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71화 (71/100)

71화

그녀에게서 미련 없이 멀어지는 넓은 등이 눈에 밟혔다. 수아는 침실로 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를 불렀다.

“저기요, 이사님. 아니, 화희 씨?”

화희는 천천히 걸음을 멈췄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초조해진 그녀는 계단을 뛰듯이 내려가 그의 뒤를 쫓았다.

어느새 빠르게 되돌아온 화희가 그녀의 허리를 단숨에 낚아채 끌어당겼다.

영문도 모르고 그의 품에 안긴 수아는 뜻밖의 냉기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어, 몸이 왜 이렇게 차요?”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길게 한숨을 내쉰 화희는 대답 대신 질문을 되돌렸다.

“나 하나로는 아쉽습니까?”

“……네?”

“저기요, 이사님, 화희 씨. 수아 씨가 세 명이나 불렀잖습니까.”

평소 같은 농담이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가볍게 되받아칠 수가 없었다.

수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저기, 화희 씨가 조금 달라 보여서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수아는 문득 그가 오기 얼마 전까지도 차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이 이렇게 찬 걸로 봐서 잠시 밖에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고.

“혹시 그래서 내가 잠들 때까지 기다린 거예요? 무슨 일 있었어요?”

시선을 돌리고 대답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확실한 답처럼 들렸다. 잠시 허공을 노려보던 화희가 그녀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내가 어떻게 달라 보입니까?”

“이상한 말이지만, ……전생이랑 분위기가 비슷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수아는 급히 덧붙였다.

“싫다는 게 아니고 알고 싶어서 그래요. 오늘 낮에 서 할아버지가 갑자기 회장님을 만난 것도 그렇고, 화희 씨가 늦은 저녁에 갑자기 나간 것도 이상해서요. 혹시 나와 관련 있는 일인가요?”

답을 기다리며 화희를 이리저리 살피던 그녀는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길게 긁힌 것 같은 붉은 상처가 언뜻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 다쳤어요?”

아니, 상처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붉은 자국은 상형 문자처럼 작은 글자로 이루어진 띠처럼 보였다.

목덜미 아래, 셔츠 안쪽까지 이어진 붉은띠는 전에 그가 피로 그렸던 ‘결계’와 매우 비슷했다.

“그건 왜 생긴 거예요?”

놀란 그녀가 발돋움해서 살피려고 하자, 한 발자국 물러나 피한 화희가 마지못한 어조로 대답했다.

“오랜 시간 묵은 혼을 감당하기에 이 육체는 새것이라서 그럴 겁니다.”

“그럼 그 상처처럼 아파요?”

“전혀. 신경 쓰지 말아요, 힘이 진정되면 곧 없어질 테니까.”

“힘이요? 무슨-!”

붉은 사슬 같은 흔적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수아가 되묻는 순간, 화희가 사납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대로 내가 무섭거나 싫어지면 어떡할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민수아를 걸고서는 그 어떤 것도 절대 용납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일들을 당신이 참을 수 없게 되면…….”

잠시 틈을 두고 덧붙인 마지막 말에 담긴 감정의 무게가 수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날 버릴 겁니까?”

수아는 그에게 단단히 안긴 채 숨을 죽였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것도 전생과 비슷한 일이.

방금 그녀가 그를 보자마자 전생의 남자를 겹쳐 보았듯, 그 역시 전생의 그녀를 떠올리며 수아를 피했던 듯했다.

천 년 전, 그들을 갈라놓았던 상황들은 서로에게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그것이 누구의 잘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전 황제와 함께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 그녀를 살리기 위해 강제로 그녀를 자신의 신부로 만들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자진하려 곡기를 끊자 가족을 인질로 삼아 살기를 강요했고, 그녀를 모욕하던 귀족을 단칼에 벴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녀를 죽이기 위해 몰려온 군사들을 수없이 죽였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였지만 전생의 그녀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면서 그를 두고 떠났다.

그를 버린다는 건 그런 뜻인 걸까?

