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 *
똑똑.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란 수아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필사적으로 현실을 외면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혹시 화희가 아닌가 싶어 가슴을 졸였지만 민철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렸다.
“민수아 씨, 잠깐 거실로 내려와 주시겠습니까?”
머뭇거리던 그녀가 문을 열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민철이 서 있었다. 그는 고개만 삐죽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수아에게 내키지 않는 말투로 덧붙였다.
“이사님은 지금 외출 중이라 안 계십니다.”
“……음, 전 이사님을 피하는 게 아니에요.”
“물론 그러시겠죠.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이사님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셨지만요.”
“…….”
“하, 전 말을 전하러 왔을…… 그냥 나와주시면 안 됩니까? 제가 무슨 전도사도 아니고.”
수아는 못마땅하게 투덜거리는 민철에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리고 방에서 나왔다.
“피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단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좀 필요했을 뿐이라고요.”
수아는 먼저 아래층에 내려간 민철이 듣고 있지 않은 걸 알면서도 자기합리화하듯 중얼거렸다.
빈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소파에 어색하게 앉은 수아를 유심히 지켜보던 민철이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먼저 하나만 묻겠습니다. 이사님께서 민수아 씨와의 결혼을 준비하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네, 맞아요. 내가 이사님한테 결혼해 달라고 했어요.”
알고 물은 것 같은데도 민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이사님이 아니라 민수아 씨가 결혼하자고 했다고요? 그런데 왜 이사님을 피합니까?”
머리를 넘기며 시선을 피한 수아는 대답 대신 생각해놓은 말부터 꺼냈다.
“저, 그래서 말인데요. 혼전계약서 좀 작성해 주세요.”
“혼전계약서요? 어떤 내용으로요?”
“민수아는 박화희 씨가 가진 모든 것에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만 명시해 주시면 돼요.”
“진심이네요, 민수아 씨.”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민철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수아 역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고 한숨을 억눌렀다.
왜 다들 진심이냐고 묻는지 모르겠다. 그녀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그녀의 ‘청혼’ 후 화희는 오직 단 하나만을 물었었다.
<……진심으로 원하는 겁니까?>
<그럼요. 나는 진심으로 살고 싶어요.>
그녀의 답에 화희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었다. 그를 마주 보는 자신의 표정이 어땠길래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그녀가 청혼한 순간부터 고래고래 악을 쓰던 윤성도 생각났다.
<누나, 지금 제정신이야? 이런 수상한 놈과 결혼을 하겠다고? 전부터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저 남자 정상 아니야! 보통 사람이라면 저런 두꺼운 쇠문을 부술 리가 없잖아!>
반쯤 혼이 나갔던 수아가 끝내 입 좀 다물라고 소리쳐야 할 만큼 윤성은 충격받은 듯했다.
모두에게 비난받는 것 같았다.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로 하는 결혼이니까 그런 걸까? 자신조차 충동적으로 질러놓고 며칠째 화희를 피하고 있으니까 변명할 거리가 없긴 해도.
수아가 어릴 적부터 꿈꾸던 결혼은 가족들의 축복을 받으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먼 결혼을 하게 생겼으니 그녀 역시도 충분히 혼란스럽고 마음이 복잡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거리가 먼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화희가 보였을 때 들었던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소 이기적인 이 마음은 과연 옳은 걸까.
어찌 됐든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살아야 미래도 꿈꿀 수 있으니까.
당황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한 민철이 상념에 빠진 그녀를 일깨웠다.
“제 말을 잊은 건 아니겠죠? 죽음을 걸고 하는 결혼은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헤어질 수 없다는 그 말, 말입니다.”
“헤어질 생각은 전혀 없어요. 이사님이 그럴 생각이 있다면 몰라도요.”
민철은 할 말은 많지만 어떤 말부터 먼저 해야 될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 한숨을 쉬며 물었다.
“지금 민수아 씨 표정이 어떤 줄 압니까?”
“제 표정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세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이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있어 보여요?”
민철이 가시를 세우는 수아에게 항복한다는 듯 양손을 번쩍 들었다.
“알겠습니다. 어설픈 참견 그만할게요. 전 민수아 씨가 원하는 대로 해 드리라는 이사님 지시를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원하는 대로요?”
