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왜 내가 이런 일까지……. 하아, 한때는 나도 날고 기는 몸이었는데 말이야.”
서태산은 요양원 밖까지 나와 나뭇가지를 땅에 박으며 투덜거렸다.
내가 비둘기야, 뭐야.
아무래도 박화희 놈은 자신을 비둘기로 아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까지 ‘비둘기 요양원’에 처박아 놓더니 박 회장에게는 전서구 노릇까지 시켰다. 게다가 지금은 거대한 둥지를 짓는 것처럼 요양원 둘레에 가시나무로 결계를 치는 중이었다.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이건 팔불출 그놈이 아니라 귀여운 민수아를 위한 일이야. 아무렴, 이 몸이 그놈 따위를 무서워할까.”
비록 700년에 걸쳐 화희에게 열일곱 번이나 허리가 부러지는 통에 제 각시를 찾는 일이 늦어졌지만, 화희가 그의 분신을 두고 명을 듣지 않으면 태워 버리겠다고 협박했지만, 그게 하찮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사실 서태산은 갈 곳이 없었다. 이제 화희가 넘겨준 ‘땅’만이 그의 터전이었다.
나무로 빽빽한 숲은 점점 사라지고 토지령 따위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서태산은 ‘존재’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희미한 ‘혼’일 뿐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손가락만 까딱해도 할 수 있는 일을 지금은 손수 몸을 움직여야 했다. 얼마 전이라 해도 몇백 년 전이긴 하지만.
“이게 뭔 냄새야?”
막 나뭇가지를 땅에 박고 허리를 펴던 서태산은 코를 킁킁거렸다. 바람을 타고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가 싶더니 결계로 세워 놓은 가시나무에서 짜랑짜랑 소리가 울렸다.
결계를 흔드는 소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지자 흠칫한 서태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어둠 속에서 그를 노려보던 붉은 눈과 딱 눈이 마주쳤다. 태산이 급히 손을 휘둘렀지만 간발의 차이로 덤벼든 남자가 빨랐다.
순식간에 눈앞에 은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휘청거리며 몸을 피한 그는 욱신거리는 배를 더듬었다. 손바닥 가득 붉은 피가 묻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가시나무에 발목이 묶인 젊은 남자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면서 허공에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야, 약을 줘……. 시발, 목말라 뒤질 것 같아…….”
“뭐야, 저 잡것은…….”
이지를 상실한 눈, 고약한 입 냄새, 무엇보다 그를 향한 이유 모를 악의가 태산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피로 흠뻑 젖기 시작하는 배를 움켜쥔 서태산은 못마땅하게 남자를 노려보았다.
저런 것에게 당하다니. 정확히 자신을 노린 것이 아니라서 바로 눈치채지 못했지만, 인간이 되다 만 종자에게 당하다니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다.
아, 니미럴. 예전 같으면 손가락만 까딱했어도 벌써 울타리가 되어서 방어벽을 쳤을 텐데. 지금은 고작 올가미 정도의 크기다.
자라나는 가시나무가 스멀스멀 기어올라 놈의 몸뚱이를 옭아맸지만, 숨이 모자란 것처럼 헐떡거리던 남자가 마구잡이로 허우적거렸다.
결국 자라난 가지가 전부 놈을 감싸기도 전에 가시나무가 두두둑 끊어지기 시작했다.
치명상을 입은 데다 맛이 간 상태인 젊은 놈과의 근접전이라면 영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놓고 가면 엄한 사람이 당할 텐데.
답을 찾기도 전에 덩굴에서 완전히 풀려난 남자가 멧돼지처럼 그에게 돌진했다.
“주, 죽어!!”
쾅, 허리가 부러지는 격통이 느껴지는가 싶었는데 서태산은 놈에게 깔려 바닥을 뒹굴었다.
“이…… 이 미친놈…….”
그는 겨우 칼을 든 놈의 팔뚝을 양손으로 잡고 버텼다. 칼끝이 그의 목을 찌르기 직전이었다.
놈이 이지를 상실한 눈으로 침을 뚝뚝 흘리면서 쉼 없이 중얼거렸다.
“아, 시발. 빠, 빨리 죽어 버려. 나, 난 그, 급하다고!”
버티기 버거워진 칼끝이 밀리다가 태산의 이마를 긁었다. 한번 밀리기 시작하자 흔들리는 칼끝은 볼에서 입술과 턱을 긁고 지나 목까지 내려갔다.