“만약에 전생과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지금의 민수아는 어떡하겠냐고 묻는 건가요?”

수아는 무슨 일 있냐고 물으려던 걸 접고 질문을 되돌렸다.

“화희 씨는요? 내가 옛날처럼 당신을 오해하고 배신하면 어떡할 거예요?”

“수아 씨는 날 오해하고 배신해도 괜찮습니다. 날 떠나지만 않는다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난, 오늘 수아 씨가 싫어할 만한 일을 했습니다. 그걸 들키기 싫어서 당신이 잠들기를 기다렸고. 하지만 사실은 더 하지 못한 게 분합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내가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나도 알 수 없으니까.”

수아는 그를 위로하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싸늘한 분위기의 그를 보았을 땐 본능적으로 꺼려졌는데, 오히려 그 이유를 알게 되자 마음이 놓였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요, 난 화희 씨가 무슨 일을 하든, 싫어하지 않을 거예요. 내게 숨기거나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괜찮아요.”

화희가 오늘 무슨 일을 했든 그녀를 위해서였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라면, 수아가 정말 싫어하는 선을 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도.

불쑥 그녀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든 그가 빤히 쳐다보다가 화난 듯 되물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으나, 화희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 수아는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요. 할 만하니까 했겠죠. 내가 본 박화희 씨는 그렇던데요? 약속도 잘 지켰잖아요, 무려 천 년 동안이나.”

“…….”

“그리고 나도 약속했고요. 박화희 씨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건 무슨 일 있어도 포기 안 할……!”

으음, 목을 울리는 신음을 흘린 화희가 불시에 그녀의 입술을 뜨겁게 삼켰다. 수아는 숨결까지 앗아 갈 것처럼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단단한 혀를 받아들이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가 고개를 한껏 숙였음에도 격한 키스에 목이 한껏 젖혀졌다. 휘청거리는 그녀를 받치듯 등을 감싼 화희가 혀를 옭매고 있는 힘껏 빨아들였다.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눈을 질끈 감고 달뜬 몸을 그에게 기댔을 때, 그는 뭔가를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떼고 그녀를 시선으로 훑었다.

수아는 숨을 몰아쉬며 그의 미간을 어루만졌다. 아까처럼 찌푸린 표정이었으나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오로지 그녀만 보인다는 듯 열렬하고도 집요하게 쳐다보면서도, 막상 그녀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정말 긴장했던 걸까? 전생처럼 그녀가 그의 행동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이 남자는 아직도 자신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내가 박화희라는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를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남자, 그것만으로 절대 포기할 수 없는데 무려 완벽하게 매력적이다.

그의 윤기 도는 검은 머리칼도, 찌푸릴 때조차 매력적인 이마도, 단호하고 남자다워 보이는 눈썹도, 높지만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콧날도, 굳게 다물렸을 땐 금욕적이지만 달콤한 말을 흘릴 땐 섹시하기 그지없는 입술까지도.

어떨 땐 보기만 해도 가슴이 너무 뛰어서 벅찰 정도였다.

어쩌면 나도 몰랐는지 몰라. 민수아가 박화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녀는 발돋움해서 그에게 키스를 되돌려 열렬히 고백했다. 서로의 숨결을 나누고 이해를 구하는 연인만의 방식으로.

* * *

이 여자가 지금 날 놀리나.

윤성은 해린의 곁에서 반 발자국 떨어져 걸으며 그녀를 못마땅하게 흘겨보았다.

가뜩이나 잠이 모자라 피곤한데 쓸데없이 끌려다니려니 부글부글 화가 끓었다.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냐고.

서태산 사건 이후 충격으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아직도 그때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야 겨우 잠들었는데, 주해린이 갑자기 그의 방문을 다급히 두들겼다.

막무가내로 급한 일이라고 우기는 통에 얼떨결에 끌려 나왔지만, 해린은 호텔 복도를 할 일 없이 돌아다니기만 했다.

“급하다며, 지금 뭐 하는 거야?”

윤성이 화를 내며 묻자, 해린이 뒤를 가리키며 팔랑팔랑 손을 내저었다.