“네, 결혼에 관한 건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하시랍니다.”
여러 차례 헛기침하며 당황스러운 기색을 지운 그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혼전계약서 양식입니다. 순서나 양식에 상관없이 원하는 걸 적으시면 공증 가능한 문서로 바꿔놓겠습니다.”
죽음을 걸고 하는 결혼은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헤어질 수 없다.
뒤늦게 그의 말이 무겁게 와닿았다. 하지만 역시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수아는 민철과 서류를 번갈아 보다 입술을 깨물며 그가 내민 펜을 받아 들었다. 뾰족한 펜 끝이 그녀의 마음을 긁어 대는 것만 같았다.
* * *
“원하는 대로 하라면서요?”
소파 맞은편에 다리를 꼰 채 느슨하게 기대앉은 화희에게 영문을 알 수 없어 물었다.
퇴근 후, 결혼식의 구체적인 일정과 규모를 논의해야 한다는 민철의 말에 거실로 내려와 보니 화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흘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전처럼 싸늘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신 무표정을 가장한 얼굴에 심기가 잔뜩 비틀린 눈빛이 역력했다.
손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들기던 화희가 그녀를 턱 끝으로 쳐다보면서 느릿하게 강조했다.
“원하는 결혼‘식’에 따르겠다는 것이었죠. 생략해 버리면 따를 게 없잖습니까?”
“이 상황에 가족과 친구들을 모으고 진짜 결혼을 하는 건 무리잖아요.”
“간단하게 호적 신고를 하는 정도로 쉬운 거였으면 당신 몰래 해 버리고도 남았지. 내가 그러고도 남을 종자라는 건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저기요, 내 말은…….”
그녀의 청혼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삐딱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따지고 보자면 결혼은 그가 먼저 귀에 못이 박이도록 주장한 바였기에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는데.
혹시 결혼이 싫은 건가? 아니면 며칠 동안 내가 도망치기만 해서 마음이 상했나, 짚이는 바가 너무 많아서 수아는 제대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화를 내는 이유야 어쨌든, 선택지가 없는 이쪽도 억울하긴 마찬가지였다.
“혹시 마음이 바뀐 거예요?”
수아가 마뜩잖게 묻자 화희가 눈을 질끈 감으며 입 안으로 들리지 않는 말을 짓씹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예요?”
“이쪽 생각이 중요합니까?”
수아를 무시하는 것처럼 민철에게 휙 고개를 돌린 화희가 딱 잘라 명령했다.
“내 아내 될 사람을 소개할 공식적인 자리를 찾아봐.”
중간에서 곤란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던 민철이 수아에게 변명하듯 설명했다.
“이사님께선 결혼식을 생략해 버리면 민수아 씨 신변에 안 좋은 소문이 날까 염려하시는 겁니다. 아무래도 이런 경우엔 속도위반이라든가 여성분께 더 안 좋은 소문이 나기 마련…….”
삐딱하게 고개짓을 한 화희가 민철의 말을 싹둑 자르고 비아냥거렸다.
“아무리 본인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내 아내가 될 사람이 더러운 소문을 꼬리처럼 달고 다니는 건 이쪽에서 차마 못 본다고 전해 드려.”
“이미 그쪽 할아버지께서 회사에 소문내고 다니셔서 더 날 소문도 없다고 전해 주세요.”
수아도 지지 않고 쏘아붙이자 중재하려던 민철의 말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두 분 다 이러지 않으시면 안 됩니까? 벌써 며칠째 전 결혼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신입 때도 안 해본 이혼 변호사가 된 기분입…….”
긴 한숨을 내쉰 민철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다가 화희의 사나운 눈길과 마주치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런 민철에게 시선을 고정한 수아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바라는 건 하루빨리 뭐라도 실마리를 찾는 거예요. 원한다면 하루뿐만 아니라 되는 대로 기억을 되살려 볼게요. 관련된 물건을 보면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으니까 그 방에서…….”
“그건 안 된다고 했을 텐데요.”
대번에 화희가 싸늘한 말투로 말을 잘랐다. 흠칫한 수아가 돌아보자, 허공에 시선을 둔 그가 간단히 덧붙였다.