섬뜩한 위기감에 김 할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닳고 닳은 육신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아까웠다.
임자, 미안하게 됐소이다. 우리의 눈꽃 열차는 어려울 것 같구려.
서태산은 한 손을 놓고 빈손으로 흙을 긁어모았다. 막 입에 넣고 삼키려는 순간이었다.
퍼억, 묵직한 소리가 났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놈이 옆으로 쓰러지고 달빛을 등진 검은 그림자가 바닥에 넘어진 서태산을 내려다보았다.
앳된 얼굴에 검은 눈망울, 아는 얼굴이었다.
“괘, 괜찮아요? 이, 이 미친놈은 뭐예요?”
윤성이 뒷걸음질 치며 손에 든 막대기를 떨어뜨렸다. 서태산은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너냐…….”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을 도운 건 윤성 혼자뿐인 듯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기절한 놈을 뒤집어 보았다. 다시 확인해도 새파랗게 어린, 모르는 놈이었다.
그때 윤성이 놈을 보고 경악해서 중얼거렸다.
“……유, 윤민형?”
“뭐야, 아는 놈이야?”
태산이 묻자 윤성은 대답 대신 놈과 피가 번지는 그의 배를 질린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 * *
“다쳤으면 의사를, 범죄엔 경찰을 불러야지 왜 변호사를 부릅니까?”
내 말이.
민철이 서태산의 배를 붕대로 감으며 투덜거리자 윤성은 속으로 공감했다. 그러다 누에고치처럼 붕대를 감은 서태산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휙 돌렸다.
픽 웃은 서태산이 민철의 어깨를 두들기며 웃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웬만한 의사보다 낫구만, 뭘.”
“대충 싸맸을 뿐이니까 내일은 제대로 치료받으세요. 이사님 주치의를 불러 드릴 테니까요.”
치료를 끝낸 민철이 붕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 한구석에 뻗은 놈의 뺨을 툭툭 쳤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자, 눈꺼풀을 뒤집어 보더니 윤성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거 완전히 약에 찌든 것 같은데?”
“……왜 날 보는 건데?”
“네가 아는 놈이라며?”
화희와 있을 때 몇 번 봤던 변호사, 강민철은 지금 보니 더욱 밥맛에 밉상이었다. 그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거듭 묻자 윤성은 짜증 내며 답했다.
“몇 번 서클에서 봤던 것뿐이야.”
“아직 어려서 혀가 덜 자랐어? 왜 어른에게 말이 반 토막이야?”
윤성은 따지는 민철을 무시하며 바닥에 뻗은 놈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저놈은 왜 저렇게 됐지?
윤민형, K 제약의 셋째 아들인 그는 망나니로 유명했다. 하지만 약에 취해서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를 정도로 맛이 가진 않았었다.
왜 저렇게까지 망가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친하진 않았지만 못 본 사이 인간쓰레기가 된 꼴을 보니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게다가 이 사람들의 조합은 매우 이상했다. 칼빵을 당해 피를 철철 흘린 서태산은 생각보다 멀쩡했고, 민철은 그걸 보면서도 태연했다. 무엇보다 왜 박화희의 사무실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냐고.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갈걸.
아씨, 애초에 수아를 만나러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었어. 무작정 기다리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지.
윤성이 윤민형을 노려보면서 생각에 잠긴 사이, 민철이 서태산과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쟨 어떡하죠? 이대로 보내기엔 껄끄러운데요. 우연히 어르신이 공격당하는 걸 봤다는 것도 전혀 믿을 수 없고요. 엄밀히 말하면…….”
“일리가 있어. 그런데 말이야.”
서태산이 불쑥 윤성을 돌아보며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쟤, 친아들 맞아? 이상하네. 천부신 놈 관상을 봤을 때 자식이 없는데? 저놈도 이렇게 보니까 천가와 기운이 완전히 다르고.”
“관상요? 그런 걸 보실 수 있습니까?”
“대충은?”
뻔히 저를 두고 하는 말을 듣던 윤성은 뜻밖에도 그들이 숨겨진 진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에 꺼내자 지레 찔려 버럭 화를 냈다.
“뭐라는 거야, 대체!”
그러나 민철은 그런 그를 스윽 쳐다보더니 도로 태산에게 제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어, 그럼 제 관상은요? 전 자식이 있을까요?”
서태산이 혀를 차며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노총각 쉰내를 풀풀 풍기는 주제에 자식은 무슨. 김칫국부터 마실 생각 말고 배추부터 심어.”
