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수아를 아는 것 같아서 함부로 할 수도 없고. 윤성이 노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은 여자가 갑자기 차를 출발시키는 바람에 그는 창문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윽, 조심해!”
“아, 실수. 이미 터진 만두 같은 얼굴이 더 터진 건 아니겠지?”
추운 날씨에 냄새난다면서 컨버터블 천장까지 오픈한 여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얼얼한 머리를 어루만지며 그녀를 노려보던 윤성은 이내 몸에서 힘을 빼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갈 데도 없었다. 오늘은 차라리 이 이상한 여자가 민수아에 대해 지껄이는 소리를 캐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저 잡초, 민수아가 키우는 거다? 몰래 가져오느라 힘들었어. 이상하게 그 언니 건 탐이 나더라고. 하지만 화희 오빤 아니야. 잘생겨서 그런 거야. 오빠한테는 되게 좋은 냄새도 나.”
“……하아, 뭐라는 거야.”
“음, 자세히 보니까 너도 잘 크면 되게 멋있겠구나. 제대로 커서 우리 오빠 약 좀 올려 봐, 그런 고약한 눈초리만 하지 말고.”
찬 바람에 얼굴이 얼어붙는 것 같아서 욕설을 짓씹은 윤성은 잠깐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뛰어내릴까? 여자가 끝도 없이 재잘대는 소리에 가뜩이나 복잡하던 머릿속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민한 게 무색하게도 어느새 윤성은 정신없이 만두를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제 앞에 놓인 만두 판이 벌써 두 판째였다.
그러고 보니 하루를 꼬박 굶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모르는 여자와 이럴 수가.
윤성은 만두를 노려보다 수치심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만두를 돈가스 칼로 조각내서 오물오물 먹던 여자가 창피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를 쳐다보고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만두를 이렇게나 맛있게 먹는 사람은 처음 봤어. 너한테 만두 사 주는 게 되게 착한 일 한 것 같아서 뿌듯해. 반가워, 나는 주해린이야.”
“……시끄러워.”
“내 만두도 그렇게 맛있게 처먹어 놓고 매너 없이 그럴 거니? 네 이름은 뭐야?”
“……천윤성.”
겨우 이름을 뱉은 후 멋쩍어서 물을 마시며 헛기침을 한 그는 뒤늦게 제일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민수아랑은 무슨 사이야?”
“아, 나는 화희 오빠 전 피앙세고 수아 언니는 오빠의 현 피앙세야.”
“뭐? 피앙세?!”
놀란 윤성은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뱉을 뻔했다. 코를 찡그린 해린이 던지듯 건네준 냅킨을 빼앗아 입가를 닦은 그는 다그치듯 캐물었다.
“그거 민수아도 알아?”
“응. 근데 재미없게 질투도 별로 안 해 주더라? 드라마 같은 막장을 기대했는데, 좀 시시했어.”
“하, 박화희가 대체 뭔데 약혼녀가 널렸어? 그놈이 혹시 민수아한테 이상한 수작 부리는 건 아니겠지?”
“수작은 무슨. 오빠는 언니가 좋아서 사족을 못 쓰는걸? 옆에서 보면 가끔 안쓰럽다니까. 가슴에 구멍이 나고도 싫은 기색 하나 못 하고.”
“구멍?”
“응, 수아 언니가 칼로 푹 찔렀거든. 진짜 아프겠더라.”
물컵을 든 채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던 윤성은 사레가 들려 이차로 물을 뿜었다. 질색한 해린이 몸을 뒤로 물리며 벌컥 화를 냈다.
“아, 더럽게! 입이 분수도 아니고 왜 자꾸 물을 뿜어?”
“네,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잖아! 민수아가 뭘 어쨌다는 거야?”
“뭐, 언니가 실제로 그랬다는 건 아니야. 그냥 그런 게 보인 거지.”
“……보였다고? 어떻게?”
“난 가끔 남들이 못 보는 걸 보거든. 기억처럼 막 자세히 보일 때도 있고 그냥 장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갈 때도 있고.”
멈칫한 윤성은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자신이 겪는 증상과 비슷하게 들렸다.
“왜 그런 건데?”
“나야 모르지. 보이는 대로 열심히 쫓아가 보니까 수아 언니가 있더라고. 어라, 근데 넌 내 말을 믿어?”
환청과 환영의 끝에 민수아가 있다. 윤성은 그녀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고민하던 찰나에 작은 실마리를 발견한 것 같았다.
