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 *
“신께서 돕지 않고서야.”
모처럼 부신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감돌았다.
부신은 몇 번이고 흐릿한 CCTV 영상을 돌려 보며 웃었다. 떨어지는 엘리베이터 밖에서 화희가 문짝을 부수고 여자를 꺼내는 장면은 절경이었다.
희게 질린 그의 표정과 안타까운 손짓, 박화희의 약점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의 약점을 드디어 찾아내다니 하늘이 도운 걸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기쁜 한편 화희를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흠잡을 데 없이 완전무결한데 굳이 왜 스스로 약점을 만드는 것인지.
신에게 저주를 받았다 여긴 자신과 비교하자면 박화희는 축복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벌을 받은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부신이 지독한 의지와 악으로 버티고 버틴 결과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드디어 하늘도 제 뜻을 알아주신 것이다.
“으윽!”
의기양양하게 웃던 부신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다.
온몸의 근육이 보이지 않는 손에 쥐어짜지는 것처럼 비틀리고 오그라들었다.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던 그는 겨우 서랍에서 약을 찾아내 주삿바늘을 꽂았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서야 겨우 진통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미 마약 성분에 가까웠는데도 그마저도 점점 효과가 경감되어서 더 강한 약을 구해야 할 판이었다.
격통이 찾아올 때마다 머릿속을 헤집던 노한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천벌이 내릴 것이다!>
<천벌받을 거야!>
그 음성을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부신은 이를 악물고 굳어서 뻣뻣해진 몸을 폈다. 절대 ‘천벌’ 따위에 질 수 없었다. 아니, 진정 천벌을 받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늘은 그를 괴물로 만든 것도 모자라 불구덩이에 수차례 던졌으나 그때마다 부신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저주를 받은 것 같았다. 도박 중독과 알코올 중독에 빠진 인간 말종인 부모를 둔 것도 모자라 그의 외모는 매우 기괴했다.
불에 녹아 일그러진 것처럼 울퉁불퉁한 피부에 찌그러진 눈, 비틀어진 코와 입술. 괴물의 형상이라며 아무도 그를 사람 취급 하지 않았다.
부모조차 그를 가둬 굶기고 죽기 직전까지 매질을 일삼았다. 돼지처럼 갇힌 채 학대당하다 일곱 살이 되던 해, 부신은 부모가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그 후, 그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사람들이 버린 음식을 주워 먹고 괴물이라 돌팔매질당하며 겨우 어린 목숨을 연명했다.
그러던 중 뒷골목 조직에 잡혀 몇 년이나 어두운 지하 창고에 갇힌 채 마약 제조만 도와야 했다. 부신이 독한 화학 약에 중독되어 쓰러지자 조직은 그의 장기를 떼어 내고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부신은 그 지옥에서도 살아남았다. 미리 조금씩 모아 둔 약 가루를 그들의 눈에 뿌리고 그들이 버둥거리는 사이, 가까스로 도망쳤다.
도망치자마자 그는 구걸할 당시에 봐 두었던 조직의 반대파에 찾아가 개처럼 기며 목숨을 구걸했다. 수년간 그들은 부신을 마약 운반책으로, 장난감으로 쉬지 않고 괴롭히며 부려 먹었다.
그런데 부신이 나이가 들자 판도가 바뀌었다. 남의 것을 약탈하는 게 목적인 조직은 남을 잔혹하게 짓밟을수록 우위를 점하는 세상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고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약한 놈은 철저하게 짓밟아 없애 버렸다. 괴물이라고 손가락질받던 기괴한 외모도 남들의 두려움을 부추기기에는 그만이었다.
부신은 자신의 잔악성을 날개 삼아 위로, 위로 기어올라 갔다. 곧 ‘생존’에서 ‘상승’으로 목표가 바뀌었다.
<그래, 잘했다. 뒤처리에는 부신이 너만 한 놈이 없지. 그런데 다음부터는 다른 놈을 시켜서 보고해. 네놈 면상만 보면 술맛이 뚝 떨어져.>
윗선의 수많은 모욕과 멸시에도 견딜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악’과 ‘자존심’ 덕분이었다. 음해를 당했을 땐 반드시 복수했다.
