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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60화 (60/100)

60화

아슬아슬한 죽음의 경계선에서 섰던 그녀는 비둘기 요양원에서 가까스로 안정을 찾았다. 그것이 화희가 배려한 결과라는 걸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의 존재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녀는 화희에게 지켜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했어요?”

수아의 누그러진 어조에 의심하듯 눈썹을 치켜세운 화희가 천천히 손가락을 꼽았다.

“당신이 뭘 입었는지, 뭘 먹었는지, 얼마나 먹었는지. 여가 시간에는 뭘 하는지, 좁은 요양원에서 일만 하면 답답하지는 않은지. 누구와 어떤 말을 하고 또…….”

“아, 됐어요. 그만해요.”

“아직 반도 안 했……. 수아 씨가 먼저 물었잖습니까?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그저 괜찮냐고만 물었지 오늘 빼고 자세히 물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럼 오늘은 왜 물어봤었어요? 궁금하면 나한테 직접 전화해서 물으면 되잖아요.”

“그야 한강에선 그렇게 달콤하더니 또 나를 피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건 내가 수줍……. 아, 이제 안 그래요, 진짜. 약속할게요.”

“뭘 약속합니까?”

화희가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그녀에게 기울였다. 수아는 점점 붉어지려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궁금할 때마다 직접 물으면 언제든지, 어디서나, 무엇이든 성실히 답할게요.”

굉장히 난해하고 곤란한 말을 들은 것처럼, 화희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았다.

“……이상한데.”

“뭐가요?”

“나 안심시켜 놓고 또 폭탄 던지는 거 아니겠죠?”

“내가 무슨 적군이에요, 폭탄을 던지게?”

“아군도 아니잖습니까. 내 마음에 상처 입히는 건 당신밖에 없는데.”

“그건…….”

“됐습니다. 그냥 여기까지 하죠. 아무 때나 어디서나 언제든지 내가 직접 수아 씨에게 궁금한 걸 물어도 좋은 걸로 마무리합시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행복한 이야기니까. 자, 어서 먹어요.”

화희가 묘한 표정으로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젓가락을 손에 쥐여 주었다.

그녀가 먹는 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보던 화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불쑥 물었다.

“그럼 밤에 전화해도 됩니까? 수아 씨가 방에 쏙 들어가 버리면 또 궁금한 게 생기거든요.”

“그 밤에 대체 뭐가 궁금해서요.”

“어디까지 벗고 자나 궁금해서…….”

“아, 뭐래요!”

버럭 짜증을 낸 수아가 먹던 초밥을 당장 내려놓았으나 화희는 더없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궁금하면 다 물어보라면서요. 나는 아무래도 동정적인 남자니까 그런 게 제일 궁금합니다. 수아 씨는 무슨 색의 속옷을 주로 입나, 잘 때는 얼마만큼 벗고 자나, 샤워할 때는 아래랑 위 중에 어디부터 벗나…….”

“야!!”

결국 수아는 젓가락을 집어 던지고 말았다. 어깨를 으쓱한 화희는 탁자 위에서 새 젓가락을 뜯어 주며 싱글싱글 웃었다.

* * *

민철과 서태산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지?

그들은 각자 다른 곳에서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다가 막 화희에게 불려 온 참이었다.

제대로 쓰지도 않는 요양원 이사실에서의 회합은 무려 ‘민수아의 야근’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그녀의 일이 끝날 때까지 화희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은 의문과 불만이 가득한 눈빛을 주고받다가 화희가 돌아보자 얼른 아닌 척 표정을 바꿨다.

그가 겉으로 기분이 좋아 보여도 민수아의 반경 이내뿐이었다. 근래 그녀에게 일어난 일들로 심기가 비틀린 상태로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릴 거라는 건 서태산을 봐서 알 수 있었다.

왜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도 화희에게 꼼짝 못 하냐고 물었더니 무시무시한 대답이 돌아왔다.

<한 700년 전인가? 자기 신부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거절했지. 그랬더니 열일곱 번 생에 걸쳐서 꼬박꼬박 내 분신의 허리를 분지르더라고.>

<분신이요?>

<있어, 저기 어디 산골짝에. 남자가 허리를 못 쓰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내가 진짜…….>

과거를 회상하면서 괴로움에 말도 채 끝내지 못했던 서태산과의 대화를 떠올린 민철은 자세를 더욱 바로 했다.

“알아보라는 건?”

화희의 질문을 받은 서태산이 얼굴을 찌푸리며 변명하듯 투덜거렸다.

“시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묻나? 서울만 해도 부신 건설이 지은 건물이 수십 개가 넘는데. 게다가 어찌나 기운이 더러운지 가까이만 가도 숨이 막혀서 곤란하다고.”

“기운이 가장 깨끗한 곳과 더러운 곳을 찾아. 그중에서 뭐가 나올 거 같으니까.”