“안 믿을 건 또 뭐야? 너만 그런 것도 아닌데.”
“어머, 너도 그래?”
해린이 반색하며 얼굴을 들이밀자 그는 뒤늦게 제가 한 말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누가 그렇대?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흐응, 어쨌든 다행이네. 내 말을 안 믿으면 확 저 사람들에게 넘겨 버리려고 했는데.”
저 사람들? 해린이 손짓하는 곳을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던 윤성은 못 본 척 도로 시선을 돌렸다. 식당 밖에서 핸드폰으로 이쪽을 찍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부신의 수행원이었다.
밖을 곁눈질한 해린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닥였다.
“너 쫓기는 거지? 우리 집에 안 쓰는 방 되게 많은데 숨겨 줄까?”
“뭐?”
“아, 결정했어. 오늘은 착한 어른이가 되기로.”
“뭐라는…… 야, 이거 안 놔?”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해린은 질색하는 그를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다.
30분 후, 윤성은 기가 막혀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억지로 그를 데려온 곳은 자그마치 호텔이었다.
먼저 내려서 차 키를 발레파킹 직원에게 맡긴 해린이 차 안에서 꼼짝 않는 윤성을 들여다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어머, 응큼하게 무슨 생각하는 거야? 여기 우리 집이야. 이거 내 거거든.”
내 거? 윤성은 호텔과 그녀를 번갈아 보다 어이없는 한숨을 뱉었다.
이 이상한 여자가 JU호텔 체인 상속녀였어?
멋쩍어서 마른세수를 하며 머뭇거리던 그는 잠시 고민하다 차에서 내렸다.
해린이 제 문제의 실마리가 될지, 그저 이상한 여자일 뿐인지 전혀 짐작이 안 됐지만 따로 선택지가 없었다. 그저 이끌리는 대로 가 보는 방법밖에는.
* * *
“저기, 잠깐 할 말이 있…….”
화희를 찾으며 피트니스 룸의 문을 열었던 수아는 멈칫 소리를 죽였다. 방 한가운데서 검은 도복을 입은 화희가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할 말이 있어 그를 찾았는데 보이지 않아 이 실장에게 물었더니 별채의 이곳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뜻밖의 그의 모습에 하려던 말은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복이 저렇게 눈에 띄는 옷이었나?
검은색 도복을 걸친 그는 큰 키와 넓은 어깨, 긴 다리가 도드라져서 유난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반대로 흘러내린 앞머리, 살짝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희고 긴 목과 쇄골 때문에 평소와 다르게 흐트러져 보이기도 했다.
참 잘생기긴 잘생겼구나. 그냥 잘생긴 게 아니라 섹시하기까지 하…….
섹시? 수아가 자신의 생각에 기겁하는 순간, 검을 휘두르던 화희가 가슴팍을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만 빼꼼 내밀고 훔쳐보듯 지켜보던 수아는 놀라 큰 소리로 물었다.
“어디 아파요?”
고개를 들어 힐끗 이쪽을 쳐다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나 싶었는데 어느새 그가 바로 앞에서 목검으로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상대가 무기를 들고 있으면 무조건 경계를 해야죠.”
“상대 나름이지 않을까요?”
수아가 얼떨결에 쳐다보자 화희가 목검의 끝을 살짝 흔들며 물었다.
“날 믿는다는 겁니까?”
“이사님이 맨손이고 내가 총을 들었어도 이길 재간이 없으니까 그렇죠.”
“이기라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방어를 하란 말이잖습니까.”
“항복. 무조건 항복이요.”
수아가 귀찮다는 듯 두 손을 들자 못마땅하게 눈썹을 치켜세운 화희가 목검의 손잡이 쪽을 내밀었다.
“자, 그럼 무기를 들고 나한테 덤벼 봐요. 제대로 가르쳐 줄게요.”
“싫어요. 절대 그건 안 잡을 거예요.”
장난으로라도 그에게 검을 겨누기 싫었다. 몸서리치며 질색하는 수아를 쳐다보던 그는 목검의 끝으로 그녀의 목선을 따라 스치듯 내리며 빈정거렸다.
“이래도?”
가만히 내버려 두자 목검이 쇄골 아래, 옷 위로 어깨선을 따라 팔까지 쓸어내렸다. 수아는 제 몸을 더듬듯 스치는 검날을 밀어냈다.
