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 *
윤성은 창 너머로 건너 건너 앞에 있는 승합차를 넘겨보다 급히 몸을 숙였다. 다행히 병원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미행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씨,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로부터 비리를 뒤집어쓰란 명령을 듣고서 모든 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더한 막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권 실장이 자살했다니.
수아를 응급실 앞에 내려다 준 후, 주차장에서 수아 곁에 있어 줘야 하나 고민하던 윤성은 권 실장이 투신자살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욕심 많고 야비하던 인물이 결코 자살할 리 없었다. 게다가 그는 분명 부신이 저지른 비리를 윤성과 뒤집어쓰기로 했었다.
윤민형, 권 실장, 아버지와 관련된 죄를 뒤집어쓴 사람이 벌써 둘이나 죽었다.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승합차에서 낯익은 얼굴을 봤다. 명색은 아버지의 운전기사였지만, 뒤로는 얼마든지 더러운 짓을 하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가 이 병원에 있지? 그것도 승합차를 몰고? 대번에 부신이 노리던 수아가 떠올랐다. 우연이라기엔 예감이 아주 좋지 않았다.
무작정 승합차의 뒤를 쫓은 것은 본능이었다.
그는 복잡한 도로에서 차를 놓치지 않으려 주의하며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아라, 제발.
그러나 한 시간 내내 신호만 갈 뿐,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외곽 톨게이트를 지나쳐서 서울을 완전히 벗어나자 불안한 예감은 확신처럼 느껴졌다.
초조해진 윤성은 다급히 연락처를 뒤졌다.
“아, 박화희는 번호를 모르고……. 그래, 변호사, 그 밉상!”
민철은 신호가 가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그가 뭐라고 말했으나 무시한 윤성은 다짜고짜 물었다.
“수아 누나가 전화를 안 받아! 지금 어디 있는 줄 알아?”
-뭐? 천윤성 너…….
“민수아는 지금 안전하냐고!”
급한 나머지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잠시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곧이어 묵직하게 가라앉은 박화희의 음성이 들렸다.
-네가 그놈들을 뒤쫓고 있는 건가?
단정적인 말투였음에도 목소리에 담긴 분노가 느껴져,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아 누나가 정말 어떻게 됐어? 저놈들이 수상하길래 병원에서부터 무작정 쫓고 있는데 확실치 않아서…….”
대답 대신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뜻 같아서 욱한 윤성은 언성을 높였다.
“다른 건 몰라도 민수아만큼은 난 진심이야! 누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난…….”
-닥쳐. 넌 최대한 지켜보기만 해. 네놈 때문에 보이지 않으니까.
“뭐? 그게 다야? 지, 진짜 누나가 납치된 거면 뭘 어떻게 해야 하잖아!”
-삼마산으로 갈 거다. 나나 경찰이 갈 때까지 핸드폰으로 상황 보고해.
다시 전화를 바꾼 민철에게 차종과 차 번호를 알려 주자 전화가 끊겼다. 전화 너머 사이렌 소리가 들린 걸 보면 급히 오는 중인 듯했다.
핸들을 잡은 손이 떨려 와서 윤성은 진정하려 애쓰며 승합차를 노려보았다.
정말 민수아가 납치된 건가?
빌어먹을, 아버지! 윤민형, 권 실장 같은 놈들이야 그렇다 치고 아무 상관도 없는 민수아는 도대체 왜!
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자괴감과 죄책감의 더러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이 막히고 몸서리쳐졌다. 이제 천부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싫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 줄 알면서도 이제껏 외면하는 것에 급급했던 자신이 한심하고 비겁해서 견딜 수 없었다.
환영처럼 보았던 서재의 핏자국을 보았을 때부터, 아니, 그 전에 아버지로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부터 자신은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민수아가 위험에 처한 것이 제 잘못인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윤성은 승합차를 노려보며 초조하게 주변을 살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논과 밭이 있는 시골의 한적한 도로에 접어들자 더 이상의 미행은 불가능해졌다. 지나는 차가 점점 줄어들어 금방이라도 저쪽에서 쫓고 있다는 걸 눈치챌 것 같았다.
시간이 촉박해졌다. 이대로 승합차가 눈치채고 제대로 도망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이미 민수아를 어떻게 한 건 아니겠…….
안 돼, 빌어먹을!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당장이라도 놈들이 그녀를 해칠까 봐 조마조마해서 숨까지 막혔다.
승합차가 강가의 외길 도로로 접어들자, 윤성은 옆길로 우회했다.
도로가 아닌 논길로 된 지름길로 앞질러서 승합차의 앞을 막을 셈이었다. 어떻게든 길을 막고 시간을 벌면 경찰이나 화희가 오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뿐이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엑셀을 끝까지 밟고 속도를 최대한 끌어 올려 논길을 달리자 차가 용수철처럼 퉁퉁 튀었다.
저 멀리 도로의 나무들 사이로 승합차가 얼핏 보일 때마다 심장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제발 무사해라, 제발.
몇 번이나 바퀴가 논두렁에 빠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외길과 만나는 지점까지 왔다.
윤성은 달려오는 승합차를 노려보며 바로 핸들을 꺾었다. 원심력 때문에 크게 몸이 휘청거려서 하마터면 핸들을 놓칠 뻔했지만 있는 힘껏 틀어잡았다.
승합차의 차창 너머로 운전자의 인영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그는 이를 악물었다.
민수아,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너 하나는 구한다, 진짜.
끼이익- 승합차가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두 차가 그대로 충돌했다.
콰쾅, 으지직.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큰 소리와 함께 온몸이 세차게 내던져진 것처럼 들썩였다.
