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 *
“내 메일 주소는 어떻게 알았지?”
수아는 회사 메일을 열어 보고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초대장 메일이 한가득이었다. 선상 파티며 시사회, 기념식 등 초대 장소도 다양했다.
민철이 말했던 게 이런 거였나?
<민수아 씨 신상 정보를 막아 두긴 했는데 회장님께서 나서시는 바람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한동안 좀 성가실 텐데 전부 무시하시면 됩니다.>
선상 파티 초대장을 열어 보았던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호화로운 규모에 얼른 다른 초대장들과 함께 스팸함에 넣어 버렸다.
뜻밖에 화희의 사회적 지위가 와 닿은 수아는 잠시 멍해졌다. 단지 ‘화희’만 보고 결혼을 결심한 건데 의외로 극적인 신분 상승이라도 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내가 ‘이사님’과의 결혼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결혼 발표도 공식 석상에서 해야 할 정도니 그 외의 일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전생의 기억 때문에 그의 현실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무려 그는 ‘황태자’였었으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던 수아는 의외의 사실에 놀랐다. 전생의 일을 떠올려도 진절머리 치지 않는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더 이상 전생을 꿈꾸는 일도 없어졌다. 아마도 그에게 청혼한 이후쯤부터인 것 같았다.
마치 꿈들이 ‘목적’을 다했다는 듯 사라진 것처럼 느껴져서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수아는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혼이 ‘목적’이라니 그렇지 않다. 충동적으로 청혼했을지 몰라도 그녀는 분명 화희에게 깊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함께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갔다.
그래, 목적보다는 ‘운명’에 가깝지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위태위태하던 그녀의 삶에 불쑥 나타나 구원이자 반려가 되어 버린 남자라면.
운명이라니, 어쩐지 로맨틱하잖아?
혼자 얼굴이 새빨개져선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있던 수아는 화회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화들짝 놀랐다.
흠흠, 괜스레 헛기침까지 한 그녀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화희가 대뜸 물었다.
-혹시 내 생각 하고 있습니까?
“네? 어떻게 알…… 아니거든요? 이사님이야말로 내 생각 나서 전화한 거 아니에요?”
-질문이 틀렸어요. 언제 안 하냐고 물어야지.
“어, 설마 또 무슨 색깔 입었냐는 둥 그런 게 궁금해서 전화한 거라면 끊어 버릴 거예요.”
-수아 씨는 약속을 잘 안 지키는군요. 뭐든 다 대답해 준다면서.
“아니거든요. 나 약속 잘 지키거든요? 저기, 지금은 회사잖아요.”
-아, 회사라서 민 팀장은 대답할 수 없다? 그럼 이사님은 지금 출발할 테니 바로 퇴근해요, 민 팀장.
투덜거리던 화희가 제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 정말. 아직 퇴근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그보다 그런 게 대체 왜 궁금한 거지?
빨개진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핸드폰을 노려보던 수아는 이내 배시시 웃고 말았다.
퇴근 시간 30분 전부터 시계만 쳐다보던 그녀는 결국 10분 전에 사무실을 나왔다.
천천히 주차장으로 향하던 수아는 문득 길가에 꽂힌 나뭇가지들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할아버지는 뭘 이렇게 많이 꽂아 놓으셨지?”
정말 이런 나뭇가지들로 겨울에도 가시덩굴을 만들 수 있는 걸까? 비둘기 요양원에서부터 그녀를 지켜보았다는 걸 알게 되자 서 할아버지도 보통 사람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민수아 씨?”
수아는 바로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낯선 남자 목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60대 중반의 남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날 부른 건가? 이상하네, 바로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았는데?
의아하게 주변을 돌아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걸어왔다. 격식을 갖춘 정장에 매우 무게감 있는 분위기가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풍기는 기묘하게 기분 나쁜 향수 냄새도 맡아 본 적 있었다.
앞까지 걸어온 남자가 평가하는 것처럼 그녀를 위아래로 느릿하게 훑었다.
막 누구냐고 물어보려던 수아는 그의 시선에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낯선 상대를 무례하게 훑는 태도도 그렇지만 그의 눈빛도, 향수 냄새도 매우 꺼림칙했다.
입가에 비웃음 같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남자가 대뜸 물었다.
“내 아이가 혹시 아가씨와 있나?”
“아이요? 저, 그보다 누구시죠?”
