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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58화 (58/100)
  • 58화

    * * *

    좀 더 무난한 반지로 고를 걸 그랬나? 하지만 딱히 반지가 문제인 건 아닌 것 같고.

    수아는 창밖을 보는 척하면서 연신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을 힐끗거렸다. 길고 하얀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백금 반지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제 반지도 슬쩍 어루만져 보았다. 약혼반지니까 의무감으로 낀 것이었는데, 막상 같은 모양의 커플링을 하게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결혼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핸들에 팔꿈치를 기대고 그녀를 돌아본 화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안 벗을 겁니다.”

    “벗다니요? 뭘요?”

    “반지 말입니다. 내 반지를 벗기고 싶은 눈길로 째려봤잖아요.”

    “내가 언제 째려봤…… 저기, 대부분은 반지를 뺀다고 하지 않나요?”

    “내겐 벗는 게 맞습니다. 반지가 없으면 감정적으로 발가벗은 기분이 들 것 같으니까.”

    어이없는 표정으로 수아가 쳐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은 화희가 보란 듯 제 반지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반지를 낀 순간부터 그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아니지, 그녀가 말실수를 했을 때부터였나?

    그는 장난처럼 계속 ‘조’로 시작되는 단어에 대해 물었지만 누구라도 그녀가 하려던 말을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이것은 고백을 한 걸까, 아닌 걸까?

    아,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데.

    이 남자와 결혼을 한다니. 등 떠밀린 것처럼 결혼하자고 했지만 막상 결정하고 나니 아예 설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화희를 보고 있으면 그녀가 대단한 존재라도 된 것 같았다.

    그의 반지를 보며 표정이 수시로 바뀌는 그녀를 곁눈질하던 화희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내 약혼녀가 그런 표정을 하면 곤란한데요. 약탈혼이라도 하고 싶어집니다만.”

    “약탈혼이라니요, 내가 청혼했거든요?”

    “그런 거라면 아주 잘 기억하고 있어요. 수아 씨 평생에 결혼한다면 먼저 프러포즈할 거라고 했었죠. 그, 그 시옷 시옷도 마찬가지고.”

    그녀가 했던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흉내 내는 그에게 수아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눈을 접으며 웃던 화희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특별히 점심으로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점심시간이 끝나서 그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내가 굳이 점심시간까지 기다려서 왔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음, 그럼 고용주랑 같이 있는데 점심시간을 좀 어겨도 괜찮겠죠?”

    시간을 확인하고 식사를 거절하려던 그녀는 말을 바꿨다. 그와 조금만 더 이런 분위기에서 같이 있고 싶었다. 오랜만에 웃는 그의 모습을 보니 그녀의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았다.

    “아예 땡땡이치죠, 오늘은.”

    레스토랑에서 나오자 화희가 수아에게 넌지시 물었다. 망설이던 수아는 오늘 기분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차창 밖으로 해가 지기 시작했다. 노을로 붉게 물든 한강을 감탄하여 바라보던 수아는 문득 뺨에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인지 그가 미동도 않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개를 기울여 새삼 감탄하듯 그녀의 얼굴을 훑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과 약속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보다 목소리에 담긴 묵직한 감정에 수아는 화희가 전생의 얘기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눈을 응시한 채로 그는 느릿하게 고백하듯 말을 이었다.

    “당신이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절대 남을 해치지 않겠다고. 당신의 불행한 죽음을 겪었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버텼는지 아마 짐작도 못 할 겁니다.”

    그는 강조하듯 다시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당신과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수아는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오랜 시간의 무게를 머릿속으로 헤아려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아닐 것이라는 건 믿고 있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전생의 그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배신하거나 속이는 기색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녀가 자신 때문에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았던 화희가 지금에 와서 새삼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다.

    “믿어 보도록 할게요. 당신은 나와의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 없으니까.”

    “정말 믿어 주는 겁니까?”

    “안 믿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예요.”

    화희를 마주 쳐다보던 수아는 머릿속에 떠다니던 수많은 질문을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나는 언제부터 구한 거예요?”

    “그게 중요합니까?”

    “나는 민수아를 묻는 거예요.”

    미간을 찌푸린 화희가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3년 전입니다.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그런 흉악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요.”

    3년 전. 순간적으로 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장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막 멀어지는 김 대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쫓아갈까 말까 고민하려던 그녀 앞에 갑자기 튀어나온 장신의 남자. 그의 흰 손가락에서 방울지며 떨어지는 피.

