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 *
“괜찮습니까?”
침대맡에 걸터앉은 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수아는 그를 올려다보다 중얼거렸다.
“아직 좀 정신이 없어요. 그런데 이제 무섭진 않아요. 이사님이 곁에 있어 줘서 그런가 봐요.”
그녀는 희게 질린 자신을 발견한 순간부터 펴지지 않는 그의 미간 주름을 손끝으로 슬쩍 문질렀다.
수아의 손가락을 잡아 입술에 댄 화희가 옅게 웃었다.
“내가 쓸모가 있어서 다행이군요.”
“미안해요, 나 때문에 놀랐죠?”
“사과하지 마세요. 진작 눈치채지 못한 내 잘못이니까.”
“난 괜찮으니까 이제 말해 줘요. 윤성이 아버지가 누군데요?”
수아는 멈칫 시선을 돌리는 화희를 보며 남자의 악의 서린 눈빛을 떠올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증오한다는 걸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기에 매우 섬뜩했다.
게다가 환청 이야기를 들었을 때 화희의 얼굴엔 찰나 격한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분명 전생의 일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강해졌다.
그러나 화희는 답을 피한 채 그녀를 달래기만 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기억해 내려 하지 말고 잊어요.”
답답해진 수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난 알아야겠어요. 죽을 운명인 건 전생에 자살한 벌이라 치고, 꿈을 꾸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까지 만나는 건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채 휘둘리기만 하는 게 더 싫단 말이에요.”
화희가 말없이 그녀를 한참 응시하다 시선을 내려 제 손에 낀 반지를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전생의 일을 떠올리기 시작한 건 나 때문일 겁니다. 내가 트리거가 되어 각성한 거겠죠.”
“각성요? 아무 능력도 없는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다고요?”
“당신은 아무 능력이 없는 게 아니고 신녀로서의 능력을 자각하지 못하는 겁니다. 몇 번의 생을 거듭 태어났어도 혼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
“신녀요?”
“나라의 제사를 관장하고 수호수를 지키는 신의 사자입니다. 천 년 전의 당신은 황가의 공주이자 고귀한 신분의 신녀였습니다.”
시, 신의 사자라니. 엄청난 이야기에 수아가 말문을 잃고 쳐다보자 화희가 짧게 숨을 뱉어 내며 못마땅하게 덧붙였다.
“나는 당신이 이런 것들을 끝까지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괴롭기만 했던 생의 기억을 되새겨 봤자 당신만 힘들어질 뿐이니까.”
화희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과거가 남긴 흔적이었다.
정작 본인이 더 괴로워 보이는 걸 알기나 할까?
수아는 문득 마음이 아파져 그의 뺨을 감쌌다. 하지만 대답을 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그가 답하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손에 얼굴을 기댄 화희가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아…… 민수아 씨는 여전히 고집이 세군요.”
“힘들 일 없을 거예요, 이제. 과거에 두 번은 안 당할 거거든요.”
천천히 눈을 감은 그는 긴 한숨 끝에 토해 내듯 말을 뱉어 냈다.
“나는 아버지를 도와 당신의 황가를 무너뜨리고 당신을 억지로 나의 신부로 만들었어요. 천부신은 아마 내 아버지일 겁니다.”
“아버지라면…… 황제요?”
그의 말을 듣자마자 환청의 말뜻이 와닿았다.
<너는 태손을 생산하는 그릇일 뿐이다! 한데 그 비천한 몸뚱이로 내 아들을 망치려고 들어?>
잠시 충격에 빠졌던 수아는 뒤늦게 그녀의 반응을 집요하게 살피는 화희의 시선을 눈치챘다.
괜찮다고 웃어 보이려던 그녀는 멈칫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색이 왜 이렇게 창백해요?”
“……이런 걸 알게 되어도 내가 괜찮습니까?”
아직도 그런 걸 걱정하는 걸까?
그녀와 마주친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는 걸 보던 수아는 잠시 망설이다 그를 끌어안았다.
“화희 씨야말로 괜찮아요? 내가 이렇게 답삭 달라붙어서 막 이용해 먹을 건데? 오늘도 봐 봐요. 별것 아닌 일로 무섭다고 막 붙잡고 늘어지고.”
얼떨결에 그녀에게 안긴 화희가 단단히 그녀를 감싸 안으며 어깨에 턱을 기댔다.
“얼마든지 마음껏 날 누리라니까요. 날 벗겨 먹어 주기까지 하면 더욱 고맙겠는데.”
“저기, 말해 줘서 고마워요.”
“사실은 아직도 말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뭔데요? 뭐든 말해요. 난 들을 준비가 되어 있…….”
“고귀한 신녀였던 당신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의 수아 씨가 훨씬 더 찬란해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잔뜩 쉬어 있었다. 과거를 떠올려서 흔들리는 건 오히려 그인 것처럼.
그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엉킨 인연의 실타래를 푸는 게 제일 필요할지도 몰랐다.
실타래를 풀면 그 안에서는 뭐가 나올까.
막연한 두려움이 불쑥 치밀자 그녀는 화희를 더욱 힘주어 안았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지금 확실한 건 그의 품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 * *
잠이 든 수아를 지켜보던 화희는 제 침실로 돌아와 억눌렀던 신음을 뱉어 냈다.
“하아…….”
상처에서 울컥 솟아난 피가 셔츠를 적시고 있었다. 검의 사념에 베인 상처가 그의 혼을 찢어 내는 중이었다.
신녀는 수호수를 지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해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신녀였던 수아가 전생의 기억을 각성하는 순간, 검에 남은 그녀의 사념이 그를 상처 낸 것이었다.