“뭐 하는 거예요?”
“보면 모릅니까? 수아 씨를 희롱 중입니다.”
“왜요?”
“자신을 방어할 의지가 없으니 동기를 부여해 주는 거죠.”
“동기보단 투지가 이는데요?”
“좋지요, 투지. 싸울 때는 무조건 상대를 조져야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어설픈 반항은 상대를 자극시킬 뿐이니까. 자, 바로 이렇게.”
화희가 약 올리듯 혀로 제 입술을 쓸면서 검끝을 옮겨 그녀의 허리선을 훑었다. 아무리 옷 위라도 검끝이 지나가는 자리에 그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당황한 수아는 다시 날을 밀쳐 내며 그를 흘겼다. 검끝이 닿은 것도 그렇지만 흐트러진 그의 목선에 자꾸만 시선이 가서 곤란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만하는 게 어때요?”
“싫은데요, 상대의 어설픈 반항에 지금 자극받는 중이라서. 계속 짜증만 내 보실까요? 더욱 확실한 자극이 될 테니까.”
검끝이 그녀의 배를 노골적으로 더듬자 울컥한 수아는 검날을 휙 잡아챘다. 그러나 화희가 기다렸다는 듯 검을 세게 끌어당기는 바람에 엉겁결에 그쪽으로 몇 걸음 끌려가 버렸다.
“……어?”
비틀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아 준 그가 비웃는 것처럼 턱 끝으로 내려다보았다.
“봐요. 어설픈 반항을 하니까 당신을 호시탐탐 노리는 남자의 품에 떨어졌잖습니까. 항복했으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됩니까?”
검을 바닥에 집어 던진 그가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키스할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향한 그의 야릇한 눈빛에 사로잡힌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얼떨결에 그를 마주 보고 있던 수아는 급작스럽게 가까워지는 그의 입술을 보며 질끈 눈을 감았다.
촉, 그러나 그의 입술은 허무하게도 이마에 스치듯 닿고 금방 멀어졌다.
키스를 기대한 것처럼 눈까지 감았던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그를 흘겨보았다. 약이 올라서 맨발로 그의 발을 밟으려 했지만 픽 웃은 화희가 그녀의 몸을 휙 돌려 뒤에서 팔과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올려놓은 그가 나지막이 귓가에 속삭였다.
“시도는 좋았지만 하이힐을 신었다면 몰라도 지금처럼 슬리퍼일 때는 아무리 세게 밟아도 소용없어요.”
“진짜 이럴 거예요?”
“싫으면 재주껏 도망쳐 보시죠. 나는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 있으니까.”
귓불을 스치는 그의 숨결은 물론이고 등 뒤로 빈틈없이 닿은 남자의 몸이 적나라하게 느껴지자 그녀의 얼굴은 점점 달아올랐다.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지? 가슴은 왜 이렇게 넓고 단단해?
혼자 그를 의식하는 게 약이 오른 수아가 열심히 버둥거렸으나 화희는 오히려 그녀의 몸을 꽉 옭아맸다.
“가, 간지럽단 말이에요!”
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제 어깨를 쓰다듬기 시작하자 어쩔 줄 모르던 수아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어깨 부분을 꽉 물었다 놓았다.
“……읏.”
짧은 숨을 뱉은 그가 흠칫한 사이, 그녀는 팔꿈치로 그의 가슴팍을 툭 쳤다. 짧게 신음을 흘린 화희는 의외로 쉽게 그녀를 놔 버렸다.
깜짝 놀란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하, 물린 데가 짜릿해서 정신을 못 차리겠네요.”
정말 아픈 것처럼 들렸는데. 걱정스럽게 그를 살피던 수아는 어이가 없어져 쏘아붙였다.
“나도 되게 효과적인 호신술 하나 알아요. 엄마한테 배운 건데, 변태를 만나면 힘껏 세 번째를 발로 차거나 정 안 되면 쥐어짜랬어요.”
“세 번째?”
“세 번째 다리요.”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 한쪽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던 그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그건 좀 기분 나쁜데요. 아무리 비상시라도 다른 놈을 만지다니.”
“있는 힘껏 차라고 들었으니까 더 이상 ‘놈’이 아닐 거예요.”
“……아, 봐줘서 참 고맙군요.”
“그만 가 볼게요. 하던 거 마저 하세요.”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나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아는 매트 위에 누운 채 그에게 깔려 있었다. 그가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눈을 접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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