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Part. 7 뜻밖의 붉은 바람
* * *
“사소한 일이라도 박화희에 관한 건 빠짐없이 알리라 했을 텐데, 왜 말하지 않은 게냐!”
노기 어린 목소리로 부신이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갑자기 부신의 서재로 호출당했던 윤성은 컴퓨터 모니터에 뜬 CCTV 영상을 보고 얼어붙었다. 흐릿한 화면 속, 엘리베이터 안에서 수아와 자신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숫자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놀라서…… 윽!”
그가 이를 악물고 변명하듯 중얼거렸으나 부신은 가차없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아버지와 민수아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 방황했던 마음은 부신의 흉폭한 매질에 산산히 부서졌다.
괜찮으냐고 한 마디만이라도 물었다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을까?
어째서 아들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보다 박화희에 관한 일이 더 중요한가. 슬프기보다 당황스러웠고, 억울해서 분노가 복받쳤다.
부신이 여러 차례 지팡이를 휘두르자 이를 악물고 버티고 섰던 윤성은 결국 바닥을 나뒹굴었다.
한쪽에서 그가 맞는 꼴을 지켜보고 있던 부신의 수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자세한 건 다른 CCTV들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다행히 부신 소유의 건물이라 그쪽에서는 비밀 CCTV까지는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부신의 행동을 말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을 내세우기 위한 그의 표정에는 윤성에 대한 비웃음이 명백했다.
부신은 권 실장의 만류에도 눈을 번뜩이며 윤성에게 소리쳤다.
“네놈이 좋은 기회를 놓쳤어! 화희가 무슨 수를 써서 그 계집을 살렸는지 알아냈어야지!”
고통스러운 신음을 억누르던 윤성은 흠칫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화희? 부신이 익숙하게 부르는 이름이 소름 끼쳤다. 게다가 민수아에게 무슨 수를 쓰다니? 그 자리에 있던 그조차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던 일을 부신은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윤성은 혼란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제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습니까? 대체 바, 박화희가 누군데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쓸모없는 놈! 네까짓 게 질문이 가당키나 하더냐!”
된통 가슴팍을 걷어차여 책상 아래에 부딪힌 윤성은 숨이 막혀 기침하다 순간 멈칫했다.
손에서부터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섬뜩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제 손에 으스러지는 검붉은 가루를 내려다보던 그는 책상 바닥의 틈 아래, 검은 얼룩을 발견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얼룩은 미처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갑자기 온몸이 짓눌리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뿌옇게 번졌다. 흐릿한 시야로 부신이 페이퍼 나이프를 들고 다가오는 것이 뻔히 보였다.
어떻게든 도망가려고 했으나 굳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부신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나이프로 그의 목을 그었다. 무딘 칼에 살이 갈리는 느낌이 끔찍했다.
어떻게든 목을 감싸려 했으나 뜨거운 피가 손가락 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이런, 권 실장이 섭섭해하겠구나. 좋은 것만 처먹은 네 장기를 잔뜩 고대하고 있던데. 이제 못 쓰니 아깝게 되었어.>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 부신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든 움직이려 안간힘을 쓰던 윤성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굳었던 몸이 풀리면서 막혔던 숨이 터지자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또렷해졌다.
목에서 솟구치던 피도, 죽음에 다다른 끔찍한 공포도 사라졌다. 기겁한 윤성은 부신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했다. 페이퍼 나이프가 아닌 지팡이였다.
화, 환청처럼 환영이었던 건가?
전에 없이 또렷한 환영은 마치 이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 같았다.
충격으로 부들부들 떠는 윤성에게 부신이 악의 어린 비난을 퍼부었다.
“어째서 네놈은 축생과 다를 바가 없는 거냐? 네놈의 무능을 여태 참고 기른 시간이 아깝구나!”
오래전에 포기한 부정이건만 그의 말은 비수가 되어 마음을 잘라 냈다. 손에 묻은 핏자국을 옷자락으로 미친 듯 닦아 내던 윤성은 불쑥 고개를 쳐들어 부신을 노려보았다.
“난 절대 길러 달라고 한 적 없어! 당신이 내게 뭘 해 줬다고? 나는 당신 아들인 게 원망스럽…… 윽!”
