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72화 (72/100)
  • 72화

    8. 과거의 그늘

    천부신 회장의 사택 내 회의실, 스크린에서 실시간 뉴스가 재생되었다.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이미 내용을 아는 부신은 인상을 쓴 채 화면을 노려보았다.

    [부신 건설의 내부 고발에서 시작된 경영 비리를 수사 중인 검찰이 금일 오전 천부신 명예 회장을 긴급 소환했습니다.

    회계 조작, 독점 입찰, 원가 부풀리기 등 비리 전반에 천부신 회장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기 때문인데요.

    또한 검찰은 해당 지역 관공서와의 유착 관계도 파악 중인 것으로 관계자들을 면밀히…….

    천부신 회장의 최측근이자 이번 사태의 핵심 인물로 밝혀진 권영훈 실장은 횡령·배임·사기 및 주가 조작 혐의로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으나 행방불명…….

    천부신 회장은 현재 소환장을 일축하고 있습니다. 연이어 불응할 시에 검찰은 구속 영장을 발부…….]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하고, 쓸모없는 것들! 신 의원 연결해!”

    결국 부신은 노기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후려쳤다. 한편에 서서 숨죽인 채 그의 명령을 기다리던 노 실장이 뉴스를 끈 후 재빨리 핸드폰을 조작하고 건넸다.

    낚아채듯 핸드폰을 받아 든 부신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바로 못마땅한 말을 내뱉었다.

    “일 처리가 실망스럽군요. 나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을 문제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이리 늦장 부릴 겁니까?”

    상대방이 초조한 음성으로 한숨을 쉬며 바로 대답했다.

    -언론이 먼저 터뜨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잘 알지 않습니까. 하지만 검찰도 여론 때문에 시늉만 할 뿐이니 곧 무마될 겁니다.

    “무마된다 해도 내 회사가 입은 타격은 어찌할 겁니까? 벌써부터 낯부끄러워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될 거요. 그런데 천 회장, 대체 찌른 놈이 누굽니까? 검찰 외에 누군가 이쪽까지 캐는 것 같습니다.

    “이 일이 해결되면 알려 주리다. 이거 하나 막지 못하면, 알려 줘 봤자 그쪽에도 소용없을 것 아니오?”

    -천 회장, 지금…….

    상대가 말을 계속했으나 부신은 더 듣지 않고 사납게 핸드폰을 내던지며 노 실장에게 물었다.

    “권 실장 상태는?”

    “마비 상태에서 차도가 전혀 없습니다. 원인 불명이라 치료도 불가하다고 합니다.”

    “쯧, 어쩔 수 없게 되었구나.”

    전혀 아깝지 않은 표정으로 부신이 혀를 차자, 노 실장이 바닥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이며 재빨리 맞받아쳤다.

    “회장님의 충실한 종인 제가 있습니다. 권 실장도 마지막까지 회장님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어서 기쁠 겁니다.”

    “그래, 너에게 기대가 크다. 권 실장이 빠릿빠릿하기는 했어도 너처럼 살갑진 않았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시키신 일은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시면 됩니다.”

    “슬슬 시작하거라. 꼬리를 자르는 데 당연히 고통은 따르겠지만 어쩔 수 없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몸집을 줄이는 수밖에.”

    부신이 여전히 허리를 숙인 노 실장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손짓했다.

    곧바로 노 실장이 나가자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뉴스가 꺼진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혼자가 되자 참을 수 없이 화가 들끓기 시작했다.

    아니, 혼자가 아니었다.

    <다 그놈 때문이다! 내가 뭐라 했더냐?>

    붉은 용포를 입은 또 다른 부신이 과거의 영광, 신의 사명 어쩌고 귀에 못이 박힌 이야기를 외쳐 대며 박화희에게 당한 자신을 큰 소리로 비웃었다.

    내가 그놈을 우습게 보았던 건가. 생각보다 얌전하기에 제 계집만 싸고도는 줄 알았는데, 이리 기상천외한 짓을 벌이다니!

    씩씩대며 책상 위 물건을 내던지려 했으나 급작스럽게 격통이 찾아왔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서랍을 뒤져 약을 찾아냈다.

    약 기운이 돌며 통증은 급속히 가라앉았지만 굳은 손은 잘게 경련을 멈추지 않았다. 몸 상태가 도로 나빠지는 것 또한 박화희의 짓이라며 스크린의 자신이 껄껄대며 웃었다.

