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 *
<한 시간 전>
차가 세림 본사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 민철은 가방에서 준비한 서류를 꺼냈다.
“이사님, 말씀하셨던 세림 관련 법무팀 자료입니다.”
“…….”
“저, 안 내리십니까?”
그러나 화희는 차창 밖에 시선을 둔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차 문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들기기만 했다.
상관에게 깨끗이 무시당한 민철은 갈 곳 잃은 서류를 들고 멋쩍게 볼을 긁었다. 룸미러로 눈이 마주친 기사가 문을 열지 말지 눈짓으로 물었으나 민철 역시 답을 알 리가 없었다.
진짜,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아침에 민수아하고는 30분 내내 쉬지 않고 웃었으면서.
수아를 데려다준 후부터 지금까지 화희는 그와 내내 있으면서 열 마디도 채 하지 않았다. 어쩌다 눈길이 마주쳐도 물건 보듯 슥 지나치기 일쑤였다. 예전부터 민철뿐 아니라 모든 이를 곧잘 무시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서태산 말대로 정말 상처 때문에 혼이 섞이는 게 맞는 건가? 근데 혼이 섞이는 게 대체 무슨 뜻이야? 박화희의 이번 생은 소시오패스지만 원래 혼의 성격은 사이코패스라는 건가.
갑자기 화희가 언질도 없이 내리자, 민철과 기사는 서둘러 따라 내렸다. 서두르던 민철은 그만 손에 서류를 든 걸 잊고 바닥에 흘렸다.
서류를 줍고 일어났는데 먼저 간 줄 알았던 화희가 멈춰 서서 위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덩달아 두리번거렸으나 흐린 하늘, 이쪽으로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고층 건물, 그리고 주변까지 휘휘 둘러보아도 특이한 게 없었다.
전화가 왔는지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던 화희의 표정이 의외로 더 삭막해졌다.
“수아 씨? 어느 병원입니까?”
병원? 막 화희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단어에 민철이 귀를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
콰쾅,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터졌다.
순간 민철은 폭탄이라도 투하된 줄 알았다. 거센 바람이 일고 쇠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차 창문이 깨져 유리 파편이 사방에 튀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던 민철은 소리가 잦아들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광경이 이해되기도 전에 사람들의 비명이 먼저 와닿았다.
“아악! 사, 사람이야! 사람이 떨어졌어!”
그들이 방금 내린 차 위로 널브러진 사람 인영이 보였다. 얼마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 건지, 차는 밟다 만 콜라 캔처럼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우욱……!”
민철은 뒤늦게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틀어막고 휘청거렸다. 구역질까지 치밀어서 황급히 시선을 돌렸는데, 이미 저쪽으로 달려가면서 토하는 기사가 보였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난리였다. 유일하게 차에 가장 가까이 있는 화희만 시체가 아닌 차를 보며 핸드폰 스피커를 가리고 심각하게 속닥이고 있었다.
민철이 그에게 다가가자 통화를 끝낸 그가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다.
“다른 차를 가져오려면 얼마나 걸리지?”
“어, 어디 가시게요? 그럼 저 시, 시체는 어떡하고요?”
“김 검사 불러서 처리하라고 해.”
“김세원 검사를요? 그 사람은 요즘 부신 건설 일로 한창…….”
“사냥개잖아, 천부신 오른팔.”
화희가 툭 던진 말에 민철은 반사적으로 시체를 돌아볼 뻔했다가 얼른 제 눈을 가렸다.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사냥개라면 혹시 부신의 권영훈 실장을 말하는 건가? 천부신의 비리를 몽땅 뒤집어쓰고 행방이 묘연해진?
왜 그놈을 우리 차에 떨어뜨리……?
혼란이 더욱 가중되어 더 자세한 설명을 기대하며 화희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민철을 쏘아보았다.
“다른 차.”
<우신 병원, 현재>
“수아 씨가 많이 놀랐나 봅니다.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서 차에서 쉬라고 권했습니다. 걱정 마시고 쉬십시오, 어머님.”
화희가 짐짓 허리까지 숙이면서 부드럽고 공손한 어조로 인사했다. 민수아의 부모는 전혀 의심 없이 다정하게 그를 대했다.
“아, 그래요? 입원 수속 밟는다고 간 애가 안 와서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수아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까 잘 달래 줘요.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요.”
“말 편히 놓으십시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오붓하게 보이는 ‘예비’ 가족 뒤에 서 있던 민철은 ‘내일’이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발음하는 화희를 지켜보다 뒤로 물러났다. 부모 몰래 등 뒤로 보이지 않게 움켜쥔 그의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가 관절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공손한 표정을 집어던진 화희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 검사, 김세원에게 다짜고짜 사납게 물었다.
“천윤성 위치는?”
그의 눈길을 받고 잔뜩 주눅이 든 김세원이 숨을 고르며 주춤 대답했다. 그는 시체 처리를 하다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달려온 참이었다.
“10분 전, 외곽 도로 톨게이트가 마지막입니다. 혼자였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나지막이 욕설을 짓씹은 화희가 성큼 걸음을 옮겼다.
민철만큼은 아니지만, 화희와 엮인 나머지 비슷한 처지가 되어 버린 김세원이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남들이 보기엔 적이나 다름없는 검사와 변호사는 왠지 모를 동질감 어린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나란히 화희의 뒤를 쫓았다.
병원 보안실은 원장과 주주 이사, 검사, 변호사까지 단체로 몰려오자 비상사태가 됐다.
짧은 사이, 벌써 수십 번이나 돌려 본 듯, 보안팀장은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모니터를 돌렸다.
