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 *
“……민수아!”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발이 젖어 들어 몸을 움츠리는 수아를 누군가 애타게 불렀다.
“누나, 정신 차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낯익었다.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불안한 감정이 물결처럼 출렁거리며 억지로 의식을 일깨웠다.
수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
믿기지 않게도 바로 눈앞에서 뿌연 물이 찰랑거렸다. 커다란 수족관에 잠긴 것처럼 유리창 너머 사방이 온통 물이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내가 왜……?
의식을 잃기 전, 그녀를 쏘아보던 악의에 찬 눈빛과 마주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도망치려 했지만 비상구 문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그래, 그리고 윤성이가 있었어. 큰 소리에 깼는데 윤성이가 위험해서 내가…….
뒤죽박죽된 기억을 되새기던 수아는 뭔가를 잡아 뜯으며 그녀를 올려다보던 윤성과 눈이 마주쳤다.
“정신이 좀 들어?”
그녀는 그의 뒤로 보이는 창밖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누나가 납치된 걸 구하긴 했는데 쫓기다가…… 차가 가, 강 속으로 떨어졌어.”
끼긱-
차 안으로 물이 들어오며 쇠가 뒤틀리는 소리가 울렸다.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에 기겁한 그녀는 허겁지겁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게 금이 간 유리창, 찌그러진 문틈 사이로 물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아래로 쏠린 각도로 보아 차는 점점 수심이 깊은 바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는 듯했다.
고개를 빼서 창밖을 멀리 내다보려고 했는데 몸이 묶인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너, 수영할 수 있지? 얼른 차 밖으로…….”
다급히 옥죄는 안전벨트를 잡아당기며 윤성을 재촉하려던 수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말을 멈췄다.
의자 손잡이에 짓눌린 그녀의 안전벨트 잠금장치가 완전히 뭉개졌고, 윤성은 아까부터 그것을 잡아 뜯는 중이었다. 얼마나 애썼는지 손톱이 다 깨져서 피가 스며 나왔다.
“마, 말도 안 돼…….”
기겁한 수아가 안전벨트를 잡아 빼 보며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끈은 고정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벨트 밖으로 나오려고 버둥거리던 그녀는 움직이는 게 여의치 않자 울컥 울음이 치솟아 입술을 깨물었다.
“너, 너부터 어서 나가! 나가서 도와줄 사람을 불러 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성이 고개를 저었다.
“수압 때문인지 문이 안 열려. 혹시 문을 연다 해도 차에 금방 물이 차 버릴 거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수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윤성의 말이 맞았다. 차 문을 여는 순간 물이 쏟아져 들어올 테고 자신은 의자에 묶인 채 익사할 게 분명했다.
수아는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왜, 왜 너, 너까지…….”
“미안해……. 다 내 탓이야. 진작에 내가 뭐라도 했어야 했는데……. 내가 비겁해서 누나까지…….”
“입 다물어! 지금 누구 탓인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무, 물이 차면, 너, 너라도 나가!”
애써 원망을 억누르고 용감하게 말했지만, 말끝에는 결국 울음이 터졌다.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윤성 역시 참았던 눈물이 터진 것처럼 울먹였다.
“싫어! 절대 혼자서는 안 나가……. 나,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누나만은 꼭 구할 거야…….”
겁에 질려서도 오기를 부리는 그를 보니 가슴이 지끈거렸다.
위기가 닥치자 버릇처럼 화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의 교통사고로 놀란 게 걱정이라면서 금방 온다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수아는 윤성을 마주 끌어안으며 화희의 이름을 연신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 닿길 간절히 바라면서.
제발, 화희 씨, 제발…….
그녀가 기도하듯 눈을 감고 중얼거리자 윤성도 따라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신에게 되뇌듯 말했다.
“그래, 누, 누나 남친이 구하러 올 거야. 그, 그 엘리베이터 사고 때처럼 귀신같이 알고 쫓아올 거잖아. 그때보단 시간이 있으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거칠게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다 다시 벨트 고리를 잡아 뜯는 윤성의 손이 차오른 물에 잠겼다. 소름 끼치도록 찬 물에 몸이 젖어 들자 수아는 온몸을 떨었다.
제 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 준 윤성이 흘깃 창밖을 내다보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박화희. 잘난 척은 더럽게 하더니, 왜 이렇게 늦…… 어?”
쏴아아아-
그가 화희의 이름을 입 밖으로 뱉자마자 파도가 인 것처럼 차 주위의 물이 크게 출렁였다.
“누, 누나…… 그게 뭐야?”
놀라 창문으로 고개를 길게 빼던 윤성이 돌연 놀란 눈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수아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작게 탄성을 흘렸다.
붉은빛이 차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반딧불처럼 붉은빛을 내뿜는 작은 조각들은 잘게 몸을 떨면서 그녀를 감싸듯 떠돌았다.
화희가 보여 주었던 ‘결계’였다.
* *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삼마산 입구에 집결된 경찰은 빗속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장비와 인력으로 천윤성의 차나 그가 쫓던 승합차를 찾았다.
삼마산으로 향하던 화희는 급히 차를 돌렸다.
천윤성의 핸드폰 신호가 갑자기 한 곳에서 멈췄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신호가 잡힌 도로에는 바닥에 긁힌 타이어 자국이 일부만 남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불어난 비에 흙탕물이 떠내려와 도로를 덮은 데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강물에 그마저도 침수 일보 직전이었다.
뒤를 쫓던 김세원이 차에서 내려 헐레벌떡 달려왔다.
“삼마산 입구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승합차를 발견했답니다! 납치범들이 차를 버리고 산 위로 도망친 것으로 보입니다.”
