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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55화 (55/100)
  • 55화

    수아는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입술을 깨물었다. 느낌이 매우 좋지 않았다.

    관리실과 통하는 버튼을 누르던 윤성이 그녀를 돌아보고 놀리듯 웃었다.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 없어. 잠깐 멈춘 것뿐일 거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관리실이 연결되었다. 윤성이 상황을 설명하자 바로 응답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잠시 회로에 문제가 생겼나 봅니다. 최대한 신속하게 조처할 테니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관리실과 통신을 끝낸 윤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보곤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누나가 무서워할 때도 다 있네? 그런 표정 하니까 사람이 달라 보이잖아.”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수아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미심쩍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안하게 요동치는 심장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멈춘 순간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되살아나려 했다.

    그동안 방심한 걸까. 내가 더 조심했어야 했나? 화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자신의 극한 상황을 그만 잊고 말았다.

    아냐, 재수 없게 섣부른 생각 말자. 별일 아닐 수도 있잖아.

    수아는 스멀스멀 밀려오는 공포를 애써 억누르면서 윤성에게 대꾸했다.

    “나 겁 되게 많아. 몰랐어?”

    “누나가 그렇게 무서워하니까 기분이 이상해. 나는 견디기 힘든 순간마다 누나 생각했거든.”

    “……나를 왜?”

    “누나는 무슨 일이 생겨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을 거란 느낌이거든. 공포 영화 보면, 무서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살길을 찾고 앞장서서 남까지 끌어 주면서 끝까지 살아남는 여주인공처럼. 그래서 누나를 떠올리면 어딘가 좀 안심이 되는 건가.”

    “나 하나도 안 꿋꿋…… 안 돼. 지금 공포 영화 얘기하지 마. 차라리 액션 영화 얘기해. 어, 이런 상황에서 할리우드 오빠들은 어떻게 행동하지? 천장을 열고 빠져나가나?”

    그녀의 말에 윤성이 장난처럼 엘리베이터 문을 힘주어 열다 틈으로 벽이 보이자 고개를 저었다.

    “층 중간에 걸렸나 봐. 아씨, 멋지게 구해 주고 싶었는데 실패했네. 요즘 영화에선 이럴 때 여주인공이 구해 주던데. 누나, 뭐 비장의 무기 없어?”

    “있어, 핸드폰. 3분만 기다렸다가 연락 안 오면 바로 119 부를 거야.”

    수아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가 제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끼고 얼른 숨겼다.

    그까지 불안해질까 봐 농담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문밖으로 벽이 보이자 숨이 턱 멎는 것 같았다. 그녀와 윤성은 지금 18층, 공중 떠 있는 작은 상자에 갇힌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관리실에서 응답 온 지 몇 분 지나지 않았건만 시시각각 불안함이 심해져서 별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왜 하필 윤성이까지. 어떻게든 아까 그냥 그를 돌려보내고 혼자 내려갔어야만 했는데.

    윤성이 희게 질린 그녀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을 잡았다.

    “괜찮을 거야. 요즘엔 안전장치가 다 되어 있으니까 안심해. ……아, 진짜 괜찮다니까? 아까보다 얼굴이 더 창백해졌잖아.”

    안절부절못하던 수아는 따뜻하게 전해지는 체온에 왠지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달래듯 그녀의 손을 감싸던 윤성이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차게 식은 그녀의 볼에 그의 손이 스치듯 닿았다.

    수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손을 피했다. 섬뜩한 기운이 아까보다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미안한데 이런 건 하나도 위로가 안 돼. 그보다 관리실에 다시 연락해 볼…… 아!”

    순간, 발밑이 덜컹 움직였다.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제대로 작동되나 싶었지만 끼이익 거슬리는 기계음을 내며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놀라 그녀를 쳐다보는 윤성의 얼굴에서 빠른 속도로 핏기가 사라졌다.

    “손잡이 꽉 잡고 있어.”

    그녀를 놓아준 그가 관리실 버튼을 누르려고 손을 뻗었다. 동시에 소름 끼치는 기계음을 내던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한쪽으로 기우뚱 크게 기울었다.

    수아가 손을 뻗어 휘청거리는 윤성을 잡아 주려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급속도로 하강했다.

    발을 디디고 선 바닥이 붕 떠 끝없이 떨어지는 부유감이 끔찍했다.

    “민수아!”

    윤성이 외치면서 바닥에 주저앉는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무서운 낙하 속도에 바닥에 들러붙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수아는 마주 그를 붙잡으며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삼켰다.

    “제,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이렇게 죽기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도 많단 말이에요.

    왜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게 억울할까. 영문도 모르는 채 죽을 뻔했을 때보다 훨씬 더 억울하고 분했다.

    온몸으로 그녀를 받치려는 것처럼 단단히 옭아맨 윤성의 손길에 화희가 떠올랐다.

