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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70화 (70/100)
  • 70화

    그림자는 그에게서 벗어나면서 끈적끈적한 액체처럼 흘러내렸다. 검은 석유 같은 그림자는 꾸물꾸물 바닥을 기어 순식간에 윤민형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끄으으윽…….”

    갑작스럽게 깨어난 윤민형이 눈을 홉뜨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살아 있는 그물처럼 윤민형의 머리며 얼굴에 달라붙은 검은 액체는 살을 녹이듯이 그의 피부 안으로 모두 스며들었다.

    입과 눈, 귀의 구멍 사이로 검은 액체들이 스물스물 비치는가 싶었는데 온몸이 보이지 않는 힘에 쥐어짜이는 것처럼 들썩거리며 비틀렸다. 사지를 떨던 윤민형은 이내 거품을 물고 다시 기절해 버렸다.

    잠시 후, 검은 액체들이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화희가 느릿하게 손을 펴자 일제히 날아오른 검은 덩어리는 한데 뭉쳐져 그의 눈앞까지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허공에 샌드 아트처럼 어떤 형상을 끊임없이 만들어 냈다.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고 어떤 장면 같기도 한 형상들이었다.

    기괴한 광경에 윤성은 비명이 샐 것 같아 입을 틀어막으며 화희를 쳐다보았다. 처참한 몰골인 윤민형보다도, 초현실적인 능력을 부리면서도 지루한 듯 무표정한 그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의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에, 문신처럼 한문 같은 글자가 선명하게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게 무슨 뜻이지……?

    허공의 형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화희가 돌연 윤성을 돌아보았다.

    “이게 보이나?”

    숨 쉬는 것도 잊고 화회의 핏빛 문신을 살피던 윤성은 얼어붙은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검은 그림자가 그린 형상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믿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 친 화희는 위협하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뭐든, 한 번만 더 내 눈을 막으면 이 꼴이 될 줄 알아.”

    순간적으로 아까처럼 또 몸이 짓눌리는 것 같아서 윤성은 급히 화희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눈을 감았다. 그에게도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만 같아서 아찔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찬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방 밖으로 멀어졌다.

    천천히 눈을 떠 보니 희게 질린 민철이 서태산을 붙들고 수군대고 있었다.

    “아, 진짜 숨 막혀서 죽는 줄 알았어요…….”

    “파, 팔불출이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났는데? 설마 저 녀석이 보기보다 날 더 좋아했던 건가?”

    민철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뒤늦게 윤민형을 쳐다보고 손가락질했다.

    “설마 주, 죽은 건 아니겠죠?”

    “아닐걸. 죽이는 걸로 이리 번거롭게 힘을 쓸 리가 없잖아?”

    “하아, 이사님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지네요. 어르신, 혹시 못 느끼셨어요? 그때 이후로 민수아 씨만 없으면 이사님은 완전 다른 사람 같으세요.”

    “뭐, 현생을 이룬 육체에 금이 갔으니 안과 밖이 섞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

    “예? 섞이다니요?”

    “상처 말이야. 혼에서부터 뚫고 나온 거잖아. 육체는 윤회를 거듭하여 새로 만들어진 껍데기고. 근데 그게 뚫렸으니 혼이 나갈 길이 생긴 거나 다름없지.”

    “……예?”

    “혼은 인간 밖의 영역이나 다름없……. 아, 답답하네! 이 돌대가리로 어려운 사시는 어떻게 통과했어? 엉? 그거 했지? 컨…… 컨싱? 펜싱? 링컨? 아, 그거 말이야, 그거!”

    둘이 뭐라고 계속 속닥거렸지만, 윤성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한 말도, 지금까지 본 것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윤성은 그저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화희가 나간 문을 넋 나간 듯 바라보았다.

    * * *

    기다리다 지루해진 영훈은 버릇처럼 손수건으로 크리스털 명패를 정성스럽게 닦았다.

    요새 부쩍 사나워진 천 회장은 일 처리가 조금만 늦어져도 호되게 야단쳤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에서 늦게까지 윤민형이 일을 처리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였다.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영훈은 인상을 쓰며 주먹을 꾹 쥐었다.