“천윤성의 차는?”
“저, 그게 찾을 수가 없답니다.”
도로 위에 무릎을 꿇은 화희는 바닥에 짙게 남은 스키드 마크를 노려보았다.
손을 대자마자 보이는 것들에 이가 갈렸다. 초조함이 끓어넘쳐 피를 태우고 머릿속을 하얗게 탈색시키는 것만 같았다.
스키드 마크에 보이는 환영은 그들이 의도한 수아의 죽음이 명백했다.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그녀를 암매장시키려는 것이었다.
숨이 막혀 괴로워하는 수아의 모습이 얼핏 보이자 화희는 제 손끝을 물어뜯어 피를 내서 남은 사념을 마저 일깨우려 했다.
그러나 환영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공백만이 남았다.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지? 그녀를 잡아챌 죽음의 덫이 완성되면 어김없이 닥쳐오던 환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피를 흘려 내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에서도 잠깐 수아의 환영을 보았었다. 의식을 잃은 채 차 안에 쓰러져 있는 그녀를, 놈들이 막 끌어 내리려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전화로 천윤성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환영이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천윤성이 있어서 보이지 않든가 혹은 무언가 바뀐 것이다.
쓸데없이 흐르는 시간이 지독히도 생생히 느껴졌다.
우산을 든 민철이 안절부절못하면서 서 있다가 빗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언성을 높여 재촉했다.
“이사님, 산 쪽으로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지체하면 비 때문에 입산이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화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을 노려보았다.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산이 아니라는 느낌이 강해졌다.
‘……누나만은…….’
그가 강을 돌아보는 찰나, 웅얼거리듯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만은…… 구했어야……. 어떻게든…….’
직접 들리는 게 아니라, 두꺼운 벽 너머로 전해진 것처럼 희미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천윤성의 목소리였다. 흠칫한 화희는 강을 노려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어서 구해 줘……. 제발 민수아를…….’
천윤성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더불어 말소리도 또렷해졌다.
“……천윤성.”
그가 소리 내어 윤성의 사념에 대답하는 순간, 물에 젖은 손이 그의 어깨를 확 잡아챘다.
돌아보자마자 그토록 그리던 얼굴이 보였다. 물속을 투영해서 들여다보는 것처럼 흐릿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것처럼 수아는 시선을 마주한 채였다.
남의 사념 속이라도, 여전히 예쁘고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화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수아를 잡으려다가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 움찔 귀를 기울였다.
‘……하아, 나더러 혼자 가라고 하지 마. ……내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도 없는데.’
천윤성? 왜 그놈 목소리만 이리 또렷하게 들리는 거지? 그를 인지하자마자 뿌옇던 시야가 점점 맑아졌다.
거대한 수족관 같은 차 안, 차디찬 물에 잠긴 채 수아가 입술을 깨물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물기 어린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다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물이 마치 손에 닿을 듯 선명했다.
화희는 불현듯 깨달았다.
아니다, 이것은 환영이 아니었다. 사념도 아니었다.
천윤성의 시야였다. 그의 눈을 통해서 수아를 보고 있는 것이다.
화희는 고개를 번뜩 들고 강을 노려보다 손목을 물어뜯어 피를 냈다. 잘게 조각난 그의 핏방울이 빗속에서 떠돌다가 바람에 떠밀리는 것처럼 강 쪽으로 흩어졌다.
그것을 눈으로 좇은 그는 차에 급히 올라탔다. 머릿속에서 강한 의지가 비명을 질러 댔다.
절대 민수아만큼은 빼앗길 수 없다.
늘 간발의 차이였다. 남은 생에 비하면 터럭만큼도 되지 않는 찰나의 시간 때문에 그는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아 만큼은 절대로, 그의 육체를 벗어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향해 내달리는 차가 마음처럼 빠르지 않아 애가 탔다. 한 손으로 차를 몰면서도 그는 연신 피를 내 공중에 흩뿌렸다.
그가 끌어올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적지만 그 잠깐의 시간이 그녀를 구할 희망이었다.
조금만 버텨 줘요, 제발.
작은 시내처럼 물이 흐르는 도로를 따라가다 차에서 뛰어내린 그는 비탈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출렁이는 강 위로 환영이 검은 그림자처럼 얼핏 비쳤다.
물속에 잠긴 그녀가 마지막 순간 그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꺼져 들어가는 그녀의 목소리에 심장이 그대로 멎는 듯했다.
화희는 자리를 박차고 그대로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강물이 그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세차게 내리던 비가 한순간 공중에 멈춰서 유리 조각처럼 박혔다.
* * *
몇 분 지나지 않아 턱까지 물에 잠겼다. 물에 잠겨 얼어붙은 손도 둔해져서 숨 쉬는 것만도 벅찼다.
수아는 얼어서 감각이 없는 손으로 약혼반지를 어루만졌다. 빛무리는 물속에 잠겨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밝아진 것 같았다.
그 빛을 보고 있으니 숨이 막혀 와도 두려움은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했다. 화희가 곧 올 거라는 믿음도 강해졌다.
수아는 코까지 차오르는 물에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꿈결처럼 화희가 있었다.
나는 것처럼 그녀의 창문 쪽으로 다가온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손바닥을 유리창에 갖다 댔다.
“……화희 씨…….”
믿기지 않아 수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머리 위로 세찬 비가 쏟아져 내렸다.
화희의 품에 안긴 채 수아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단단한 팔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비를 가려 주었다.
그녀와 얼핏 눈을 마주친 화희가 슬픈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수아는 그를 더듬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을 덮으려는 것처럼 내리는 세찬 비가 믿기지 않았다.
사이렌 소리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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