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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54화 (54/100)
  • 54화

    * * *

    “바, 박 이사가 왜, 왜 저러는 건가, 대체?”

    화희에게 어떻게 당했는지 몰라도 사색이 되어 방에서 뛰쳐나온 박 회장이 민철을 붙들고 다급하게 물었다.

    밀고 들어갈 땐 하찮은 문지기 취급했으면서 얼굴도 참 두껍지. 민철은 혼비백산한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마뜩잖게 대답했다.

    “회장님께서 민수아 씨를 납치하시는 바람에 대체 몇 사람이 치도곤을 당했는지 아십니까?”

    “납치라니, 자네까지 왜 이러나? 손주며느리 얼굴 좀 본 게 그깟 대수라고.”

    “그러니까 그 일로 손주와 손주며느리가 멀어지게 생겼으니까 큰일 아닙니까?”

    다소 과장을 섞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둘의 분위기가 안 좋아졌으니까. 그들 덕택에 민철은 며칠째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화희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난 대체 언제 변호사다운 일만 할 수 있는 거냐고.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박 회장이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뭐야? 그깟 게 감히 박 이사를 찼다-.”

    “쉿, 쉿!”

    민철은 얼른 더 엄한 소리를 뱉기 전에 박 회장을 끌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 비난했다.

    “이사님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리 험한 말로 부르십니까? 그리고 그때 민수아 씨가 이사님을 안 말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면서요.”

    대노한 기색이었던 박 회장이 정곡을 찔린 것처럼 눈썹이 꿈틀거리며 침음을 흘렸다.

    민철은 머릿속으로 셈하느라 바쁜 박 회장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두 번 다시 귀찮게 하지 말라고 경고할까 하다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겉으로야 화희와 조손 사이지만, 실질적으로 들여다보면 늘 아쉽고 지는 건 박 회장이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나빠질 일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여기까지 쫓아왔을 땐 또 뭔가 아쉬운 게 있나 싶어서 거슬리긴 했지만, 어떤 면에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참 대단한 양반이었다. 화희에게 그토록 당하고도 그를 이용해 먹겠다는 굳은 의지를 버리지 못하는 걸 보면. 어떻게 보면 박 회장은 손자에게 참 맹목적이었다. 혈연으로 대우해주지도 않고 하대하기 일쑤인데도 무슨 일만 생기면 화희부터 찾아왔다.

    하긴 화희의 능력을 접하는 누구나가 다 그런 식이긴 했다.

    도와달라고 매달리거나 경외하거나 혹은 괴물 취급하거나.

    박 회장은 세 가지 다를 쉴새 없이 오가는 편이었고 자신은 경외하는 쪽에 가까웠다.

    이제껏 민철이 봐 왔던 사람 중에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민수아 뿐이었다. 오로지 그녀만 ‘화희’의 능력보다 ‘성격’을 문제 삼았다. 덕분에 그녀를 만난 이후 화희가 온화하게 변했는데 사이가 좋지 않은 요즘은 엇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민철은 박 회장을 흘기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하여튼 회장님이 민수아 씨와 만난 후부터 지금까지 이사님 상태가 죽 이 모양입니다. 민수아 씨가 단단히 화를 냈거든요.”

    “허, 아무리 그래도 어이가 없구만. 그깟 계집애 때문에 박 이사가 나를 이렇게 박대하다니…….”

    박 회장은 민철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리다 이사실을 흘깃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했다.

    제까짓 게 그런 능력을 갖고 이 집안에 태어났으면 응당 몸 바쳐 충성하란 뜻인 것을, 기껏 여자애 하나 때문에 내게 깽판을 쳐?

    박 회장은 혀를 차며 성을 내다가 끝내는 입술을 비틀고 웃었다.

    사실 화희 그놈이 귀신 같건 사람 같건 알 바 아니었다. 자신이나 회사에 도움이 되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는 부신 건설의 회장 직속 비서실에서 은밀히 보내온 서류를 떠올렸다.