“저기, 내가 좀 바쁜데. 김 할매가 눈꽃 열차 타 보고 싶다고 해서 예약해야 해서. 그거 해 주면 내가 기꺼이……?”

“일부터 제대로 해. 부신 건설이 박 회장에게 접근한 것도, 그 아들놈이 수아 씨 주위에 얼쩡대는 것도 그렇고 우연치곤 수상해. 일이 틀어지면 네놈부터 족칠 거야.”

화희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뜬 서태산이 허공에 검지를 흔들며 질색했다.

“그게 왜 내 탓…… 아, 아들놈이라면 얼마 전 주차장 사고 때, 그 잘생긴 녀석 말하는 건가?”

“이상하게 그 애송이와 있으면 수아 씨에 관한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 잠깐, 그놈이 잘생겼다고?”

“암, 참 잘생겼지. 김 할매도 녀석이 귀티 나게 생겼다고 엄청 좋아하던데? 사춘기라 삐딱해서 그렇지 크면 꽤 멋진 놈이 될…… 왜? 왜 그런 무서운 눈깔로 날 째려봐!”

“…….”

“큼큼, 가끔 그런 종자가 있긴 하지. 자기 운명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종자. 그래서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아무래도 엮이게 되면 옆 사람까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빌어먹을, 성가신 놈.”

“오, 네가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있구나.”

입 안으로 험한 욕을 짓씹는 화희를 보며 서태산이 껄껄껄 웃다가 사레가 들려 격한 기침을 쏟아냈다.

무서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할 말 다 하는 서태산을 보면서 민철은 속으로 ‘리스펙’을 외쳤다.

그러나 다음은 제 차례였다.

화희의 시선을 받은 민철은 얼른 서류 가방에서 파일을 꺼냈다. 그러나 화희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턱짓하자 그는 대충 내용을 읊었다.

“부신 건설의 실세로 알려진 천부신은 외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세히 알아내려면 흔적이 남는데 괜찮을까요?”

“내가 따로 볼 생각이니 둬. 천윤성은?”

“가끔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출 뿐 사업에 관여한 흔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비공식적으로 천 회장의 후계자로 내정된 자도 따로 있답니다.”

조사한 바로 천윤성은 집안을 빼고는 그저 평범했다. 그런데 특이하다고? 민철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서태산에게 물었다.

“그런데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겁니까?”

“반대지. 타고난 사주가 없으니 이리저리 헤매는 것에 가까워. 강한 사주를 타고난 이에게 얽매이는 건 오히려 그쪽일걸? 본인이 단단히 마음먹기 전에는 그냥 빈 그릇 같은 거니까. 뭘 담느냐에 따라서 그릇의 용도가 달라지는 거야.”

못마땅한 기색으로 서태산을 노려보던 화희가 핸드폰에 온 문자를 확인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민수아의 야근이 끝난 모양이었다.

그를 훑어보던 서태산이 문득 놀란 것처럼 가슴팍을 가리켰다.

“자네, 안색이 좋지 않은데? 혹시 그 상처 때문인가?”

민철은 겉보기엔 멀쩡한 화희를 살피다가 서태산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뼈가 수십 조각 났는데도 흔적도 없이 낫는 분인데요?”

“사념에 당해서 혼이 상한 건 육체랑 상관없지. 사념의 주인에게 낫게 해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을걸.”

“허튼소리 집어치워.”

서태산의 말을 일축한 화희가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서 걸어 나갔다. 방금 전까지 악덕 사장처럼 둘을 쥐어짜던 기색은 전혀 없이 금세 목소리가 솜사탕처럼 나긋나긋해졌다.

“끝났습니까? 수아 씨를 기다리는 시간도 수아 씨 같네요. 달콤했다가 애가 탔다가. 여보세요? 수아 씨? 지금 내 말 무시한 겁니까?”

덩그러니 주인 없는 방에 남겨진 둘은 서로를 허무하게 마주 보았다. 서태산이 코웃음 치며 중얼거렸다.

“누가 팔불출 아니랄까 봐. 참 웃기는 종자야, 저 종자도.”

민철은 말없이 동의하며 멋쩍게 코를 긁으면서 대꾸했다.

“이사님의 운명은 그냥 민수아 씨인 겁니까?”

“그런 것 같네. 어차피 자기 인생은 자기가 정하는 거니까. 자네도 이제 그만 저 종자에게 목매고 제 짝 좀 찾아. 노총각 냄새가 슬슬 나기 시작해.”

“예?!”

기겁한 민철이 제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는 사이 서태산은 ‘김 할매’를 흥얼거리며 바삐 나갔다.

이제 이사실에 민철만 덩그라니 혼자 남았다. 그의 평화로운 저녁 시간은 그리 마무리되었다. 외롭게 노총각 냄새를 풍기면서.