날 무시하고 깔보았지? 두고 봐라. 반드시 너는 살려 달라고 내 발 아래에서 빌며 기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 힘이 쌓이자 그는 차근차근 거슬리는 윗놈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가진 놈일수록 약점을 골라 깨부수는 재미가 컸다. 약점이 가족이나 애인 등 사람이면 인질로 쓰고, 돈이면 훔쳐 내고, 그도 없으면 뒷공작을 꾸며서 배신자로 만들었다.
서른 줄에 접어들었을 때 부신은 조직 내에서 없어선 안 될 ‘무기’가 되었다.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떠받들었다. 그렇게 저주받은 것처럼 여겨지던 인생이 조금씩 나아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1984, 부산.
부신은 선착장에서 해안 경비대의 교대 시간을 틈타 물건이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유난히 어둡고 으슥한 밤이었다. 습기로 축축한 데다 생선 썩는 비린내가 진동하는 선착장은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이것만큼 돈이 되는 일이 없었다. 또한 부신 스스로 즐기는 일이기도 했다. 괴물 취급을 받던 그가 오히려 사람을 짐승처럼 팔아넘기니 꼭 그들의 신이 된 것만 같았다.
밀항과 매매의 연락책인, 일명 강매기가 양손을 비비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 넘기는 것들은 제법 물건이지 않소, 형님? 꽤 돈이 될 것 같아서 벌써 손이 근질근질해요.”
도박 중독으로 벌써 빚더미에 올라앉은 주제에 돈이 생기면 바로 도박장에 달려갈 기세였다.
부신이 대꾸도 없이 시간을 확인했는데도 강매기는 어지간히 심심했는지 성가시게 자꾸 농을 걸었다.
“근데 그 소문이 진짜요? 아무리 삼삼한 것들을 봐도 형님 물건이 안 선다던데?”
“……닥쳐. 네 일이나 똑바로 해.”
확 기분이 상한 부신은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강매기가 바로 입을 닫으며 어깨를 움츠렸지만 분이 풀리지 않은 그는 독기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윗선의 백이고 나발이고, 이번 일만 끝나면 꼭 네놈 손모가지를 생으로 잘라 죽여 주마.
부신이 막 허리춤에 찬 칼을 만지작거리며 다짐했을 때였다.
콰쾅, 엄청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사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창문 너머로 불바다가 된 야적장을 넘겨본 강매기가 당황한 기색으로 부신을 돌아보았다.
“시발, 혹시 경찰일까요?”
“멍청한 놈, 경찰이 폭탄을 쓰나?”
“그, 그럼 중국 쪽입니까? 안 그래도 우리 물건을 넘보고 있다는 소문이…….”
“그만 지껄이고 가서 상황이나 살펴!”
부신이 다그치자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 강매기가 고개를 저었다.
“혀, 형님이 가 보시오! 혹시 내가 잘못되면 운항은 누가 하라고요!”
공격 규모를 봐선 경찰은 아니었고, 이렇게 시끄럽게 쳐들어오는 걸 보면 반대파도 아니었다.
대체 누구지? 이를 간 부신은 내내 거슬리는 강매기를 밀치고 급히 야적장에 무전을 쳤다.
“무슨 일이야!”
-모,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쳐들어온 놈들이 사무실에 불을 지르고 창고를 뒤지…… 으악!
폭발음이 연이어 들리며 무전이 잘 들리지 않았다. 부신은 초조하게 무전기를 두들기다 다시 연결이 되자 명령부터 내렸다.
“물건부터 보내. 뒤처리는 너희들이 알아서 하고 일단 배부터 띄운다.”
-하, 하지만 형님! 죄송하지만 무, 문제가 생겼습니다. 폭발 때문에 보초가 빈 사이 몇 명이 도망쳤습니다.
“뭐?! 당장 잡아 와!”
하필이면, 젠장. 부신은 무전기를 내던지고 야적장을 자세히 살폈다.