    부신 건설은 뒷골목 용역업체부터 시작해 빠른 속도로 재계 반열에 오른 뒤가 구린 기업이었다. 특히 그 기업의 수장인 천부신 회장은 수상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인데, 무슨 수를 쓰는지 돈을 불리는 것 하나만은 마이다스의 손이었다.

    그런 자가 요즘 정치 인사들에게 뒷돈을 대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비선 실세를 위해서는 온갖 더러운 일도 마다치 않는다고.

    그런 부신에서 건설 쪽이 부진한 P그룹에선 매우 구미가 당긴 제안서를 보내왔다. 겉보기엔 그럴듯하나 아무래도 부신 건설의 속내가 궁금하여서 화희에게 진위를 가려내라 한 것이었는데.

    계약서의 글자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보면 이용만 당했을 확률이 컸다. 그러나 거절하기 아쉬웠다. 기업 일을 하다 보면 손을 더럽혀야 할 골치 아픈 일이 많았기에 천 회장의 술수가 탐났다.

    그러려면 일단 화희가 구린 술수에 당하지 않도록 봐줘야 해서 찾아왔던 차였다.

    “박 이사를 통하려면 일단 그 계집, 아니 ‘손주며늘아가’부터 구워삶으란 말이렷다?”

    민철이 당장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박 회장은 당장 수행 비서를 불러들여 요양원 원장실에 연결하라고 지시한 뒤 머릿속으로 판을 짜기 시작했다.

    * * *

    “우리 박화희 이사와 함께 좋은 일 많이 하시는 직원분들에게 감사한 인사를 전하고자 이런 소소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박 회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직원들이 손뼉을 치며 열렬히 호응했다.

    옆에 앉아 있던 한 대리가 마뜩잖은 표정을 숨기려 고개를 숙인 수아의 팔꿈치를 툭툭 치며 앞쪽을 눈짓했다.

    마이크를 내려놓은 박 회장이 전 직원 중 수아만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마 전 화희에게 전해 주라는 서류를 거절한 그녀에게 노해서 으름장을 놓던 것과는 정반대 태도였다.

    왜 이러시는 거지? 이번엔 또 무슨 속셈일까.

    얼떨떨하게 박 회장의 시선을 피하는 수아에게 한 대리가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와, 지금 회장님이 민 팀장님한테 아는 척하신 거죠? 맞죠?”

    “그럴 리가요. 제가 보기에 회장님은 한 대리님 보고 웃으신 것 같은데요.”

    “음, 아닌 것 같은데. 어, 그런데 이사님은 안 오세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 아, 전 이사님과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한 대리의 입에서 나온 이사님 소리에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순간 울컥해서 한마디 할 뻔했던 수아는 어색하게 둘러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 분명 회식이라고 들었다. 공식 오픈 전에 모든 부서가 화합하자는 좋은 취지였다.

    버스까지 대절해 향한 회식 장소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콘퍼런스 호텔이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낯설어하던 찰나, 갑자기 박 회장이 등장했다.

    요양원 밖으로 나오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입사할 때 간단히 인사만 나누었던 원장이 참석하라며 직접 전화까지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화희는 이 자리를 알고 있는 걸까?

    혹시 화희가 오지 않을까 수아는 슬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날 자리를 피한 화희는 일주일 째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집주인을 내쫓은 셈이 된 수아는 여러 번 집을 나오려고 했지만 결국 그대로 머물렀다.

    이대로 그를 피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갑자기 그를 마주하는 것은 아직 조금 벅찼다.

    헉, 날카롭게 숨을 들이쉰 한 대리가 수아의 팔꿈치를 또 툭툭 건드렸다.

    “회, 회장님이 이쪽으로 오세…… 어, 어딜 가요?”

    “잠깐 화장실 좀요.”

    수아는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앉아 있다간 박 회장이 대 놓고 아는 척할 것 같았다.

    연회장을 빠져나와 로비에서 한시름 돌리는 그녀 앞으로 정장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회사의 간부진으로 보이는 중장년층 무리를 젊은 사람들이 서류 가방을 들고 뒤따르고 있었다.

