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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65화 (65/100)
  • 65화

    * * *

    화려하고 고귀하던 황궁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수아를 쫓던 금위군들이 반대로 사냥감이 되어 피투성이로 쓰러진 채 신음했다.

    화희는 제 앞길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가차 없이 검으로 베었다. 수아에게 찔린 순간부터 혼이 찢기기 시작한 그 역시 만신창이였지만 멈출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금위군을 방패처럼 두르고도 궁지에 몰린 황제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깟 계집에게 눈이 멀어 아비를 해하려 들다니 제정신이냐! 내, 너를 핏줄로 귀히 여겼거늘 어찌……!’

    핏줄이라. 신을 모시던 어미를 겁탈해 나를 만들고, 그도 모자라 내가 원하던 단 하나를 빼앗은 것이 귀히 여기는 것인가?

    화희는 실소를 머금고 금위군 너머의 황제를 노려보았다.

    ‘분명 나의 비만은 함부로 대하지 말라 거듭 당부했을 텐데.’

    수아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면, 그녀의 식솔을 해하지 않았다면, 이리 막바지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단 하나밖에 알지 못했었다. 인간의 악의와 업. 그것을 없애는 것이 그의 사명인 줄 알았고, 탐욕스럽고 광포했던 선황은 나라를 도탄에 빠트리는 근원이었으니 없앴을 뿐이다.

    화희는 자신을 만들어 낸 ‘아버지’의 검이 되어 선황과 귀족들을 도살했다. 무엇이 옳은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멸하는 자이지 수호하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천부신이 또 다른 선황이 된다면 없애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난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라를 수호하는 ‘신녀’이자 그의 신부인 수아에게 버림받는 순간, 화희는 그저 살인귀가 되어 버린 자신을 깨달았다.

    아니, 모든 건 그저 변명일 뿐이다. 그녀를 잃은 그는 갈 곳이 없었다. 그녀를 죽이려는 황제에 대한 분노 외에는 그저 모든 것이 의미 없고 성가셨다.

    그는 피 묻은 검을 털며 황제를 향한 분노를 짓씹었다.

    ‘나의 비는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 계집은 죄인이야! 오로지 명분이 필요해서 너에게 잠시 하사했던 것뿐이다! 한데 삿된 계집 따위에게 홀려 네놈이…… 읏!’

    끝까지 발악하는 황제를 노려보던 화희는 검으로 허공을 그어 붉은 실을 잘라 냈다.

    황제와 이어진 ‘연’이 끊기자마자 그를 구속하던 핏줄의 속박이 사라졌다. 그것을 느낀 황제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냈다.

    ‘끄, 끝까지 네놈이……! 저놈을 죽여라! 저놈은 더 이상 태자가 아닌 사특한 귀물이다!’

    그래, 그래야 네놈답지. 나 역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무위로 돌려 주마.

    실소를 머금은 화희는 스스로 속박하고자 들었던 검을 내던졌다.

    화희.

    그는 자신의 피로 허공에 이름을 써 인간으로 태어나면서부터 흩어 놓았던 힘을 불러들였다. 다른 자아(自我)지만 그의 부름에 응한 힘들이 인간의 육신에 갇힌 화희에게 몰려들었다.

    사방을 밝히던 횃불이 거센 바람에 하나둘씩 꺼졌다. 어둠에 갇힌 금위군들이 하나둘 겁에 질린 소리를 내질렀다.

    “주, 죽여! 어서 저 귀물을 죽여라!”

    황제의 다급한 명과 함께 화살들이 비처럼 날아들었다. 화살이 육신을 꿰뚫었으나 화희는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들끓는 살기가 독처럼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는 느낌만 선명했다.

    그를 향해 날아들던 화살이 태풍처럼 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반대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황제와 금위군이 피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늦었다.

    모든 것을 묻어 버리려는 것처럼 황궁이 요동쳤다. 땅이 무너지고 궁의 기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자 바로 눈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흙먼지가 일었다.

    화려했던 궁과 함께 그녀를 속박하던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그녀는 나를 봐 줄까.

    아니, 그럴 리 없을 것이다.

    체념한 화희는 완전히 육신을 놓아 버리기 전, 눈을 감고 되새겼다.

    그녀의 가냘픈 육신에 담긴 따뜻한 체온, 그녀의 선한 나약함, 자신을 똑바로 봐 주지 않던 차가움까지. 그녀의 모든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있던 그녀의 모습까지.

    그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힘을 받아들이려는 찰나, 희미한 목소리가 대답처럼 속삭였다.

    “……화희…….”

    착각인가? 그는 순간 멈칫 귀를 기울였다. 분명 수아의 목소리였다.

    흘깃 뒤를 돌아보았지만 사방은 흙먼지로 뒤덮여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화희 씨! 눈 좀 떠 봐요!”

    착각이 아니었다. 복잡하게 얽힌 인연의 실타리 속에서 수아가 그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아주 먼 미래의 그 어느 시간에서.

    “화희 씨, 일어나요!”

    고통스러워하는 화희를 흔들어 깨우던 그녀는 비명처럼 그를 불렀다.

    전에 그의 악몽에 빨려들어 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그의 감정과 기억에 짓눌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에 피부가 뜯기고, 무너지는 땅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비명을 지르는 순간, 강한 팔이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괜찮아요. 내 기억을 엿본 것뿐이니까. 지금은 안전해요.”