    일의 실패도 실패지만, 윤민형처럼 써먹기 좋은 패를 잃어버리면 큰일이었다.

    윤민형을 약이라면 사족을 못 쓰게 중독시키고, 그것을 빌미로 그 늙은이를 죽이라고 사주했다. 그리고 놈의 범죄 증거를 가지고 그 집안까지 얽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그런데 윤민형을 감시하라고 보낸 수하들과 연락이 끊기기 시작하자, 걸리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박화희가 신출귀몰하다며 천 회장은 자신조차 모르게 일을 진행하라고 시켰다.

    <수가 읽힐 수가 있으니 그쪽과 가장 관계가 없는 놈을 골라서 보내.>

    그건 무슨 뜻이지?

    하긴 처음부터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CCTV에 잡힌 게 그 늙은이뿐이니 일단 사주는 했지만, 대체 어떻게 철통 보안인 은행 금고를 털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영훈은 아직도 박화희가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더 대단한 권세가들도 약점을 잡히고 천 회장의 발밑을 기는 것을 보았다.

    돈과 약점, 폭력, 그리고 미끼, 그것들을 무기처럼 잘 쓸 수 있는 천부신만 있으면 막강한 권력을 얻기까지 머지않았다.

    무려 30년이나 걸렸다. 천부신의 발이라도 핥을 기세로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면서 지금만큼의 신뢰를 얻기까지.

    이제 와서 고작 작은 일 하나로 틀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힐끗 시간을 살핀 영훈은 건물 입구에서 대기 중인 수하들에게 전화로 명령했다.

    “출발할 준비 해라. 직접 가 봐야겠다.”

    갑자기 방 안에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방 안의 모든 창문과 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영훈은 급히 책상 밑을 더듬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붙여 둔 차가운 리볼버 권총을 손에 쥐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뭔가 방 안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움직이는 것은 영훈 자신과 불빛에 생긴 제 그림자뿐이었다.

    순간 검은 그림자가 흔들리는 촛불에 비친 그림자처럼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눈을 부릅뜬 영훈은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목을 까딱이자 그의 몸짓대로 그림자의 머리도 똑같이 움직였다.

    뭐야? 헛것을 본 건가. 괜히 멋쩍어진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도 벽에 비친 그림자는 의자에 앉은 형체 그대로였다.

    휘익, 찬 바람이 다시 불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림자가 기지개를 켜듯 팔을 길게 뻗었다.

    팔을 뻗고 일어난 그림자는 점점 커져서 바닥을 지나 벽을 타고 올랐다. 천장에 닿을 만큼 길어진 그림자는 어느새 거대한 사람의 형체가 되어 있었다.

    “저, 저게 뭐야?”

    경악한 영훈은 천장에 닿아 고개를 기울인 것처럼 보이는 그림자의 머리 부분을 올려다보다 뒤늦게 문을 향해 달렸다.

    그가 움직이자마자 벽에 기대선 그림자가 길게 팔을 뻗었다. 막 문에 손이 닿기 직전, 눈앞이 어두워진다 싶더니 섬뜩한 손길이 그의 목을 단숨에 움켜잡았다.

    “……커헉!”

    소스라친 영훈이 떨쳐 버리려 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제 목만 할퀴었다.

    “뭐, 뭐야? 이, 이거 놔!”

    허우적거리던 그는 겨우 총을 쥔 손을 들어 올려 그림자를 쏘았다. 그러나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발사된 총알은 벽만 뚫었다. 몇 발 더 쏴 보았으나 벽과 바닥만 뚫렸을 뿐, 그림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목을 틀어잡힌 채 몸이 떠올라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숨이 막혀 버둥거리던 영훈은 야경이 내비치는 창문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붕 떠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믿을 수 없어 홉뜬 눈에 핏줄이 불거졌다. 숨이 가빠지자 손에서 권총이 힘없이 떨어졌다.

    달칵, 문이 열리고 들어선 누군가가 떨어진 권총을 구둣발로 걷어찼다.

    “사, 살려 줘…….”

    가쁜 숨으로 중얼거리며 겨우 시선을 들어 보니 문 앞에 기대선 남자가 보였다.