“내가 누구냐고?”
그녀의 질문에 기가 막힌 듯 남자가 혀를 찼다.
당연히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태도에 수아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가 나무라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천윤성이 내 아들이지.”
그녀는 그제야 그가 왜 낯익은지 깨달았다. 엘리베이터 사고가 나기 전, 윤성과 함께 있던 남자였다.
수아는 얼떨떨하게 쳐다보다 마지못해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 그런데 윤성이에 대해서 왜 저한테 물으세요?”
“본래 얌전했던 아이가 아가씨와 어울리더니 되바라졌으니까.”
“네?”
어이가 없어 되묻던 수아는 윤성이 제 아버지를 싫어했다는 걸 떠올렸다.
거만한 눈빛과 하대하는 말투, 게다가 나와 어울려서 뭐가 어째? 설마 자기 아들인 윤성이에게도 이런 건 아니겠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짜고짜 이상한 말을 하실 거면 그만 가 보겠습니다.”
“허,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하긴, 본래 무지하고 나약하기만 했지 쓸모라곤 없었지.”
뭐라는 거지? 더는 못 들어 주겠다. 윤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이런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걸 봐서는 쉽게 알려 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착각인가 싶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불쾌한 냄새가 점점 진해져서 이젠 참지 못할 정도였다.
“뭐, 뭐라는…… 욱!”
애써 참으려 했지만 치미는 구역질에 입을 틀어막는 그녀를 본 남자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수아가 급히 되돌아서려는 순간, 갑자기 남자가 불쑥 손을 뻗었다.
“감히 어딜!”
막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려던 손이 닿았을 때 남자가 뭔가에 걸린 것처럼 휘청거렸다. 그의 발밑에 서 할아버지가 꽂아 놓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마치 그것을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움찔거리면서 나뭇가지를 노려보던 남자가 휙,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악의에 찬 눈빛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네년은 죄인이야!>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려 했던 수아는 소스라치며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벼락처럼 호통쳤다.
<너는 태손을 생산하는 그릇일 뿐이다! 한데 그 비천한 몸뚱이로 내 아들을 망치려고 들어?>
이, 이게 뭐지? 누구 목소리야?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들려오는 환청이 뾰족한 송곳이 되어 머릿속을 긁어내는 것 같았다.
“민 팀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
그때 환청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한 대리와 동료들의 목소리였다.
희게 질린 그녀는 이를 악물며 겨우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하, 한 대리님!”
“어, 민 팀장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요.”
악의 서린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나자마자 고막을 찢을 듯 들려오던 환청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참았던 숨을 내쉰 수아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한 대리 일행에게 달려갔다.
* * *
‘일어나요, 원장님! 나, 무섭단 말이에요. 일어나요!’
어린 윤성은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원장님을 흔들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
붉은 피가 잔뜩 묻은 제 손이 싫어서 바지에 문질렀지만 원장님을 만질 때마다 도로 묻어 버려서 소용이 없었다.
‘흐윽…… 내가 이럴 거라고 그랬잖아요. 무서운 아저씨들이…… 깜깜할 때…… 원장님을 마, 막, 때릴 거라고……. 내가…… 내가 그랬잖아요…….’
윤성은 어젯밤 꿈에서 이렇게 쓰러진 원장님을 보았었다. 너무 무서워서 원장님한테도 말하고 선생님한테도 말했지만 무서운 꿈을 꿨을 뿐이라면서 아무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랬는데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 밤중에 몰래 숨어들어 와서 원장님을 때렸다.
소리 높여 우는 윤성을 누군가 번쩍 들어 올렸다. 원장님을 때린 남자들이었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린 남자와 눈이 마주친 윤성은 눈을 질끈 감고 버둥거렸다.
‘아앗, 놔요! 으아앙!’
그는 자신을 잡아챈 남자가 무서워서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코도 비뚤고 눈도 찌그러진 얼굴도 무서웠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자 또 이상한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말해 봐, 꼬마야. 네까짓 게 우리가 올 줄 미리 알았다는 거냐?’
남자가 말할 때마다 이상한 냄새가 풍겨서 윤성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소리쳤다.
‘왜, 왜 그랬어요? 우리 원장님이 뭘 잘못했어요?’
‘좋을 말로 할 때 얼른 팔았어야지. 왜 금싸라기 땅을 깔고 앉아서 이딴 고아 새끼들이나 기르냐고.’