“맨날 이런 일에 시달리는데 씨 뿌릴 시간이 어디 있어요?”
“맨날 이런 일을 달고 사는 자네 상관은 드디어 꽃을 피웠는데? 물론 천 년이나 걸렸지만서도.”
“천년이라니, 그런 무서운 말씀 마십시오!”
“흠흠, 내 생각에 쟨 아무것도 몰라. 딱 봐도 그렇잖아. 오늘도 아마 민 팀장 만나러 왔을 거야. 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거 보여 줘 봐.”
머뭇거리던 민철이 자신의 사무 가방에서 접힌 종이 여러 장을 꺼내 윤성에게 휙 내던졌다.
탄 것처럼 검은 얼룩이 남은 종이엔 띄엄띄엄 한 글자씩 남아 있었다. 얼떨결에 종이를 잡아 펼쳤던 윤성은 인상을 쓰면서 마지못해 글자를 따라 읽었다.
<……신이 내게…… 사명을 주셨다……. 이 나라를 구…… 하라…….>
“유치하잖아……. 이게 뭐야, 대체?”
윤성이 어이없어하며 되묻자 민철이 도로 종이를 휙 채 갔다.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하던 서태산이 종이를 힐긋거리다 고개를 내저었다.
“봐, 아무것도 모르잖아. 아, 그런데 들을수록 소름 돋아. 천 년이 지나도 그놈은 여전하구만.”
“아무래도 우리가 쫓는 방향이 그놈과 연관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모습을 드러낼 리가 있겠습니까?”
윤성은 저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제 아버지 ‘천부신’에 관한 것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저들은 어떻게 아버지의 정체를 알지? 내가 양자인 것도 진짜 아는 건가? 이상한 종이는 또 뭐고?
참다못한 윤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가 캐물었다.
“할아버지, 아저씨.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알고요?”
“그건 우리한테 물을 게 아닌 것 같은데. 아, 이사님!”
마뜩잖게 대답하던 민철이 뒤를 넘겨보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문을 돌아보던 윤성은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걸어오는 화희를 보고 순간 흠칫했다.
저 남자가 이런 느낌이었던가?
수아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기척도 없이 움직이면서 주변의 공기를 짓누르는 듯한 위압감에 저절로 시선이 쏠렸다.
어느새 방 안에 들어온 그는 무표정하게 서태산을 흘깃 본 후 윤성에게로 스윽 시선을 돌렸다.
“……또 너 때문인가?”
나지막한 목소리마저 무게감이 달랐다.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윤성은 시선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뭔가에 붙들린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이게 뭐야?
그의 검은 눈과 마주친 동안 발밑이 꺼져 들어가는 것처럼 아득해지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숨마저 가빠지려는 때, 서태산이 느릿하게 다가와 윤성의 앞을 막아섰다.
“안 돼, 이놈이 날 구해 줬어.”
“상관없어.”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린 화희가 고개를 까딱였다. 서태산은 움찔 어깨를 떨었으나 비켜서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난 상관있어! 은혜를 갚아야 한단 말이다! 아, 그보다 수아를 생각해 봐. 민 팀장이 얠 꽤나 아끼잖아?”
“저, 이사님. 정말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민철까지 끼어들자, 혀를 찬 화희가 윤성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제야 윤성은 막혔던 숨이 뚫린 것처럼 제대로 숨을 쉬고 움직일 수 있었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기겁한 윤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 했으나 서태산이 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화희를 눈짓하며 고개를 젓는 걸 보니 가만히 있으라는 것 같았다.
그사이 민철이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파일을 들어 화희에게 내밀었다.
“어르신을 노린 걸 보면 은행의 CCTV만 확인한 것 같습니다. 이건 윤민형, 저놈에 대한 신상 명세입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 내일, 이놈과 준비해 둔 자료를 함께 검찰에 넘겨.”
“내일요? 그럼 회장님 쪽은 어떻게 할까요?”
“그 구렁이를 믿나?”
고개를 좌우로 꺾은 화희가 아직 기절한 채 움직이지 않는 윤민형의 앞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턱 끝으로 그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허공의 뭔가를 움켜잡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헉!”
꽉 막힌 실내에서 갑자기 싸한 바람이 불자, 민철이 질색하며 숨을 들이켰다.
윤성은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어 눈을 크게 떴다.
화희가 뻗은 팔에서부터 검은 그림자가 스멀스멀 타고 나와 윤민형에게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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