그런데 상처는 처음 생겼을 때보다 그녀가 천부신을 만난 순간부터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왜 사념이 천부신에게 더 크게 반응하는 거지?
화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부신 건설의 회장이자 천윤성의 아버지인 천부신을 되새겼다.
그놈이 황제였다니.
그가 이번 생을 그들과 살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전생을 기억하면서도 이제껏 정체를 숨기다 지금에서야 수아에게 접근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직도 오만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건가?
민철과 서태산을 통해 알아낸 그의 수상한 행보를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화희가 자신을 만들어 낸 첫 번째 아버지를 구체적으로 떠올리자 방 안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깜빡거리다 점멸했다.
어둠이 드리워진 허공에서 사념 중 하나가 머릿속에 벼락처럼 소리쳤다.
<내게는 신께 받은 사명이 있다. 너는 그것을 위해 하늘이 내리신 내 검이다!>
검은 싸라기눈처럼 흩날리던 사념들이 그가 천부신의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힘을 얻었다. 천 년 동안 그의 안에 묵혀 있던 천부신의 피가 기어 나오려고 발악했다.
수많은 생을 거듭하고도 완전히 없애지 못한 업이었다.
떠돌던 사념들이 어느새 크기를 불려 끈적끈적한 검은 오물 덩어리처럼 변한 사념에서 쑤욱 팔이 뻗어 나왔다.
화희가 손짓하자 사념은 쉽게 떨어져 나갔으나 순간 가슴에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신음을 억누르며 상처를 손으로 짚었다. 기다렸다는 듯 화희의 피를 뒤집어쓴 사념 덩어리가 ‘그녀’와의 마지막 밤이 되어 그를 집어삼켰다.
목에서 솟구친 붉은 피가 그를 흠뻑 적셨다. 그들을 쫓아왔던 금위군을 베어 낸 화희는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힐끗 수아를 돌아보았다.
‘괜찮습니까?’
도자기 인형처럼 희게 질린 얼굴로 금위군들의 시신을 돌아본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발 그만해요. 내게 더 이상 다른 이들의 목숨을 지우지 마세요. 당신의 도움을 받느니 차라리…….’
화희는 마지막까지 제 속을 긁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며 이를 갈았다.
‘나는 신부를 보내 주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대부터 살아야지요.’
궁을 빠져나오자마자 황제가 보낸 금위군이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화희는 끝없이 덤벼드는 금위군보다 제 욕심과 극한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녀를 보내기 싫었다.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놓고 싶었다. 하루만이라도 더 그녀를 제 마음껏 유린하고 싶었다.
화희는 제 손을 뿌리치려는 그녀를 잡아채 품에 끌어안았다. 수아가 그를 뿌리치려 버둥거리자 단검에 찔렸던 상처에서 울컥 피가 솟았다.
그는 역류한 피를 삼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떤 목숨도 해하지 않겠습니다. 이리 약속해도 신부는 나를 받아 주지 않을 겁니까?’
수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입술을 깨물며 금위군의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그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허탈해진 화희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왜 남의 목숨보다 자신의 목숨을 더 소홀히 대할까. 그러면서도 왜 나만은 가엽다 여겨 주지 않을까.
그가 놓아주자마자 그에게서 한 걸음 멀어진 수아가 원망스러웠다.
멀리서 들리던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연이어 금위군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화희는 산을 밝히는 횃불을 보며 그 반대쪽을 가리켰다.
“길 끝에는 그대를 기다리는 가마가 있을 겁니다. 산을 넘은 이후에는 절대 흔적을 남기지 마십시오. 내가 읽을 수 있으니.”
그의 말에도 그녀가 굳은 채 서서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화희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 단숨에 입술을 삼켰다.
자신에게 차디차기만 한데 여전히 입술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눈을 크게 뜬 채 뒤늦게 그를 밀어내는 그녀를 쉽게 놓아준 화희는 깨물려 피가 번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을 이었다.
“반드시 흔적을 남기지 마세요. 비를 찾는 것은 내 의지로 멈출 수 없으므로, 반드시.”
비틀거렸던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뒷걸음질 치다 휙 돌아섰다. 하마터면 그녀에게 손을 뻗을 뻔했던 그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말을 마쳤다.
“반드시 내가 당신을 쫓지 못하도록.”
차라리 그녀가 아니라 제 자신에게 하는 당부였다. 길 너머로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숨을 멈추고 있던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금방이라도 쫓아가 그녀를 잡을 것 같아서 상처를 손끝으로 후벼팠다. 격렬한 통증이 온몸을 짓눌렀다.
화희는 그녀가 간 길을 막아서며 피가 흥건한 검을 털고 자루를 고쳐 쥐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할 일이 남았다는 것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랐다.
* * *
수아는 한참 동안 뒤척이다가 결국 잠을 포기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백하게 질렸던 화희의 얼굴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는데. 혹시 내게 말하지 않은 일이 더 있나?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핸드폰으로 새벽 4시인 것을 확인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초조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니 집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몰래 자는 것만 확인하면 돼.
수아는 화희의 침실 쪽으로 살금살금 걸었다. 다행히 침실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순간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아 귀를 기울였다.
“하아…….”
화희가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놀란 수아는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침대 위에 모로 누운 화희가 보였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 그가 의식을 잃고 고통스러워할 때와 같았다.
그때처럼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설마 아픈 건 아니겠지?
“……화희 씨?”
수아는 괴로워 보이는 그를 깨우려고 그를 흔들었다. 그러다 그의 가슴팍이 흥건히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 손을 내려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이게 뭐지?
자세히 보려고 눈을 깜빡이는 순간,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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