    “닥쳐, 어디 내가 질 줄 아느냐. 그놈의 약점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나야!”

    이를 악문 부신은 있는 힘껏 책상 위 문진을 집어 던졌다.

    와장창, 스크린이 깨져서 산산조각 났지만 오히려 속은 더 시끄러워졌다.

    * * *

    오늘따라 출근길 도로가 많이 막혔다.

    수아는 신호에 멈춘 사이, 차창 밖으로 보이는 옥외 대형 스크린에 뜬 뉴스 타이틀에 시선을 주었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제목의 3분의 2는 천부신과 부신 건설에 대한 것이었다.

    [부신 건설에 대한 내부 고발, 주가 하락을 노린 조작된 허위 증거로 밝혀져]

    [부신 비리 조사 종결로 검찰에 대한 국민 여론 악화, 정경 유착설까지?]

    [일부 시민 단체, 부신 건설의 부실 공사에 대한 의혹 제기]

    [내부 고발 조작을 주도한 전 비서실장 권영훈 씨 현재까지 행방 묘연, 전국 수배로 확대]

    [검찰, 천부신 회장에 대한 수사 이대로 종결시키나?]

    아침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확인했던 내용이지만 새삼 씁쓸했다. 수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슬쩍 화희를 넘겨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뉴스를 쳐다보던 그가 픽 웃었다.

    “예전 같으면 단칼에 끝냈을 일을, 요즘 세상은 참으로 번거롭죠. 수아 씨 덕에 나까지 법 성애자가 된 것 같군요.”

    “화희 씨가 이렇게 법을 잘 지키면 강 변호사님은 이제 뭐 먹고 살아요?”

    “뭐, 운전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니까.”

    화희가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그녀 역시 가볍게 받아쳤지만, 수아는 그의 표정에 사나운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보았다.

    이게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인 걸까. 상황이 그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화희는 언제라도 인내심을 놓아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천부신에 관해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아직도 그와 마주쳤을 때를 생각하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현재를 봐도 그는 사회악의 대표 같은 인물이었다.

    천부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싹해진 그녀는 말을 돌리려다 핸드폰에 온 문자를 확인하고 놀라 화희를 쳐다보았다.

    [우리 사위는 뭘 또 보냈다니. 잘생긴 사람이 마음 씀씀이까지 잘생겼어.]

    “선물 그만 보내세요. 이러다 우리 집 터지겠어요.”

    수아가 웃으며 투덜거리자 어깨를 으쓱한 화희가 못마땅한 듯 대꾸했다.

    “사위 사랑은 장모니까요. 방해하지 맙시다.”

    틈날 때마다 송 여사의 취향을 묻던 화희는 첫 상견례를 가는 길에 트렁크가 모자라도록 선물을 실은 것도 모자라, 다른 선물도 미리 배달시켜 놓았다.

    안 그래도 엄마는 딸의 배필로 과분한 조건을 가진 화희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냈을 판이었는데.

    <역시 내 딸. 그렇게 고생하더니 마지막에 이렇게 로또 맞으려고 그랬구나.>

    그걸 알면서도 선물을 꾸준히 보내다니, 하여튼 이 집안의 물량 공세는 알아줘야 해.

    박 회장이 창립 기념일 파티에 오라면서 드레스며 선물까지 미리 보낸 걸 떠올리며 수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결혼식까지 두 달 남짓 남았다. 한없이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기도 했다.

    * * *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윤성이 대답하자마자 전화가 바로 끊겼다. 그는 액정에 남은 [아버지]라는 이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나더러 권 실장과 함께 모든 걸 뒤집어쓰라고?

    두렵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했다.

    이제 정말 아버지와는 마지막이구나. 난 드디어 그에게 버려지는구나. 쓸모 있는 쓰레기라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아버지가 기르는 애완견 정도였다. 언제부터인가 윤성 역시 그를 두려워하며 피하는 데 급급했다.

    한때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겠다고 애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잔혹한 악인이라는 걸 모르는 척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가 시키는 일들을 하기는커녕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역겨웠다. 점점 진해지는 그의 썩은 내처럼.

    <그나마 얼굴이라도 반반해서 키워 볼까 했지만 성격이 그리 유약해서야 내놓기도 멋쩍겠구나.>

    모든 일에 실패한 그에게 아버지가 내린 평가였다.

