

    “참기 싫어졌는데.”

    쉰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의 말은 그녀의 입술 위에서 눈처럼 녹았다. 마주 닿은 입술에 닿은 입김이 델 듯 뜨거웠다.

    수아는 정신없이 그의 입술에 매달리다 그가 자신을 침대에 눕힌 줄도 몰랐다. 뜨겁던 그의 입술이 떨어져서 허전함에 눈을 뜨자, 어느새 나신이 된 그가 침대 곁에 서서 그녀를 빤히 훑고 있었다.

    잠시 넋을 놓게 될 만큼 남자의 육체는 아름답고 또 위압적이었다.

    길고 우아한 목선과 쭉 뻗은 쇄골, 넓은 어깨, 잔근육으로 잘 짜인 상체는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유려한 조각 같았다. 가슴팍의 흉터에서부터 뻗어 나와 붉은 사슬처럼 상체를 휘감은 주문까지도 흰 피부 위에 도드라져서 기이하게 아름다웠다.

    그녀의 시선이 잘록한 허리와 판판하게 굴곡진 복근까지 내려가다 흠칫 멈추자, 화희가 목이 마른 것처럼 길게 입술을 핥으며 몸을 겹쳐 왔다.

    “그렇게 쳐다보면…… 곤란합니다.”

    “……읏, 왜요?”

    맞닿은 아랫배에 그의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속삭이듯 묻자 그는 잠시 수아의 마른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나른하게 웃었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웃음에 속은 것도 잠시, 그는 블라우스를 잡아 뜯듯이 벗겨 냈다. 단추를 풀지도 않고 머리 위로 벗겨 내는 바람에 투툭, 뜯어지는 소리가 났으나 바닥에 던져 버린 그는 거침없이 나머지 옷도 모두 벗겨 냈다.

    그녀를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크고 묵직한 몸이 곧 그녀를 빈틈없이 옭아맸다.

    낯선 기대감에 얼굴이 붉어지고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제 반응이 부끄러워진 수아가 몸을 비틀자, 화희가 긴 손가락으로 촉촉이 젖은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지다 입 안으로 미끄러뜨려 점막을 헤집었다. 동시에 그는 고개를 숙여 예민한 부분을 아플 정도로 세게 빨았다.

    “……아!”

    놀란 수아가 그의 가슴팍을 툭 치자 눈웃음친 그가 그녀의 다리를 벌리며 자신의 다리를 끼워 넣었다.

    빤히 내려다보는 눈빛은 더없이 다정한데 그의 몸짓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을 끌어내고 싶어서 안달 난 듯, 그는 입술과 혀로 온몸을 빨고 핥았다.

    자극이 지나쳐 그녀가 몸을 비틀고 신음을 흘리면 다른 곳으로 입술을 옮겨 또다시 짓궂게 핥고 이를 세웠다.

    몸 구석구석 그의 손과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에게 먹히는 느낌이었다. 아랫배가 더 뜨거워질 수 없을 만큼 끓어올라 연이어 신음이 샜다.

    “……읏, 조금만 천천히…….”

    “싫어요.”

    아랫배에 터질 듯한 흥분이 명백하게 느껴지는데도 화희는 한참 온몸을 정성 들여 희롱했다.

    애무만으로 절정에 이른 수아의 뺨을 더없이 소중하다는 듯 쓰다듬은 그가 입술에 입을 맞추고 고백했다.

    “내게 민수아는 이번 생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얻은 나만의 삶. 내 감정이 부담스럽더라도, 미안하지만, 받아 줘요.”

    그의 고백을 음미할 새도 없었다.

    바로 고개를 숙인 화희가 그녀의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을 손안에 가득 쥐고 쓸어올렸다. 손끝이 여린 살결을 스치고 지나가서 움찔 몸을 떠는 순간, 그가 천천히 움직였다.

    “……앗!!”

    수아는 몸을 가르는 압박감에 허리를 활처럼 휘면서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나 화희는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꽉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꽉 차는 느낌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던 몸은 그의 저돌적인 움직임에 부서질 듯 흔들렸다. 지나친 전율이 온몸을 쥐어짜고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절정이 수차례 찾아들었다.

    “……으읏!”

    소스라친 그녀가 이대로 부서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그녀의 몸을 추슬러 안고 등을 토닥였다.

    “……진짜…… 이제까지 어떻게…… 참았…… 으읏!”

    “처음이니까…… 이번만 마음대로 하면 안 됩니까?”

    내부에 휘몰아치는 전율에 몸을 떨면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눈을 마주친 화희가 유혹하듯 웃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과 깊게 파인 미간, 붉어진 볼과 입술이 더없이 섹시했다.

    “사랑받는 건 이런 기분이군요.”

    그 웃음에 또 속아 넘어간 것이 실수였다. 수아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화희는 그녀를 집요한 뱀처럼 돌변해 빈틈없이 다시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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