“기억에 관한 건 보류해도 좋습니다. 주해린이 있으니까.”
“……주해린이요?”
“부분만이라도 객관적인 기억을 보는 게 나을 테죠. 아무래도 기억은 감정이 들어가면 조. 작. 되기 마련이라는 걸 다시 한번 배웠으니까.”
화희가 조작이라는 말을 길게 늘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더는 그녀의 기억을 더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수아는 다른 부분에서 울컥했다. 그의 입에서 주해린이 나오자 순간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와 그 기억을 더듬는다고?
꿈의 한 장면이 되새겨지면서 충격에 가까운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해린은 화희의 전 약혼자이기도 했다.
화희는 그녀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혹시 해린을 볼 때마다 그 여자를 되새기는 건 아니겠지?
대체 주해린은 왜 자꾸 우리와 얽히는 거지?
아,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질투 따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불쑥 끼어드는 기분 나쁜 감정을 무시하려 했지만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울컥한 수아는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요, 알았어요. 뭐든 좋으니 빨리해요. 어차피 미치도록 사랑해서 하는 결혼도 아닌데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뭐가 중요하겠어요?”
“아닐 건 또 뭡니까? 꼴은 이래도 내가 좋아 죽는지 싫은지 민수아 씨가 압니까?”
코웃음을 친 화희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비아냥거렸다. 허리에 손을 얹은 수아는 그를 마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그럼 왜 그렇게 화를 내는데요?”
“말은 바로 합시다. 화는 나를 오해한 당신이 먼저 냈고, 지금 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 당신이 나와 결혼하면서 희생하는 것처럼 굴기 때문입니다.”
“희생요? 그럴 리가요. 나는 나 살자고 결혼하자고 그쪽에게 매달리는 중인데요. 그리고 그쪽한테도 식 없이 결혼을 빨리 진행하는 게 좋지 않아요? 그래야 날 구하느라 다칠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그럼 왜 내내 죄라도 짓는 표정입니까? 내가 못 미덥고 싫으면 다 관두고…….”
“아,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이에요? 당신을 믿고 의지했는데 하루아침에 전생 가족들의 원수라는 걸 알게 됐는데. 현재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무시무시한 과거까지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배신당한 기분이란 말이에요. 심지어 내가 당신을 많이 좋아……!”
수아는 화가 나서 쏘아붙이다가 급히 말을 멈췄다. 방금 뭔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할 뻔한 것 같았다.
그녀가 말을 멈추자 거실엔 묘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차마 화희를 볼 수 없어 눈만 굴려 민철을 돌아보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몸까지 바로 세우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화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설마 내가 좋아했다고 했을 리가 없어. 그래, 말을 멈췄잖아, 못 들었을 거야.
제 입을 틀어막은 수아는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에요. 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럴 리가요. 아직도 귀에서 당신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성큼 움직여서 입을 막고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앞을 막아선 화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재차 물었다.
“나를 믿고 의지했다고? 그래서 나를 어떻게 생각했다는 겁니까?”
방금까지의 날선 그의 말투가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그게 더 머쓱해진 수아가 상체를 뒤로 물렸으나 화희는 팔을 뻗으며 퇴로를 막았다.
고개를 저으며 이리저리 피하려 했으나 화희는 끈질기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실랑이하며 피하다 지친 그녀가 민철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나갔다.
“뭐지, 이 갑작스러운 재혼 분위기는…….”
단둘이 남게 되자 수아는 화희를 올려다보다 서둘러 변명하듯 쏘아붙였다.
“지, 진심으로 현재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여겼으면 이 집에 붙어 있겠어요?”
“나쁘지 않다는 것보다 더 좋.은. 단어가 들렸던 것 같다니까요?”
수아는 뒷걸음질 치다 계단에 닿자, 손을 쭉 뻗어 삿대질했다.
“아, 몰라요! 마음대로 하라더니 트집 잡을 거면 그쪽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나한테 선택할 권리나 있어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 민수아 씨!”
그녀는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뒤에서 부르는 화희의 부름을 무시하고 일부러 제 방문을 세게 닫았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에 제 심장도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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