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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57화 (57/100)

57화

“말은 바로 합시다. 화는 나를 오해한 당신이 먼저 냈고, 지금 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 당신이 나와 결혼하면서 희생하는 것처럼 굴기 때문입니다.”

“희생요? 그럴 리가요. 나는 나 살자고 결혼하자고 그쪽에게 매달리는 중인데요. 그리고 그쪽한테도 식 없이 결혼을 빨리 진행하는 게 좋지 않아요? 그래야 날 구하느라 다칠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그럼 왜 내내 죄라도 짓는 표정입니까? 내가 못 미덥고 싫으면 다 관두고…….”

“아,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이에요? 당신을 믿고 의지했는데 하루아침에 전생 가족들의 원수라는 걸 알게 됐는데. 현재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무시무시한 과거까지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배신당한 기분이란 말이에요. 심지어 내가 당신을 많이 좋아……!”

수아는 화가 나서 쏘아붙이다가 급히 말을 멈췄다. 방금 뭔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할 뻔한 것 같았다.

그녀가 말을 멈추자 거실엔 묘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차마 화희를 볼 수 없어 눈만 굴려 민철을 돌아보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몸까지 바로 세우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화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설마 내가 좋아했다고 했을 리가 없어. 그래, 말을 멈췄잖아, 못 들었을 거야. 제 입을 틀어막은 수아는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에요. 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럴 리가요. 아직도 귀에서 당신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성큼 움직여서 입을 막고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앞을 막아선 화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재차 물었다.

“나를 믿고 의지했다고? 그래서 나를 어떻게 생각했다는 겁니까?”

방금까지의 날 선 그의 말투가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그 반응에 더 머쓱해진 수아가 상체를 뒤로 물렸으나 화희는 팔을 뻗으며 퇴로를 막았다.

고개를 저으며 이리저리 피하려 했으나 화희는 끈질기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실랑이에 지친 그녀가 민철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나갔다.

“뭐지, 이 갑작스러운 재혼 분위기는…….”

단둘이 남게 되자 수아는 화희를 올려다보다 서둘러 변명하듯 쏘아붙였다.

“지, 진심으로 현재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여겼으면 이 집에 붙어 있겠어요?”

“나쁘지 않다는 것보다 더 좋.은. 단어가 들렸던 것 같다니까요?”

수아는 뒷걸음질 치다 계단에 닿자, 손을 쭉 뻗어 삿대질을 했다.

“아, 몰라요! 마음대로 하래 놓고 트집 잡을 거면 그쪽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나한테 선택할 권리나 있어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 민수아 씨!”

그녀는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뒤에서 부르는 화희의 부름을 무시하고 일부러 제 방문을 세게 닫았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에 제 심장도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 * *

아, 진짜. 잠에서 깨자마자 수아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부림쳤다.

다행히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민망함에 새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개진 기분이었다.

<심지어 내가 당신을 많이 좋아……!>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어쩌면 끝말은 못 들었을 거야.

아니라도 뭐, 결혼하자고 조르기까지 한 마당에 더 창피할 게 어딨어? 그보다 나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많잖아.

아직도 윤성과 함께 탄 엘리베이터가 떨어지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찔했다. 그런데 그 순간을 찬찬히 되짚어 보니 죽을지도 모르는 순간에 예전처럼 엄마를 떠올린 게 아니고 그를 생각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순간에도 화희가 구해 주리라고 믿었던 걸까, 아니면 정말 아직도 좋…… 아해서일까.

엘리베이터가 열린 순간, 그는 적잖게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고 있었지만 그 순간에도 그를 보며 안도했었다.

애초에 그에게 심하게 화를 냈던 이유를 되새겨 보았다. 나는 정말 그가 전생의 가족들을 죽였다고 여겼나?

아니었다. 자신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주인 없는 화희 집에 여태 살고 있을 리도 없고 아무리 목숨이 걸렸다 해도 그와 결혼까지 할 생각은 더더욱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 마음 한구석엔 의심을 남겨 둬야만 했다. 하지만 마음은 자꾸만 다른 감정으로 치달으려고 했다.

민수아, 지금 ‘감정’ 같은 걸 따질 때가 아니라니까? 당장 제일 급한 생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해.

세뇌하듯 연신 중얼거려 봐도 얼떨결에 제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 잊히지 않았다.

그녀는 잡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여느 때보다 꼼꼼하게 출근 준비를 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체되어 급히 방을 나서던 수아는 놀라 뒷걸음질 쳤다.