“뭐? 이런 배은망덕한 놈!”
버럭 호통친 부신이 곁에 있던 화병을 집어 던졌다. 윤성은 제게로 날아오는 커다란 유리병을 간발의 차이로 가까스로 피했다.
그것을 보고 비웃는 권 실장의 비열한 얼굴을 보니 새삼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실감 났다.
환영이 진짜라면? 아버지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더는 한순간도 아버지를 참아 낼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부신을 쏘아보던 윤성은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한 발 움직이기도 전에 권 실장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이, 이거 놔!”
“어떡할까요?”
발버둥 치는 그를 쉽게 제압한 권 실장이 묻자, 부신이 코웃음 치면서 혀를 찼다.
“아무래도 어릴 때 이놈의 능력은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아직은 쓸모가 있을 테니 내버려 둬라.”
권 실장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윤성은 안간힘을 써서 그를 뿌리치고 방을 뛰쳐나왔다.
내쳐 집까지 나오고 나서야 그는 겨우 지옥을 빠져나왔어도 따로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윤성은 조금이라도 아버지와 멀어지기 위해 휘청이는 걸음을 옮겼다.
* * *
화희와 반나절 땡땡이친 여파는 엄청났다. 수아는 점심도 거르고 밀린 일을 해치우느라 온종일 바빴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서 잠시 시간이 남자, 그녀는 아직은 어색한 반지를 어루만지며 화희의 고백을 떠올렸다.
사실은 일하면서도 내내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곤란했다.
<이제 민수아 씨가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고 구원입니다.>
나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데. 광고판이 떨어졌을 때도 그저 피하라고 외치면서 그를 밀치려고 했던 게 전부였다. 결국 그녀를 살린 것은 그였다. 대체 나의 어떤 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을까? 내내 의심만 했던 내가 그를 온전히 받아들일 자격이나 있을까.
똑똑.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자 상념에 잠겼던 수아는 화들짝 놀라서 문을 열었다.
박 회장 옆에서 몇 번 본 적 있던 수행 비서가 대뜸 커다란 상자를 내밀었다.
“회장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당황한 수아가 상자와 그를 번갈아 보는 사이, 수행 비서가 상자를 사무실 안에 막무가내로 내려놓았다. 상자 겉에 크게 박힌 명품 로고에 그녀는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도로 가져가세요. 제가 받기엔 과분한 것 같아요.”
“만약 돌려주고 싶으시면 이사님과 함께 직접 돌려주시랍니다.”
“하지만…….”
“저희 회장님께서는 이사님을 무척 아끼십니다. 그래서 이사님과 연분을 맺은 민수아 씨도 각별히 여기고 계십니다. 부디 회장님의 내리사랑을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낀다고? 내리사랑? 전혀 그런 사이로 보이지 않았는데.
하지만 누가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 아니랄까 봐, 일방적으로 물량 공세를 퍼붓는 기세가 닮았다.
수행 비서가 돌아가고 난감하게 상자를 쳐다보던 수아는 민철에게 문자를 보내 대신 돌려줄 수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가 번거로울까 미안했지만 강원도에서의 일이 재탕될까 봐 화희에게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답을 기다리다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간단히 저녁을 먹으려고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꼼짝없이 야근이었다.
식당 건물 입구 길목에 서 할아버지가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심각한 그의 표정에 수아는 옆에 같이 쪼그리고 앉아 길가에 꽂아 놓은 나뭇가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뭐 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돼요?”
“아, 민 팀장. 여기다 가시덩굴을 자라게 해도 되나?”
“네?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에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박 할아방구만 걸려서 자빠지게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안 될까?”
농담이라고 하기에 서 할아버지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근데 왜 박 할아버지지? 예전 비둘기 요양원에서 김 할머니가 박 할아버지와 곶감을 나눠 드시는 장면을 본 서 할아버지에게 질투 어린 하소연을 듣느라 시달렸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자세히 보니 그때와 그의 표정이 매우 똑같았다.
슬쩍 다른 곳으로 가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서 할아버지가 나뭇가지로 바닥에 원을 그리며 수아에게 투덜거렸다.