간호사를 쫓아 로비를 지나는 수아의 모습이 보였다. 비상구 앞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그녀가 주춤 물러났지만, 비상구 안에서 억센 팔이 나와서 그녀를 단숨에 낚아챘다.
흉측한 괴물처럼 그녀를 단숨에 집어삼킨 문이 닫힌 게 영상의 마지막이었다. 화희가 짧게 내뱉은 한숨이 쥐 죽은 듯 조용한 보안실 안에 퍼졌다. 화희가 비상구 밖으로 뻗어 나온 손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잔뜩 긴장한 기색의 보안팀장이 화희를 향해 짧게 설명했다.
“이 이후로 범인들의 동선이 파악되지 않습니다. 변장을 다르게 바꿔서 주차장을 빠져나간 듯한데, 워낙 혼잡한 날이어서 식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보안팀장의 보고에 삐딱하게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던 화희가 짧게 손짓했다.
“다시.”
처음부터 영상이 재생되자 그는 손을 뻗어 흐릿한 화면에 비친 수아의 모습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손톱만큼 크기의 얼굴을 몇 번이나 더듬는 손길은 얼핏 보면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화희가 모니터를 쳐다보는 사이, 사람들이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등골이 오싹하며 서늘한 기운이 몸 전체를 타고 흘러 솜털이 곤두섰다. 민철 역시 피부가 따갑고 귀가 아파서 낮게 신음을 흘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갑자기 수십 대의 모니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지직,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기압이 낮아진 공기 때문에 귀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 이사님!”
민철이 사정하듯 부르자, 화희가 돌연 모니터에 뻗었던 손을 거둬들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파악-
동시에 금이 가던 수십 개의 모니터 화면이 일제히 산산이 부서졌다. 불꽃을 튀기며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는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으아악!”
기겁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다. 미간을 찌푸린 화희가 그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 방을 나가 버렸다.
“여, 여긴 왜요?”
꼭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희게 질린 김세원이 민철에게 물었으나 그 역시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은 화희를 쫓아 막 특수 치료 시설 병동으로 왔다.
이곳은 오랜 혼수상태나 식물인간 등 의학적 치료가 불가하지만 전신 간호를 요하는 환자들 위주의 병동이었다.
화희는 조용한 복도를 가로질러 가장 안쪽에 있는 병실 문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갔다.
1인실 베드에 파리한 안색에 뼈밖에 남지 않은 노인이 산소 호흡기를 낀 채 누워 있었다. 오랜 시간 의식이 없었던 듯, 침대 시트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침대 앞에 선 화희가 의식이 없는 노인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갔지?”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 이사님?”
당황한 민철이 저도 모르게 화희를 불렀다. 그러나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쓴 그는 노인을 노려보다 대번에 손을 뻗어 목을 졸랐다.
“이사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잔뜩 겁을 집어먹었던 김세원마저 놀라서 만류하려고 뛰어갔다. 화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의 부러질 듯 뼈만 남은 목을 더욱 세게 졸랐다.
“으악, 뜨거워!”
김세원이 화희의 손목을 잡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화희의 손에서 거미줄처럼 검은 선이 뻗어 나가 노인의 목을 끈처럼 휘어 감는 게 보였다.
“……커컥!”
갑자기 좀비처럼 눈을 번쩍 뜬 노인이 버럭 소리 질렀다.
“가, 감히 무슨 짓이냐!”
으악! 혼비백산한 김 검사와 민철이 비명을 지르며 쏜살같이 문 쪽으로 달아났다.
그새 노인이 벌떡 일어나 화희의 손을 뿌리치고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화희가 힘을 주자마자 꼼짝없이 그의 손에 목을 짓눌린 채 도로 침대 위로 떨어졌다.
씩씩대는 노인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민 화희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물었다. 표정은 없지만, 검은 동자는 벌써 그의 목을 부러뜨리고도 남을 것처럼 번뜩였다.
“대감은 봤을 것 아니야, 어디냐고.”
“네 신부는 사람이라 내가 관여할 수 없…… 커컥!”
“내겐 방조도 죗값은 같아. 너부터 처리할까?”
노인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젓다가 괴로운 듯 발버둥 쳤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검은 선은 그의 목을 물들이고 얼굴까지 뒤덮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기 힘든 것처럼 헐떡거리던 노인이 결국 쉰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러니 내 머릿속을 헤집어도 아프기만 하…… 으윽!”
“마지막으로 묻는다. 어디야?”
“……사, 삼마산…….”
“더 자세히 말해.”
“그, 그것밖에 몰라! 그놈들이 아직 안 정한 모양…… 커컥!”
급기야 노인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괴로워하다 축 늘어졌다. 그를 팽개치듯 놓아 버린 화희는 바로 돌아보지도 않고 방을 나갔다.
어깨를 들썩이며 마른기침을 하던 노인이 문 옆에 선 둘을 사납게 흘겨보았다. 그의 눈짓에 반쯤 열렸던 문이 쾅, 활짝 열렸다.
“……!”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김 검사와 민철은 약속이나 한 듯 화희의 뒤를 쫓았다. 눈빛이 형형한 기괴한 노인 옆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막 문을 나서기 전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 민철은 저도 모르게 노인을 돌아보았다.
“귀신이 육갑할 노릇일세. 번듯한 면상인데 왜 귀신 형상을 하고 있을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직 말소리가 귀에 맴도는데, 언제 일어났었냐는 듯 노인은 산소 호흡기를 끼고 의식이 없는 것처럼 누워 있었다. 어느새 시트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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