    아니, 아버지라 부르기도 뭐했다. 자신을 도사견이나 더러운 똥을 먹는 개로 키우고 싶어 하는 사람을.

    그런데 이젠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민수아가 미치도록 보고 싶은 건 왜일까.

    갑자기 찾아온 윤성을 보고 수아는 놀라지 않았다. 빤히 그를 쳐다보더니 그의 손을 잡고 사무실 안으로 들인 후 물었다.

    “차? 아니면 커피? 아, 그냥 주스 마셔. 얼굴색이 안 좋은데.”

    주스를 가져와 내려놓은 수아가 그를 찬찬히 살폈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마주하니 윤성은 그녀가 모든 일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박화희, 그 작자에 대해 알고서도 어떻게 이리 태평할 수 있지?

    막상 그녀를 보자 할 말이 넘쳐서 말문이 막혔다. 윤성이 말을 고르는 사이, 수아가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아니, 전혀.”

    “도와줄 일 있으면 내가 도울게.”

    늘 박화희 편을 들어 줬으면서. 윤성은 그녀의 걱정을 비웃듯 대꾸했다.

    “도울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이번에 부신 건설 내부 고발, 그거 박화희 짓인데.”

    “그건 그렇지만…….”

    “탓하려고 온 건 아니야. 어차피 아버지는 나와 별개였으니까.”

    수아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새삼 그녀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박화회와 이 여자와 아버지는 대체 무슨 관계일까.

    나는 그 가운데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고.

    이 판국에 수아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건, 모든 일의 시작이 이 여자 때문일 거라는 의심을 풀고 싶었던 걸까.

    또 민수아를 앞에 두니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에서 환청이 들렸다.

    인상을 쓴 윤성은 그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비는, 나의 신부는 내가 원하는 한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뭐?”

    “누나만 보면 이런 말이 들려. 내가 쓴다는 소설도 누나 얘기였던 것 같고. 가학적인 집착을 보이는 남자와 가련한 목련 같은 여자 이야기였어.”

    “…….”

    “알아, 나도. 내가 미친 것 같다는 건.”

    적잖게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수아가 말을 잇지 못했다. 윤성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왜 그런지 알고 싶었는데 이젠 다 소용없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인사나 하러 왔어. 잘 있어, 누나.”

    윤성은 잠시 그녀의 말을 기다렸으나 여전히 그녀는 눈만 깜빡이며 그를 시선으로만 좇았다.

    너무하네, 마지막이라는데 뭐라고 한 마디만 해 주지. 미련이 묻어나는 제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진 윤성은 그만 자리를 박차듯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하는 말인데, 누나 샌드위치 더럽게 맛없어. 잘난 박화희한테나 실컷 해 줘.”

    그런데 막 윤성이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갑자기 뒤에서 의자가 거칠게 밀리는 소리가 났다.

    “자, 잠깐! 기다려, 윤성아!”

    반사적으로 돌아보던 그는 달려온 수아가 팔을 붙잡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 쳤다.

    “뭐야, 갑자기?”

    “다, 다시 말해 봐! 아까 뭐라고? 게다가 마지막이라니 무슨 뜻이야?”

    “아씨, 놓고 말해. 어울리지 않게 왜 이래?”

    수아가 자신을 붙잡자 윤성은 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팔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수아는 절박해 보일 정도로 세게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윤성이 인상을 쓰며 그녀를 돌아보는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그를 놓지 않은 채 당황한 기색으로 말을 이으려던 수아가 급히 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 엄마. 내가 좀 있다 전화할…… 네? 병원요?”

    수아가 전화받는 틈을 타 뿌리치고 가려던 윤성은 병원이라는 말에 멈칫했다.

    “마, 많이 다치셨어요? 수, 술이요? 거, 거기가 어디라고요? 네, 네. 제, 제가 지금 가, 갈게요.”

    통화를 끝낸 수아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끈 풀린 인형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무슨 일인데?”

    윤성이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묻자 그녀는 희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 엄마가 교통사고가 났대. 사고가 크, 크게 났나 봐. 지금 수술 들어가야 한다는데……. 어, 어…… 빠, 빨리, 내가 빨리……!”

    말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수아는 급히 방에서 뛰어나갔다. 윤성은 생각할 시간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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