팔짱을 낀 채 난간에 기대 서 있던 화희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일으키고 물었다.

“그래서 어제는 뭐라고 말하려 했던 겁니까?”

“거기에서 뭐 하는 거예요?”

“보면 모릅니까. 민수아 씨 기다렸습니다. 내가 궁금하면 잠을 잘 못 자는 체질이라서.”

“……”

“대체 뭡니까? 심지어 내가 당신을 많이 ‘조’ 다음에는?”

“……그만하는 게 어때요?”

“밤새 ‘조’로 시작하는 단어를 나열해 보았더니 수백 가지나 되더군요. 조롱하다. 조용하다. 조사하다. 조그맣다, 등등.”

“그만하라고요.”

“조그맣다는 아닐 겁니다. 심지어 내가 당신을 많이 조그맣다고 생각했다, 뭐 이런 건 말이 안 되니까. 난 딱 봐도 다 큰 편인데.”

“아, 제발 좀 그만 닥…… 다그쳐요!”

수아는 혼자 중얼거리는 화희를 밀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떨어져 쫓아오며 연신 중얼거렸다.

“심지어 내가 당신을 많이 조사했다? 심지어 내가 당신을 많이 조져 버리려고 했다?”

화희의 아무 말 퍼레이드 덕분에 결국 그녀는 귀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도망치듯 현관 밖을 나서는데 성큼 앞을 막아선 그가 코웃음 치며 눈짓했다.

“내 차로 출근합시다. 결혼하려면 슬슬 나와 있는 모습을 보이는 데 익숙해져야 할 테니.”

“……싫어요.”

“그 싫다는 말 정말 싫군요. 하아, 정 그렇다면 가는 동안에는 그만 닥친다고 약속하죠.”

수아는 어제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화희를 슬쩍 쳐다보았다.

차갑던 눈빛이 어느새 부드럽게 변해 있는 것을 보자 얼었던 마음 한구석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안심이 되기까지 했다. 그를 의심하고 밀어냈던 것은 자신이었으면서도, 못내 그의 태도가 꺼려졌던 것처럼.

머뭇거리던 수아는 못이기는 척 그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약속대로 화희가 입을 다물자 차내에 침묵이 흘렀다.

수아는 조수석에 앉아 어색하게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받아요.”

신호가 걸려 멈춘 사이, 화희가 재킷 안쪽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뭐예요?”

“약혼반집니다. 아무래도 공식 석상에선 필요할 겁니다.”

얼떨결에 받아서 열어 보니 백금 재질에 커다란 보석이 달린 반지가 반짝였다. 잠시 반지를 들고 만지작거리던 수아는 왼손 약지에 끼고 작게 중얼거렸다.

“예쁘네요, 고마워요.”

핸들에 팔꿈치를 올린 채 정면을 응시하던 화희가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려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어디 아파요?”

“네?”

“왜 안 어울리게 그딴 걸 왜 순순히 낍니까, 그러라고 준 게 아닌데.”

“네? 끼라고 준 게 아니면요?”

“당연히 마음에 안 들어 할 줄 알고 그 핑계로 다른 걸 같이 고르려고 했습니다만.”

수아는 말문을 잊고 반지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마음에 든다고 하기도 뭣하고 안 든다고 하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그의 따가운 시선에 어색하게 굳은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오므리며 자신 없이 말했다.

“아, 어쩐지 반지가 걸리적거리기 아주 좋게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걸로 할 겁니까?”

“……네. 고르는 김에 이사님 것도 같이 해요. 약혼반지는 혼자만 끼는 게 아니잖아요.”

의외로 순순한 수아에게 화희가 말문을 잃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수아는 시선을 내려 어색한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화희를 힐끔거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그의 귀 끝이 조금 빨갛다는 것을.

내가 뭔 말을 했다고 귀까지 빨개지지?

의심스럽게 그를 보던 수아의 얼굴도 왠지 덩달아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 * *

수아는 문득 타자 치던 손을 멈추고 컴퓨터 모니터를 멍하니 응시했다.

일에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주제는 박화희, 그 남자였다.

결혼이라니. 정말 내가 정말 그와 결혼하는 걸까.

딴생각에 잠겨 있던 수아는 모니터에 메시지가 깜빡거리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확인했다. 점심 식사하자는 한 대리의 사내 쪽지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기계적으로 핸드폰을 들고 구내식당으로 가기 위해 건물 입구로 갔는데 지나던 사람들이 그녀를 힐끗거리며 쳐다보았다.