윤성의 차 옆구리를 들이박은 승합차가 속도를 이기지 못해 도로를 긁으면서 떠밀다가 기우뚱 멈춰 섰다.
“……으윽…….”
고막이 나간 것처럼 삐이, 이명이 들리고 눈앞이 붉어졌다. 경련하듯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더듬으니 진득하게 피가 묻어났다.
윤성은 제 뺨을 때려 멍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겨우 고개를 들어 전면을 넘겨보니 그의 차 조수석 쪽으로 박힌 승합차의 앞부분이 심하게 우그러져 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겨우 에어백을 밀어낸 그는 차 문을 열었다. 다리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거의 쏟아지듯이 힘겹게 차에서 내렸다.
휘청거리면서 트렁크에서 렌치를 꺼내 든 윤성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승합차는 그때까지 조용했다. 에어백에 파묻혀 정신을 잃고 늘어진 운전자와 조수석 인영을 확인한 그는 옆문을 열어 보았다.
역시 잠금장치가 작동되어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가 렌치로 막 운전석 창문을 깨려는 순간, 드르륵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발, 죽여 버릴…… 천윤성?”
목을 짚으며 내린 남자가 그를 알아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먼발치에서 지나치며 봤던 아버지 측근 중 하나였다.
움찔한 윤성이 렌치를 고쳐 쥐며 열린 문 안쪽을 흘깃거리자 남자가 험악하게 욕설을 뱉으며 손에 든 솨 파이프를 들어 올렸다.
“이 새끼, 회장님 발싸개라고 내가 봐줄 줄 아냐?”
“닥쳐, 누가 봐달래!”
악을 쓴 윤성이 렌치를 휘두르며 먼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급히 물러선 남자가 그의 머리를 노리고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몇 번은 어떻게든 피했지만 싸움에 이력이 난 남자에게 이길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이프로 허리를 얻어맞고 다리를 호되게 차인 윤성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바닥에 침을 뱉은 남자가 그의 머리 위로 파이프를 치켜들었다.
“시발, 시간도 없는데 별게 다 지랄…… 윽.”
퍽, 묵직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놈의 뒤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그를 내리치려던 남자가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뒤에서 수아가 양손에 받쳐 든 쇠 파이프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유…… 윤성아…….”
“……누나?”
눈이 마주치자 흐느끼듯 그를 부르던 그녀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놀란 눈으로 허겁지겁 수아를 올려다보던 윤성은 뒤늦게 번쩍 정신이 들었다. 승합차 운전석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는 얼른 쓰러진 남자의 턱을 세차게 걷어찼다. 컥, 놈이 비명을 내지르며 벌렁 나자빠졌으나 돌아볼 틈도 없었다.
“누나, 괜찮아? 이, 일단 도망치자.”
윤성은 급히 수아를 부축해서 제 차로 이끌었다. 조수석 문이 우그러져 대신 열어 주고 자신도 재빨리 운전석에 앉았다.
터진 에어백을 대충 치우고 몇 번 기어 조작에 헛손질한 끝에서야 겨우 차를 후진시켰다. 꼼짝도 안 하던 차는 몇 차례 헛바퀴를 돈 후에야 승합차에 끼이다시피 박혔던 곳이 빠지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 도로에 접어들자, 속도를 올린 윤성은 수아를 곁눈질했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한 모습이 약에 취한 것 같았다.
“……괜찮아?”
“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어눌하게 중얼거리는 그녀를 살피던 윤성은 튀어나오려는 욕을 삼켰다.
어느새 승합차가 바짝 쫓아왔다. 백미러로 살피니 앞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었음에도 달리는 데 이상이 없어 보였다.
더 세게 박았어야 했나. 그는 초조하게 백미러를 힐끗거리면서 엑셀을 끝까지 밟았다.
쾅쾅, 외길이라 피할 사이도 없이 금방 바짝 따라붙은 승합차가 꽁무니를 들이박았다.
“조심해!”
차체가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덜컹 들렸다. 덩치가 훨씬 큰 승합차는 꽁무니에 바짝 붙은 채 연신 들이박으며 도롯가로 밀어 대기 시작했다.
쾅, 한순간 세게 받친 차가 밀리면서 옆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이대로 가다간 전복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윤성은 급히 주위를 살펴 도망칠 길을 찾았다. 50미터쯤 앞에 승합차는 갈 수 없을 만큼 좁은 샛길이 보였다. 강 아래로 향하는 길인 듯 매우 가팔랐다.
쾅, 한 번 더 들이박히자 낮은 가드레일에 차체가 긁혀 끼기긱 밀리는 소리를 냈다.
“꽉 잡아!”
윤성은 아직까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수아에게 소리치며 핸들을 틀었다.
속이기 위해 그대로 가는 척하다 급히 방향을 트는 순간 승합차가 옆구리를 세게 박았다.
가던 속도에 받치기까지 하자 의도보다 훨씬 크게 회전한 차가 가드레일을 부수고 도로 끝에 꽁무니를 아슬아슬 걸쳤다.
바로 아래가 비탈이었다.
기겁한 윤성이 황급히 후진하려 했으나 차체 무게를 이기지 못한 차가 아래로 쏠렸다.
“……누나!”
급히 손을 뻗어 수아의 어깨를 의자에 누른 것과 동시에 차가 거대한 원통처럼 비탈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온갖 잡소리가 고막을 후려쳤다. 어떻게든 수아를 살피려 했으나 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흔들리며 부딪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순간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지고 부유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비탈 끝까지 튕기듯 구른 차는 그대로 강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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