초조하게 기다렸으나 시커먼 재를 뒤집어쓴 부하 둘이 기절한 계집 하나만 달랑 안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 이 계집만 겨우 잡았습니다. 제일 먼저 약에서 깬 모양인데 다른 계집들까지 풀어 주는 바람에…….”
“그래서 다른 것들은?!”
“공격한 놈들 쪽으로 도망쳤습니다. 형님, 일단 물건은 포기하고 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쳐들어온 놈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벌써 우리 애들 열이 죽었습니다! 저희만 간신히…….”
“애들을 죽였다고? 대체 뭐 하는 놈들……!”
부신이 소리치는 순간 폭발음이 가까워졌다. 선착장 바닥이 거세게 흔들리는 바람에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은 그는 이를 악물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저놈들에게 잡히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고, 겨우 여기에서 피한다 해도 물건을 놓쳤으니 경찰에게 쫓길 게 뻔했다. 그도 아니라면 그를 고까워하던 조직의 다른 놈들이 그에게 이번 일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시발, 물건만 제대로 준비됐어도. 저 빌어먹을 년 때문에. 부신은 새삼 기가 막혀 부하의 어깨에 짐짝처럼 얹힌 계집을 노려보았다.
이를 간 부신은 강매기에게 급히 손짓했다.
“배를 출발시켜. 일단 몸부터 피하는 게 상책이다.”
“하, 하지만 그게 오히려 눈에 띌…….”
“당장 움직여!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 테니까.”
강매기가 마뜩잖은 기색으로 부신을 돌아보다 폭발음이 가까워지자 계집을 든 부하와 함께 급히 배로 달려갔다.
미끼 삼아 그를 먼저 보냈던 부신은 선착장 반대쪽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살폈다. 야적장에서 시작된 불길은 이제 선착장 근처까지 번져 있었다.
불길 너머로 얼핏 장신의 남자 그림자가 비쳤다. 부신은 저를 따라온 부하에게 손짓했다.
“무슨 수를 쓰든 놈을 막아.”
겁먹은 기색이었으나 그를 잘 아는 조직원은 군말 없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뒷주머니에서 회칼을 빼든 조직원을 발견한 남자가 불길을 헤치고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제법 칼을 잘 쓰던 부하였는데도 한 번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몸 아래로 붉은 피 웅덩이가 생겨났다.
장검?
부신은 제가 본 것이 믿기지 않아 남자를 노려보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턴 남자가 부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어 무표정한 흰 얼굴이 도드라졌다. 보기 드문 장검도 그렇지만 남자는 범상치 않았다. 눈에 띄게 잘생긴 외모였음에도 안광이 빛나서인지 어딘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부신은 얼른 바닥에 납작 엎드려 몸을 숨겼다.
기회를 틈타 없애려고 그를 주시하던 부신은 소름 끼치는 두려움을 느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려움이었다.
저놈은 뭐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귀신 같았다. 부신은 본능적으로 남자가 야적장의 조직원들을 죽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지나는 길마다 피가 뚝뚝 떨어져 흔적이 남았다. 부신은 제 쪽으로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그를 보고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었다.
그때, 다행히 배가 출발하는 엔진음이 들렸다. 흠칫한 남자가 고개를 돌려 배를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일그러진 다음 순간, 그는 순식간에 부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섯을 센 부신은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엎드렸다. 강매기를 쫓아간 부하에게 가스통을 터뜨려 배를 가라앉히라고 몰래 일러둔 터였다.
콰콰쾅,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가 터졌다. 선착장 전부가 환하게 밝아 오르는가 싶더니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다.
물보라가 가라앉자 부신은 선착장 반대편으로 달려가 물로 뛰어들었다. 어디로 갔는지 남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을 피해 물속에 숨을 생각이었다.
바닷물은 얼음장 같았다. 부신은 덜덜 떨면서도 숨을 죽이며 불길에 치솟은 배가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날, 찬 겨울 바다에서 부신은 그동안 쌓아 놓았던 모든 걸 잃었다.
도망친 여자들이 경찰에 정보를 넘기는 바람에 그의 조직은 일망타진됐고 부신은 수배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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