    고가 도로 난간에 떨어지는 버스에서 그녀를 빈틈없이 끌어안던 단단한 손길, 자신이 다쳤음에도 그녀를 안심시키려던 낮은 목소리가 바로 지금 겪은 일처럼 되새겨졌다.

    <당신 사는 것만 생각하라니까.>

    왜 지금 이 순간에 그를 떠올리는 걸까. 이렇게 죽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텐데.

    전자판 숫자가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16, 15, 14…… 몇 층이 지나자 가속도가 붙었는지 아예 층수가 보이지도 않게 빠르게 바뀌었다.

    숫자가 한 자리로 바뀌었을 때 수아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은 윤성이 욕설을 낮게 짓씹는 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정말 이렇게 죽는 거야? 아무것도 못 하고 이렇게……?

    멀쩡히 살고 있을 남들에게는 찰나일 순간, 그녀에게만 시간이 길게 늘어나 공포가 끝도 없이 커졌다.

    5, 4, 3…….

    쾅!

    순간 고막이 아플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그들을 덮쳤다. 강한 충격을 예감하고 이를 악물었으나 뜻밖에도 엘리베이터는 조금 흔들리기만 했다.

    온몸을 짓누르던 부유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쇠가 우그러지는 소리만 좁은 공간 안에 메아리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든 윤성이 전자판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머, 멈췄어. 안전장치에 걸린 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쇠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열렸다기보다는 양쪽 문이 뜯어낸 것에 가깝게 폭력적으로 벌어졌다.

    반밖에 열리지 않는 문 앞에는 화희가 서 있었다.

    “어, 어떻게……!”

    그와 눈이 마주치자 살았다는 안도감에 온몸의 힘이 풀렸다. 문을 짚은 채 그녀를 빠르게 훑은 화희가 입을 열었다가 말을 삼키는 것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한 그의 눈길이 미끄러지듯 윤성에게로 옮겨 갔다. 정확히는 서로를 얼싸안고 있는 팔에.

    쾅. 돌연 화희가 문을 세게 걷어찼다. 벽에 세게 부딪힌 두꺼운 쇠문에 움푹 발자국이 깊게 팼다.

    “저기……!”

    움찔한 수아가 놀라 그를 부르려던 순간 화희가 팔을 길게 뻗어 윤성의 멱살을 잡고 끄집어냈다. 짐처럼 덜렁 들려서 복도에 나가떨어지는 윤성을 본 그녀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려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급히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는데 순간 시야가 휙 돌았다. 그녀의 허리를 감아 일으켜 세운 화희가 수아를 턱 밑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주친 그의 눈빛이 유난히 싸늘했다.

    “저놈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거였군요.”

    “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되묻는 그녀를 놓아준 화희가 막 벽을 짚으며 일어서던 윤성을 돌아보았다.

    찰나 그의 눈빛이 새까맣게 번뜩이는 걸 본 수아는 본능적으로 급히 그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나, 나 때문이잖아요!”

    못마땅하게 눈썹을 치켜세운 화희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차가운 그의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눈앞에 선 화희는 그녀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싸늘한 적의만 내비치는 눈빛이 전생의 그 남자와 똑같았다.

    수아는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하는 양손을 꽉 쥔 채 고개를 저었다.

    “윤성이는 오히려 나 때문에 죽을 뻔한 거잖아요! 다 나 때문에…….”

    “헛소리.”

    대번에 그녀의 말을 무시한 화희가 더 듣기 싫다는 듯 그녀를 비켜 걸음을 옮겼다. 그와 눈이 마주친 윤성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본 수아는 급히 화희를 불렀다.

    “박화희 씨!”

    “........”

    “화희 씨, 제발 나 좀 봐요!”

    “.......”

    그녀를 무시하고 걸어가던 화희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미간을 찌푸린 화희가 윤성을 노려보던 눈길을 그녀에게로 고스란히 돌렸다.

    수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화희가 그 남자처럼 자신을 대하는 것보다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억울한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또다시 이런 상황에 처하다니, 기가 막히고 억울했다. 이번엔 윤성이까지 죽을 뻔했다.

    앞으로 이런 상황을 더 반복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거지 같은 상황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다면 살아남아 봤자 온전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서든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애초에 잘못 생각했던 거였다. 전생 따위가 뭐 대수라고. 내가 살아남아야 뭐든 할 수 있는 거였는데.

    입술을 깨문 채 희게 질린 그녀를 본 화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뿌리치려 했다. 수아는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충동적으로 말했다.

    “결혼해요!”

    “……뭐?”

    멈칫한 화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수아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결혼하자고요.”

    “…….”

    “나와 결혼해 줘요.”

    제발, 그녀가 덧붙인 말에 화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수아는 하, 짧게 내뱉는 윤성의 한숨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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