“민 팀장, 내 말 좀 들어 봐. 글쎄 오늘 아침에 김 할매가 자기 짐 좀 들어 줬다고 박 할배한테 홍삼즙을 줬어. 나를 불렀으면 됐을 텐데 굳이 비실비실한 박 할배를 부른 이유가 뭘까?”
“마침 그때 박 할아버지가 계셨나 보죠.”
“내가 뭐든 할 테니, 제발 다른 영감 손 빌리지 말라고 그리 당부했는데?”
“아니면, 음, 혹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번거로우실까 봐 배려하신 게 아니었을까요?”
“무슨 소리야. 그깟 짐 좀 들어 주는 게 낫지, 둘이 같이 홍삼즙 먹는 꼴을 봐야 하는 내 가슴은 미어진다고.”
생각나는 대로 별일 아닌 것 같다고 대꾸했다간 서 할아버지의 하소연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수아는 눈을 굴리며 도망갈 타이밍을 노렸다.
그때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수아 씨가 틀렸어요. 질투로 가슴에 못이 박히는 것보다 조금 번거로운 게 훨씬 나으니까.”
“내 말이 그 말…… 아, 팔불출이구먼.”
반색을 표하며 화희를 돌아보던 서 할아버지가 갑자기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벌떡 일어났다.
“저 연애 고자와 의견이 같다니! 내 생각이 틀린 모양이야.”
연애 고자? 대체 할아버지는 그런 말은 어디서 들으시는 걸까? 순간 제 귀를 의심하던 수아는 부득 이를 가는 소리에 흠칫 화희를 돌아보았다.
“한물간 나무토막 주제에 누구더러 감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서 할아버지를 노려보던 그가 별안간 그녀에게 따지듯 물었다.
“수아 씨는 왜 자꾸 강 변에게만 문자를 보냅니까?”
“네? 지금 그게 중요해요?”
“강 변에게 연락한 이유는 짐작 가지만 그래도 지금 한 이야기와 맥락은 같지 않습니까?”
“그게 어떻게 이거랑 같아요?”
대답 대신 눈에 힘을 주는 화희를 보던 수아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를 쳐다보고 있으니 가슴이 두근거려서 제대로 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직접 물어볼게요. 근데 연락도 없이 웬일이세요?”
서 할아버지가 꽂아 놓은 나뭇가지를 발로 툭 차면서 잠시 뜸을 들인 화희가 투덜거리듯 대꾸했다.
“오늘도 새벽같이 일찍 나갔잖습니까. 한강에서 돌아온 이후 내내 나를 피하는 건 착각입니까?”
“피하긴 누가요. 밀린 일 처리를 하려고 서둘렀던 것뿐인데요.”
그에게 정곡을 찔려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수아는 아닌 척 정색을 하고 둘러댔다. 아닌 게 아니라 그를 볼 때마다 고백과 키스가 생각나서 어찌할 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빤히 보며 코웃음 친 화희가 제 손에 든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그 거짓말 믿어 주죠. 바빠서 점심을 거른 건 사실이니까. 같이 저녁 먹으러 갑시다.”
얼떨결에 그와 사무실로 돌아온 수아는 쇼핑백 안의 초밥을 꺼내다가 놀라서 물었다.
“근데 내가 점심 안 먹은 건 어떻게 알았어요?”
어울리지 않게 뜨끔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한 화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무토막…… 큼큼, 대감에게 물었습니다.”
“네? 서 할아버지 말이에요?”
전부터 그와 서 할아버지의 사이를 의심하던 수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화희는 3년 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다고 했는데, 서 할아버지는 비둘기 요양원에 그녀가 취직한 바로 직후에 입실했다.
“설마 내가 비둘기 요양원에 있을 때도 서 할아버지에게 나에 대해 물은 건 아니겠죠?”
슬쩍 떠보는 말에 화희의 헛기침이 더욱 심해졌다. 수아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쏘아보자 그는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렸다.
“아주…… 가끔……?”
“아주 가끔 얼마나요?”
“내겐 너무나 턱없이 부족할 정도……?”
“그게 그러니까 얼마…… 아니요, 됐어요.”
어울리지 않게 말을 피하며 귀 끝이 빨개지는 화희를 보자 수아마저 덩달아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가슴이 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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