요즘 들어 그런 시선을 자주 느꼈다. 아무래도 얼마 전 콘퍼런스 호텔에서의 회식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호기심 어린 시선이 너무 지나쳤다. 입구에 서 있던 한 대리가 그녀에게 열심히 손짓하는 곳을 돌아보자 화희가 건물 입구에 세워 둔 차에 기대 서 있었다.

인사하는 사람들을 본 척도 않고 자신만 쳐다보며 다가오는 남자에게 당황한 수아는 한 대리에게 중얼거렸다.

“아, 할 일이 있었는데 깜빡 잊었네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수아가 어색하게 화희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무슨 일인데요?”

“반지 골라야죠.”

“그게 그렇게 급한 일이었어요?”

“반지가 급한 게 아니라 내가 급해서.”

“뭐가요?”

“궁금해서 못 참겠거든. 날 좋……. 그다음이 뭡니까, 대체.”

정색한 그녀는 입을 앙다물고 그를 흘겨보았다.

“자꾸 그럴 거면 혼자 가요.”

“알았습니다. 앞으로 안 묻죠.”

어깨를 으쓱한 화희가 마지못한 척 자기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하며 그녀에게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반지는 매장 안쪽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그의 스타일리스트라고 소개한 직원이 매장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아는 넓은 매장 내부를 신기하게 둘러보았다.

이런 곳이 다 있구나.

옷과 액세서리, 구두, 가방 등 온갖 종류의 명품들이 고급스러운 조명을 받으며 진열되어 있었다.

그녀는 보석이 박힌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를 구경하다 화희에게 속삭였다.

“약혼반지까지 껴야 하는 공식 석상에서는 어떤 차림을 해야 해요? 설마 저런 드레스 같은 걸 입어요?”

화희가 그녀가 가리킨 드레스를 흘깃 넘겨 보고 픽 웃었다.

“원하는 대로 입어요. 민수아 씨라면 넝마를 걸쳐도 여신처럼 보일 테니까.”

“넝마라니요? 지금 내 취향을 의심하는 건 아니죠?”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방에 있는 많은 옷들 중에 트레이닝복을 제일 많이 본 것 같긴 하죠.”

“그거야 최대한 신세 지지 않으려고……”

신세라는 말에 화희가 대번에 못마땅한 듯 눈썹을 치켜세우자 수아는 전부터 참았던 말을 꺼냈다.

“아니, 근데요.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방에 있는 옷들, 하나도 내 취향 아니거든요? 그렇게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뭘 할 수 있겠어요?”

“아, 그래요? 그럼 방에 있는 것들은 싹 다 버리고 새로 사죠.”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그녀와 눈을 맞춘 채로 손을 들었다. 바로 직원이 다가오자 그는 수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성의 없이 옷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줘요.”

경악한 수아는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넘기려는 그의 팔을 잡고 물었다.

“이봐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속된 말로 돈지랄이라고 하죠. 내가 당신을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라서.”

그가 그녀에게 잡힌 제 팔에 노골적인 시선을 주며 코웃음 치자 수아는 슬쩍 그의 팔을 놓았다.

화희가 제 할 말만 하고 안쪽으로 휙 가 버리고, 수아는 자신을 기다리는 직원을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직원이 마주 웃으며 상냥하게 설명했다.

“이사님께서 농담하신 것 같습니다. 여기 있는 여성용 의상들은 고객님을 위해 구매를 마친 것들이거든요.”

수아는 새삼 매장을 다시 둘러보았다.

마, 말도 안 돼. 백화점 매장 하나를 통째로 가져온 것보다 물건이 많은데 이게 전부 다 내 거라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룸 안으로 들어가자 테이블 위에 반지들을 세팅한 직원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아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반지를 가리켰다. 심플하지만 새겨진 문양이 세련되어 보였다.

“이거 어때요?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직원이 바로 반지를 꺼내 보여 주자 화희가 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럴 리가요.”

“착용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스타일리스트가 말하자, 화희가 그녀에게 불쑥 제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수아는 반지를 받아 들고 그의 약지에 조심스레 반지를 끼웠다.

화희가 제 손을 신기한 것처럼 앞뒤로 뒤집어보다가 그녀의 손을 스치듯 감싸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이걸로 하죠.”

수아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리자 돌연 그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꼭 바라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뜻밖의 미소에 그녀는 잠시 홀린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본 게 꽤 오래전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맞아, 그는 이렇게 웃는 사람이었지.

딱딱하게 굳으려던 마음 한구석이 말랑거리는 것만 같아, 수아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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