    그가 앞을 가로막아 찰나의 시간을 끌었고 덕분에 광고판을 피했다. 단 몇 걸음 차이로.

    “그때 날 막은 사람이 당신이었어요? 아니야, 그게 아니라…….”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분명 그때 광고판은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녀는 광고판과 좀 떨어진 곳에 넘어져 있었다.

    수아는 새삼 깨달은 사실에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설마 피로 날 살린 거예요? 버스 사고 때처럼? 그럼 왜 지금에야 나타난 거예요?”

    곤란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눈빛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전생의 여자를 떠올릴 때처럼.

    나도 그 여자처럼 그를 상처입힌 걸까? 그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할 때는 보이지 않던 그의 표정에 마음 한구석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선을 비껴 둔 채 그가 자조적인 어조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망쳤습니다. 당신을 붙잡지 않기 위해서. 그때의 나는 전생의 마지막 날을 알아내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왜 생각이 바뀐 건데요?”

    “광고판이 떨어지는 그 순간, 민수아 씨가 나를 구해 주려고 했습니다.”

    뜻밖의 말에 수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놀라고 무서웠던 감정만 생생할 뿐, 자신의 정확한 행동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그런 상황에선 누구나 그러지 않나요?”

    “전생의 당신이었다면 절대 날 구하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알았습니다. 민수아 씨는 내가 기억하는 사람과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당신은 매번 나를 보면서 그 여자를 떠올렸잖아요. 이미 죽어 없어져 버린 여자를 전혀 다른 나한테 바라다니, 내가 무슨 좀비라도 된 것 같았다고요.”

    “당신도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나를 버리려고 했잖습니까? 나는 이래 봬도 당신을 살리는 것 외에는 당신 삶의 어떤 것에도 간섭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어요.”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불편한 침묵이 아닌 마음이 정리되는 침묵이었다.

    전생의 감정에 치여 빛이 바랜 현재의 감정을 꺼내 케케묵은 찌꺼기를 털어 내는 것 같았다.

    화희는 수아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정확하겠군요. 민수아 씨에게 생긴 파생적인 감정이 한계를 넘어 버려서.”

    “파생적인 감정이요?”

    “부단히 당신의 삶을 놓아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단 뜻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생을 마지막으로 정했습니다.”

    “마지막이라니요?”

    당황한 수아가 눈만 깜빡거리자 화희가 천천히 제 반지 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고백하듯 말을 이었다.

    “민수아 씨가 날 그렇게 만들었어요. 다시는 괴롭고 외로운 삶을 살 수 없도록. 다른 어떤 생보다 지금의 민수아 씨가 가장 날 크게 흔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나를 허락해 주면 좋겠다고 간절히 소망하고 있어요.”

    차 밖의 주변 소음이 멀어지고 오로지 그의 목소리만 귓가를 울렸다.

    “나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수아는 홀린 것처럼 그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강의 불빛이 옅게 비치는 뺨에 손끝이 닿자, 화희가 움찔 몸을 떨며 투덜거렸다.

    “봐요, 대단하기만 하잖아요.”

    자신의 작은 손길만으로 남자가 크게 반응하자 수아의 마음이 출렁거렸다. 화희가 시험하는 것처럼 그녀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가 그녀가 순순히 끌려오자 기쁘다는 것처럼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웃음에 홀린 순간, 화희가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몸이 밀착되도록 바싹 끌어안았다. 그리고 난폭할 정도로 단번에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질겅거리듯 빨고 혀가 입술을 가르며 파고들었다.

    닿는 순간 입 안이 화끈거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입술부터 뜨거운 열기가 온몸에 퍼져 갔다.

    숨을 모조리 앗아 갈 것처럼 그녀의 입 안을 핥고 빠는 혀의 움직임이 생생했다. 그녀가 너무나도 달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는 끝없이 그녀의 입 안을 열렬히 탐했다.

    얼마간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숨이 가쁜 그녀의 등을 달래듯 쓰다듬은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고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제 민수아 씨가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고 구원입니다. 안 됐지만 난 최선을 다해 민수아 씨를 붙잡을 수밖에 없어요.”

    사과하듯 웃는 남자의 손에서 반지가 반짝였다. 수아는 그의 손을 겹쳐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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