“보면 몰라? 일하는 중이잖아.”

그들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호텔 매니저를 비롯한 직원 몇 명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그들은 해린을 따르며 그녀가 툭툭 던지는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카펫 색 구려요. 유행에 뒤처졌잖아.>

<3호기 엘리베이터 내부 조명이 너무 밝아. 이래서 뭔 짓을 할 수 있겠어요?>

<12층 세 번째 그림이 잠 안 오게 생겼어요. 8층, 빛 안 들어오는 서쪽 끝 그림이랑 바꿔요.>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지시를 떠올린 윤성이 얼굴을 구기자, 해린이 콧방귀를 뀌며 쏘아붙였다.

“너도 밥값을 해야지. 노는 자 먹지도 말라, 몰라?”

“그럼 차라리 일을 시켜. 왜 네 뒤를 따라다니라는 거야?”

“그거야 널 달고 다니면 폼 나니까 그렇지. 어쨌든 키도 크고 잘생겼잖아.”

어이가 없어진 윤성이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갤러리에 온 것처럼 여유롭게 복도를 쏘다녔다.

참다 참다 짜증이 난 그가 돌아가려고 걸음을 돌리자마자 해린이 보지도 않고 협박했다.

“일 안 하면 방 뺀다?”

입 안으로 욕을 중얼거린 윤성은 다시 그녀 곁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 엘리베이터 앞 로비를 둘러보던 해린이 갑자기 멈춰 서며 작게 비명을 흘렸다.

“어머, 웬일이야.”

“무슨 일입니까? 이 작품에 무슨 문제라도.”

급히 다가온 매니저가 그녀가 멈춰 선 그림을 빠르게 훑어보며 물었다.

“이 그림에 비친 내가 너무 예뻐. 봐요, 녹색 배경 때문에 내 피부가 더 하얗게 보이잖아.”

감탄 섞인 그녀의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듯 매니저가 입을 벌린 채 굳었다. 그러나 해린은 액자의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감탄하기 바빴다.

다시 직원들에게 돌아가려다 그와 눈이 마주친 매니저가 변명처럼 윤성에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희 본부장님 인테리어 안목은 탁월하십니다. 여기 서울 지점이 2년 연속 최우수상을 받았죠.”

아씨, 왜 내가 부끄러운 건데?

윤성은 자신이 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피했다.

주해린의 눈에 띄지 않게 로비 층으로 내려간 그는 구석 소파에 앉았다. 피곤해서 정신이 다 몽롱해지려 했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켜고 성의 없이 뉴스를 살피는데 문득 낯익은 사진과 이름이 눈에 걸렸다.

기사를 클릭한 윤성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아, 제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나 내용을 확인했다.

사인은 급성 약물 중독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윤민형 씨가 5년 전, 마약 투약 혐의로 기소된 적 있는바, 투약 과정에서 생긴 사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윤민형이 죽었다고?

이게 우연일까?

윤민형은 3일 전,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생판 모르는 서태산을 죽이려 했다.

박화희에게 당하고 기절했다 깨어난 민형은 금단 현상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분명 멀쩡했었다. 그 와중에 약에 취한 상태여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우기기까지 했다. 서태산과 강민철은 그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자수하지 않으면 신고하겠다고 민철이 협박하는 통에 윤민형은 도망치듯 요양원을 뛰쳐나갔다.

그런데 그때부터 실종되었다가 죽었다고? ……설마 자살인가?

하지만 자기 살겠다고 생판 모르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놈이 그리 쉽게 죽을 리가 없다.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서태산을 죽이라고 사주한 사람이 걸렸다. 박화희가 이상한 능력으로 만들어 낸 형상은 분명 권 실장이었는데 설마 아버지가…….

지이잉.

갑자기 뉴스가 사라지고 전화 수신 화면이 핸드폰 액정을 가득 채웠다. 얼어붙은 채 기사를 보던 윤성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버지]

마치 그의 의문에 대한 대답처럼, 액정에 뜬 세 글자가 유독 불길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