    무심코 그들을 쳐다보던 수아는 선두 무리 중 유독 눈에 띄게 키가 크고 훤칠한 남자를 놀라 바라보았다.

    윤성이었다.

    슈트 차림으로 무표정하게 정면만 응시하며 걷는 그는 그녀가 알던 천윤성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에게 친근하게 굴며 다채롭게 변하던 앳된 표정은 가면을 쓴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문득 윤성이 시선을 느낀 것처럼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윤성은 짐짓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흠칫 제 옆의 남자를 흘깃거렸다. 그리고 바로 모르는 척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윤성이 눈치를 본 남자는 육십 대 중반에 콧날이 수려하고 이마가 매끈한 중년으로 한눈에 봐도 그 무리에서 제일 높은 위치의 사람이었다. 걸음걸이며 분위기에 남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누구지? 집안 회사 일을 돕는다더니 혹시 저 사람이 아버지는 아니겠지? 전혀 안 닮은 걸 보면 아닌 것도 같은데…… .

    윤성이 아는 체하기 곤란한 자리인 것 같아서 수아는 다른 곳을 보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그 중년 남자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와 눈과 마주치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꿰뚫어 보는 것처럼 강렬한 시선이었다.

    순간 경직돼서 굳어 버린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가 싶던 남자의 눈가에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만의 착각인 듯, 중년 남자는 곧 표정 없는 얼굴로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지나치자 지독한 남자 향수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기묘하게 기분 나쁜 냄새였다.

    금방 속이 울렁거리고 매슥거렸다. 구역질까지 치밀어서 입을 막은 수아는 급히 화장실을 찾았다.

    “아, 체했나?”

    아무리 향수 냄새가 독해도 그렇지 구토까지 하다니 몸 상태가 매우 안 좋은 듯했다. 아까 연회장에서 몇 입 먹은 게 단단히 얹힌 것 같았다.

    이대로 박 회장을 계속 대면하기도 그렇고 체했다는 핑계로 먼저 회사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수아는 한 대리에게 전화를 걸면서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코끝에 역한 향수 냄새가 진득하게 달라붙은 것 같아서 얼른 찬 공기를 쐬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찾아 버튼을 누르려는데 순간 어지러워서 손을 헛짚고 비틀거렸다.

    “……누나? 어디 아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단단한 손이 그녀를 부축했다. 윤성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 윤성아. 여긴 웬일이야?”

    “회사 일 때문에. 아깐 꼰대 때문에 아는 척 못 했어. 그런데 어디 아파? 얼굴이 많이 창백해.”

    그 사람이 아버지가 맞았구나. 중년 남자의 기묘한 눈초리를 떠올리던 수아는 속이 또 울렁거리는 것 같아서 그만 그를 돌려보내려 했다.

    “좀 체했나 봐. 회사 회식이었는데 좀 긴장했더니. 난 괜찮으니까 그만 들어가 봐. 수고하고 나중에 제대로 보자.”

    그러나 윤성은 그녀 대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주며 고개를 저었다.

    “어디로 가는데? 안색이 안 좋아, 데려다줄게.”

    “일하는 중에 나왔다며. 택시 탈 거라서 혼자 갈 수 있어.”

    “잔말 말고 택시 타는 데까지라도 같이 가. 이렇게 버티는 게 더 시간 끄는 거야.”

    버티던 윤성은 빈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먼저 타서 그녀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수아는 그를 따라 타며 중얼거렸다.

    “정말 그놈의 츤데레 컨셉은 버리지 못하겠니?”

    문이 닫히자 로비 층 버튼을 누른 윤성이 그녀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보고 싶었어.”

    “……응?”

    아깐 그렇게나 무표정하더니 금방 애잔해지는 그의 표정에 수아는 당황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깨를 으쓱한 윤성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투덜대듯 대꾸했다.

    “그 정도는 해도 되잖아.”

    “아, 뭐…….”

    수아는 그를 돌아보다 문득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 괜찮아? ……어!”

    그녀가 조심스레 묻는 순간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덜컹 멈췄다.

    휘청한 그녀를 붙잡아 준 윤성은 17에서 바뀌지 않는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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