    자신을 안은 팔을 더듬어 보던 수아는 어느새 화희가 자신을 빈틈없이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그건 뭐였지? 머릿속에 억지로 쑤셔 박힌 수많은 상념과 생각, 기억이 한데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수아가 진정하려 애쓰는 사이, 그녀를 요람처럼 받쳐 안은 화희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래지 않아 현실 감각이 되돌아왔다. 퍼뜩 몸을 일으킨 수아는 그의 가슴을 흥건하게 적셨던 피를 떠올렸다.

    “다, 다쳤어요? 어디 봐요!”

    화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조바심이 난 수아가 스탠드에 손을 뻗자 손목을 잡아 부드럽게 만류한 그가 속삭였다.

    “난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았단 말이에요. 소, 손이 젖을 정도로 피가……!”

    수아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는 게 느껴졌다. 슬쩍 그의 가슴팍을 더듬어 보았으나 흥건했던 피는 흔적도 없었다.

    멀쩡한 그를 보자, 오히려 악몽에 시달렸다 일어난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인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요.”

    그녀가 고집스럽게 말하자 한숨을 내쉰 화희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스탠드를 켠 수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셔츠를 더듬었다.

    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자 나은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붉은 기가 남은 흉터가 천천히 드러났다.

    전생의 그녀가 그를 단검으로 찔러서 생긴 검상이 분명했다.

    믿을 수 없어 확인하는 것처럼 길고 가느다랗게 파인 흉터를 손끝으로 더듬자, 화희가 나지막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거 왜 이런 거예요? 나 때문이에요?”

    “정확히는 천 년 전 신녀였던 당신 때문이죠. 수아 씨가 아니라.”

    어떻게 천 년이 지나서도 없어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수아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공포에 짓눌려 제대로 보지 못했던 일을, 그의 기억으로 다시 들여다보자 미처 몰랐던 일들을 깨달았다.

    <나는 한 번도 당신과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화희는 약속을 반드시 지켰다. 그녀의 가족을 죽인 것은 황제였고, 그는 그것마저 제 탓이라 여겼기에 그녀를 놓아주었었다.

    <당신이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절대 남을 해치지 않겠다고. 당신의 불행한 죽음을 겪었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버텼는지 아마 짐작도 못 할 겁니다.>

    전에 그가 어떠한 마음으로 그 말을 했는지 이젠 제대로 알 수 있었다.

    화희에게 자신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그와의 인연과 시간은 생각보다 깊고 무거웠으며 복잡했다.

    “수아 씨 표정이 마음에 안 드는군요.”

    “내 표정이 어떤데요?”

    “억지로 비싼 물건을 강매당한 것 같달까요.”

    “전생에 1원을 빚지면 10억으로 갚아야 할 수도 있다면서요. 그런 거랑 기분이 비슷해요.”

    “그건 내게 이번 생이 덤일 때의 얘기고. 난 전과 달라요. 무슨 일이 있어도 수아 씨를 절대 안 놔줄 겁니다.”

    수아는 집요한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는 그와 눈을 맞추다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저기, 아직도 아파요? 내가 낫게 할 수는 없는 거예요?”

    스탠드를 끄고 도로 그녀를 끌어안은 화희가 침대에 몸을 눕히며 코웃음 쳤다.

    “참 쓸데없는 걱정이군요. 날 위한다면 근거 없는 자책 말고 근거 있는 동정을 베풀어요.”

    “네?”

    화희가 상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그녀의 턱을 감싸 쥐며 짧게 입을 맞췄다.

    “내 침실에서, 발가벗은 나를, 수아 씨가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만져 대면 아프다기보다 상당히 곤란해지니까요.”

    “……네에?”

    수아는 순간 멍해져서 그에게서 손을 뗐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을 잡아 도로 가슴팍에 올려놓은 그가 귓가에 속살거렸다.

    “이렇게 소중하게 만져 주면 제대로 설 것 같단 뜻입니다.”

    “이, 이봐-!”

    왜, 왜 갑자기 얘기가 이리로 튀어? 무겁던 분위기가 널뛰기하듯 갑자기 다른 장르로 가 버리자 수아는 황당해서 입만 뻐끔거렸다.

    다시 짧게 입맞춤을 한 화희가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무슨 생각을 했는데 얼굴이 빨개집니까? 내 존재적 위신이 명확히 ‘곧추설’ 것 같다는데. 내 기억을 봤잖아요, 나는 당신을 위해 존재했다는 걸. 이건 그 증거나 다름없고.”

    “뭐…… 내, 내가 뭘요! 이 타이밍에 그, 그런 야릇한 단어를 쓰면 누구나 오해해요!”

    “어느 타이밍에 쓰든 잘못 들은 쪽이 잘못이지, ‘곧추서다’는 엄연히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단어입니다.”

    “하, 진짜 이럴 거예요?”

    “진짜 이럴 거냐고 묻고 싶은 건 납니다. 난 수아 씨의 스치는 손길에도 반응하는 저딴 스탠드가 된 기분이라서.”

    자신을 놀리는 건지, 위로하는 건지, 달래는 건지 헷갈린 수아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진득하게 쓰다듬었다.

    “내가 어떤 일을 겪었든 수아 씨를 만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면 그 무엇이든 괜찮단 뜻이에요. 그러니 마음 풀어요.”

    “진짜…….”

    수아가 달아오른 얼굴을 어깨에 비비적거리며 투덜거리자 가볍게 웃은 그는 입맞춤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수아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뻗어 그를 마주 안았다.

    오롯이 그의 모든 것을 감싸 안을 수 있을 만큼 자신이 강해졌으면 좋겠다. 혹시 이런 생각은 그에 대한 마음이 깊어진 증거일까.

    말로 전하는 대신 그녀는 정성껏 입맞춤을 되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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