    “……너, 너는!”

    장신에 흰 피부, 수려한 이목구비의 남자가 그를 비스듬히 쳐다보고 있었다.

    박화희, 그놈이었다.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선 박화희는 표정 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무감하게 중얼거렸다.

    “……네놈이 사냥개구나.”

    “너, 넌 뭐야? ……끄윽…… 나한테 무, 무슨 짓을……!”

    목이 졸린 영훈이 끅끅대며 묻자 그가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시끄러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림자에서 다른 손이 뻗어 나와 영훈의 입을 사정없이 틀어막았다. 커다란 손에 얼굴 전체가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곧 그의 얼굴을 틀어쥔 손끝에서 손톱이 뾰족한 가시처럼 길게 뻗어 나와 머리를 파고들었다.

    “……끄아아악!!”

    긴 손톱이 머릿속을 꿰뚫자 미칠 것처럼 극악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동시에 그의 기억이 억지로 재생되었다.

    영훈이 괴롭히다 죽인 사람들이 차례로 그의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의 기억이 재생될 때마다 그들에게 가한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가 망치로 누군가의 다리를 내리쳤을 땐 자신의 다리가 부서져 비틀렸고, 땅을 빼앗기 위해 집에 불을 질렀을 땐 온몸이 뜨거웠다.

    온갖 고통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으, 으으윽!”

    미쳐 버릴 것 같은 고통에 영훈은 악을 쓰면서 발버둥 쳤다. 그러나 비명은 틀어막힌 입에서 새어 나가지 못하고 제 귀로 되돌아왔다.

    그놈들이 괴로워할 땐 즐거웠는데. 자신이 그 꼴이 되자 극악한 고통에 벌벌 떨며 경련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재킷을 뒤져 작은 칼을 꺼내 있는 힘껏 휘둘렀다.

    “주, 죽어!”

    그러나 그림자에게도, 심지어 눈앞의 박화희에게도 닿지 못한 칼은 허공만을 베었다.

    설핏 미간을 찌푸린 박화희가 손을 까딱였다.

    그림자가 그를 휙 내던지자 영훈은 허공을 날아 바닥에 형편없이 처박혔다.

    그림자에게선 벗어났지만 그는 여전히 꼼짝할 수 없었다. 박화희가 턱 끝으로 널브러진 그를 내려다보다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궁금하구나. 네 주인이 사지를 못 쓰는 사냥개를 어떻게 처리할지.”

    영훈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이, 그저 눈만 움직여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사…… 살려 줘…….

    그러나 혀를 찬 박화희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물론 네 주인이 그럴 여력이 있다면 말이지만.”

    금세 방 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적막만 가득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영훈은 숨만 헐떡거리다가 겨우 눈을 돌렸다.

    책상 위 크리스털 명패가 까마득히 멀어 보였다.

    조금만 더 하면 됐는데…….

    나약한 양아들 놈보다…… 내가 후계자가……. 될 수 있었는데…….

    비명을 지르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렀지만, 그는 닦을 수조차 없었다.

    * * *

    수아는 노트북을 건성으로 들여다보다 얼핏 들리는 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아래층에서 문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화희가 돌아온 걸까?

    마중 나갈까 말까 고민하던 그녀는 한기가 느껴져 양팔을 쓰다듬었다.

    수아는 아래층에 귀를 기울이다 결국 방을 나와 난간 아래로 1층을 내려다보았다.

    현관에 센서가 켜져 밝았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길게 빼던 그녀는 현관 벽에 기대선 그림자를 발견하고 급히 1층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화희가 계단 맨 아래에 서 있었다.

    실내 등을 등진 그의 얼굴에 그늘이 져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몇 계단을 남겨 두고 멈춰 선 수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기, 많이 늦었네요.”

    “……일이 생겨서 늦었습니다.”

    한 박자 늦은 대답에 수아는 계단을 내려서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지만, 그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 있었던 건가? 그가 늦게 전화를 받고 나갔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수아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연이어 물러서려다 화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이는 것을 보고 멈췄다.

    순간적이지만 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채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대로 화희는 소리 없이 웃으면서 속삭이고 뒤돌아섰다.

    “……잘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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