* * *

환청에 이어 환영까지, 나는 미쳐 가는 건가? 아니라면 그건 대체 뭐지? 아버지는 버젓이 집에서 사람을 죽인 게 맞는 걸까?

그는 왜 박화희에게 집착하는 거지? 정말 박화희는 민수아를 살릴 수 있는 건가?

수많은 물음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혼란이 지나쳐 어지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윤성은 꼬박 하루를 차 안에 앉은 채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스스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도망을 치든, 자신이 미쳤다는 걸 인정하든.

그는 자신의 일인 환청부터 자세히 더듬어 보았다. 어렴풋이 떠올랐던 환청과 환영을 멍청하게도 소설의 영감인 줄 알았던 때, 그것이 시작된 건 2년 전이었다. 민수아를 처음 만났던, 그쯤.

따져 보니 그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은 모두 그녀와 연관되어 있었다. 환청도, 박화희도, 아버지도. 그리고 이런 지경에서도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까지.

결론은 명확한데 원인이 불분명했다. 대체 뭘 알아내야 하는 거지?

충동적으로 요양원에 도착해 막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린 윤성은 수아가 있을 본관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보라색 털코트를 입은 여자가 하늘하늘 걸어오다 그의 앞에서 멈춰 섰다.

“문 좀 열어 줄래요?”

“……뭐?”

생각을 방해받은 윤성이 인상을 쓰고 되물었는데도 그녀는 태연하게 양손에 각각 하나씩 든 작은 화분을 눈짓했다. 화분엔 잡초처럼 생긴 풀들이 심어져 있었다.

“보다시피 손이 없어서.”

기가 막힌 윤성은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앞을 막아선 여자가 눈짓으로 제 핸드백을 가리키며 졸랐다.

“내 예쁜이 배 속에서 차 키 좀 꺼내 달라니까요.”

“그것들을 내려놓고 열면 되잖아.”

“그럼 이걸 들어 주든지. 어서, 빨리, 부탁해. 흙 묻을까 봐 무섭단 말이야.”

윤성은 자신의 앞을 고집스레 막아서면서 재촉하듯 발까지 구르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얻다 대고 수작질이냐고 대거리라도 하고 싶었지만 수아의 요양원이라는 걸 상기하고 꾹 눌러 참았다.

결국 그는 여자의 어깨에 걸린 손바닥만 한 핸드백을 열어서 차 키를 꺼내고 문까지 열어 주었다.

“고마워.”

문이 열리자 반색한 그녀는 뒷좌석 바닥에 화분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물티슈를 꺼내 손을 닦았다. 대체 잡초 가지고 뭐 하는 짓이야?

그 모습을 어이없이 쳐다보던 윤성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키를 던져 놓고 돌아섰다.

차 바닥에 떨어진 키를 주운 여자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문 열어 준 건 고마운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꽤 건방지네? 나보다 건방진 건 화희 오빠 말고 되게 오랜만이야.”

“기껏 도와줬더니 뭐라는 거야.”

“흠, 근데 너 이상한 냄새가 난다? 그런 기분 나쁜 냄새는 대체 어디서 묻히고 다니는 거야?”

“……뭐?”

윤성은 순간 부신에게서 나는 썩은 내를 떠올리고 흠칫했다. 생글거리며 그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돈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은 왜 또 먹다 만 만두 꼴이야? 잘생긴 얼굴을 누가 이렇게 해 놨어?”

“남이사. 더럽게 시끄럽네.”

“흐응, 너 민수아 만나려고 왔지?”

여자를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윤성은 뜻밖의 이름에 훽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민수아를 알아?”

“당연히 알지. 우린 전부 그 여자한테 자석처럼 끌리게 되는 건가 봐. 그러니까 빚지고 살면 안 되는 건데.”

“무슨 소리야? 민수아가 뭐?”

“근데 오늘은 민수아 만나지 마. 화희 오빠가 있거든. 수작 부리다 들키면 콱 물릴걸? 오빠가 요즘 기분이 아주 안 좋아.”

이 여잔 뭐야, 대체. 이상한 데다 제멋대로였다. 민수아가 이런 안하무인을 곁에 둘 리가 없는데 무슨 사이인 거야?

뜬금없는 소리를 캐물으려고 윤성이 한 발 다가섰는데 그녀는 혼자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것도 닿기 더럽다는 듯 물티슈를 손에 대고서.

“터진 만두 같은 네 얼굴 보니까 갑자기 만두 먹고 싶다. 같이 먹자, 사 줄게.”

“이거 안 놔?”

“움직이지 마, 냄새난단 말이야! 어우, 우리 귀여운 똘똘이한테 냄새 배면 어쩌지?”

보기엔 말라 보이는데 힘이 더럽게 셌다. 어어, 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차에 끌려서 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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