뒤에서 누군가 웃으면서 대답하자, 삐뚤어진 얼굴을 한 남자가 힐끗 노려보았다.
그는 윤성을 가볍게 흔들면서 물었다.
‘정말 우리가 올 줄 알았다고? 어떻게?’
‘흐윽…… 꾸, 꿈에서……. 근데 그냥 무서운 꿈이라고 그랬는데…….’
‘그래, 또 뭐가 보이지?’
윤성은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기 싫어 고개를 흔들었지만 자신을 쏘아보는 남자의 찌그러진 눈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예, 예쁜…… 누나를…….’
안 돼, 대답하지 마! 그 사람은 살인자야!
“안 돼!”
제 고함에 놀란 윤성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떴는데도 깜깜한 어둠에 잠겨 아직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마른 제 양손을 더듬거리고 나서야 꿈이라는 걸 알았다.
하다 하다 이젠 이런 꿈까지 꾸는구나.
너무나 생생해서 기억처럼 느껴질 정도인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일그러진 얼굴의 남자는 누구이며, 왜 어린 자신이 피 웅덩이 한가운데 있는 건지.
꿈의 여운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멍하니 낯선 천장을 노려보고 있던 윤성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에 검은 형체가 그림자처럼 우뚝 서 있었다.
“으악!”
기겁하며 윤성이 비명을 지르자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그림자가 그에게 천천히 팔을 뻗었다.
막 ‘그것’의 손이 닿기 직전 윤성은 몸을 날려 협탁 위의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저리 안 꺼져!”
움찔한 검은 형체가 한 발 뒤로 물러나면서 가냘픈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너무해. 역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맞는 거야?”
낯익은 목소리에 놀란 윤성은 급히 들고 있던 스탠드를 켰다. 주황색 불빛에 눈이 부신 듯 눈살을 찌푸린 해린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윤성은 안도하는 한편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노려보며 버럭 소리 질렀다.
“대체 한밤중에 남의 방에서 뭐 하는 짓이야?”
그에 해린도 지지 않고 마주 악을 쓰며 대꾸했다.
“옆방에서 자고 있는데 네가 비명을 질렀잖아! 누가 전화해도 안 깨래?”
“그, 그렇다고 여자애가 밤중에 남자 방 문을 따고 들어와?”
“네가 남자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너랑 나랑 몇 살 차이나 난다고 애 취급이야?”
“네가 그렇게 보이는데 어쩌라고, 그럼!”
“그렇게 보이는 건 또 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뿐이야? 이젠 손에 피까지 잔뜩 묻혔더라?”
악을 쓰던 윤성은 해린이 방금 꾼 꿈을 본 것처럼 말하자 당황해서 멈칫했다.
“내, 내 꿈을 봤어?”
“말했잖아. 그런 게 보인다고.”
“그렇다고 남의 꿈까지 볼 수 있다고? ……너, 너 대체 뭐야?”
코웃음 친 해린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투덜거렸다.
“꿈은 개뿔. 기억이던데.”
인상을 쓰며 윤성이 노려보자, 그녀는 그의 손에서 스탠드를 빼앗아 껐다 켰다 손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해린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다그쳤다.
“그게 내 기억이라고? 거, 거짓말. 그럼 그 남자는 대체 누구…….”
“난 전생에 고양이였어.”
“뭐?”
대답 대신 불쑥 윤성의 말을 끊은 해린이 스탠드를 협탁 위에 내려놓고 인상을 썼다.
“예쁘고 귀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날 불꼬챙이로 지지고 털을 뽑았어. 거꾸로 매달아 놓고 굶기기도 하고. 때리는 건 예사였지.”
느릿한 말투로 회상하듯 말하던 해린이 문득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랬는지 알아?”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은 윤성은 어이없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고양이였다고?”
“왜 그랬는지 아냐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재미로 그랬어. 단지 그 이유야.”
“고양이였던 게?”
“자꾸 멍청한 소리 할래? 말도 못하고 힘도 없는 고양이를 잡아다가 죽기 직전까지 괴롭힌 이유 말이야. 재미로 그랬다고.”
“…….”
“그런데 그 아저씨는 누구야? 널 쳐다보는 눈빛이 그 사람들이랑 똑같았어.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하던 못생긴 아저씨 말이야.”
윤성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해린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이, 제 꿈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어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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