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 *
며칠째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니, 복잡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엉망진창이었다. 감정이 끈적끈적한 진흙이 되어 이성을 잡은 것처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그녀의 가족을 죽였을까.
당시에는 큰 충격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냈는데 모든 걸 기억하는 그의 말도 들어봤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난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 당신마저 내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까?>
여자의 처절한 감정에 잠식되려 할 때마다 화희의 말이 이성을 툭툭 건드렸다. 그럼에도 진실을 알기 위해 그와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여자의 감정은 진저리가 날 만큼 괴롭고 버거웠다.
화희로부터, 과거로부터 도망치듯 잠시 떠나 있고 싶었다.
수아는 결국, 수십 번의 망설임 끝에 집을 나서기로 했다. 빈 몸으로 왔던 터라 짐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새벽녘 집안은 한밤중처럼 스탠드 불빛에 은은히 잠겨 있었다.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해서 빡빡한 눈을 비비던 수아는 계단 중간에서 멈춰섰다. 현관문 소리가 나는가 싶었는데 화희가 막 들어온 듯한 모습으로 그녀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하필이면. 마주치는 걸 피하려고 일찍 나섰는데 정통으로 마주칠 건 또 뭐지.
눈살을 찌푸린 수아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짧게 고개를 까딱인 화희가 먼저 등을 돌렸다.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멈춰선 그녀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생을 자각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점점 멀게만 느껴지던 화희가 이젠 아예 낯설었다.
불과 저번 주만 해도 바짝 붙어 앉아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며 웃고 떠들었는데, 그때를 떠올리면 살인자라고 그를 비난했던 게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상했다.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자마자 갑자기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 왔다.
숨죽인 신음을 흘린 수아는 휘청거리면서 벽을 짚었다. 아픈 가슴 쪽을 문지르려던 그녀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침실로 들어간 줄 알았던 화희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시에 그와 똑바로 눈이 마주치자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하룻밤 사이에 야윈 턱과 성마른 눈빛, 자신을 보는 화희의 시선이 차갑게 느껴졌다. 분명 염려 섞인 표정이었음에도.
“어디 아픕니까?”
그녀가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낮게 물으며 계단 가까이로 걸어왔다.
얼른 뒤로 한 계단 올라선 수아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도망치듯 물러선 그녀를 훑은 화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거친 표정과 달리 팔짱을 낀 채로 몇 걸음 물러나서 그녀를 살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사이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수아는 지끈거리던 명치 끝에서 손을 떼며 생각나는 대로 중얼거렸다.
“안 아파요. 안색은 그쪽이 더 안 좋은데요.”
“……그쪽?”
화희가 코웃음 치며 되묻자, 수아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대체 그를 어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공기가 답답해졌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화희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등을 돌리려는 것처럼 움직였다. 머뭇거리던 수아는 미리 말해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저기요, 서로 불편한 것 같으니 집에서 나가려고요. 그동안 신세 진 건 꼭 갚…….”
“그 말, 끝까지 다 하면 민수아 씨는 아주 불편해질 텐데.”
그녀의 말을 들으려는 것처럼 멈칫 멈춰섰던 화희가 넥타이에 손가락을 걸어 잡아당기면서 말을 끊었다.
“당신은 고작 불편한지 몰라도 나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죽도록 인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봐주는 셈 치고 내 곁에 있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잠시 머뭇거렸던 수아가 작게 고개를 젓자 화희가 반쯤 풀린 넥타이에서 손을 떼고 불쑥 그녀를 향해 길게 팔을 뻗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피해 몇 계단이나 물러섰다.
그런 그녀를 훑은 그가 쓰게 웃으며 뻗었던 손을 힘껏 주먹을 쥐었다. 콱, 별안간 계단 옆의 벽을 세게 내리치는 소리가 섬뜩했다.
“뭐 하는 거예요! 괜찮아요?”
놀란 수아가 외치자 잔뜩 찌푸린 그는 다친 손을 감싸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등에서 금방 피가 번지는 것을 본 수아가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 상처를 살펴볼 뻔했다.
그러다 입꼬리를 올려 자조적으로 웃는 화희와 눈이 마주치자 저절로 걸음이 멈춰졌다.
화희가 무표정하게 다친 손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나갈 테니 당신 혼자 이 집에 편히 있어요.”
“뭐, 뭐라고요?”
그의 행동을 이해하기도 전에 그는 휙 몸을 돌려 침실 쪽으로 가 버렸다. 그의 걸음마다 붉은 피가 바닥으로 점점이 떨어졌다.
붉은 피를 보자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무섭고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정말 화희가 그녀의 가족을 해쳤던 거라면 어떡하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지는 이 마음은 뭘까.
수아는 짐을 든 채 한동안 바닥에 떨어진 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앉은 화희는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손끝으로 단검을 돌렸다.
손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검 끝이 제 마음 같았다. 주인을 위해 무엇이든 베어 버리고 싶으나 제 소명을 다하지 못하고 오명만 뒤집어쓴 저주받은 물건.
그것이 현재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사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인내였다. 굳이 제 발로 걸어와 화풀이를 자청하겠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회장님, 오늘은 정말 안 됩니다. 이사님께서 기분이 매우 좋지 않…….”
“비켜서! 어디 변호사 나부랭이 따위가 감히 내 앞을 막아?”
민철과 실랑이하다 이사실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친 것은 박 회장이었다.
화희를 발견하고 기세등등하게 방 안으로 들어오던 박 회장이 그의 손에 시선을 주고 놀라 멈춰섰다.
동시에 빠른 속도로 날아간 단검이 아슬아슬하게 박 회장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 문에 꽂혔다.
“이, 이런 배은망덕…… 한!”
놀라 피하려던 박 회장이 문에 등을 세게 부딪치고 노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는 문에 깊게 박혔던 검이 부메랑처럼 화희의 손에 다시 돌아가는 걸 보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검을 쥐고 자리에 일어난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은망덕이라…… 당신이 내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기나 하던가?”
“고얀 놈, 넌 이 할애비에게 왜 그리 고약한 게냐?”
“그럼 어릴 때처럼 다락에 가둬 굶기든지.”
가늘게 뜬눈으로 새삼 제 ‘조부’를 훑은 그는 느릿하게 움직였다. 평소와 다른 상태의 그를 그제야 눈치챘는지 박 회장이 주춤 물러섰으나 닫힌 문에 길이 막혔다.
“뭐, 새삼 다 지난 일을…….”
“지금 내가 그깟 걸로 화를 내는 걸로 보입니까?”
그에게 다가간 화희가 박 회장을 내려다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그리고 불쑥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잡고 전생의 기억을 머릿속에 억지로 욱여넣었다. 엄밀히 말하면 기억이라기보다는 ‘장면’을 쏙 뺀 고통이었다.
<액받이 주제에 아직도 자존심만은 고고하군. 차라리 내 청혼을 받아들이지 그랬소? 그랬다면 이 몸이 나긋하게 잘 길들여서- 으아악!>
환영에서 화희가 휘두른 검에 베인 박 회장이 겁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부들부들 떨었다.
화희는 남의 기억에 새겨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천년이나 지났어도 그녀에게 지껄인 모욕적인 언사에 치가 떨렸다. 당장 그녀와 자신의 주위에서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싸그리 치워 버리고 싶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충동이었다.
순간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박 회장을 놓아주었다.
더 심하게 굴었다가 행여 수아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살인자라고 낙인찍힌 마당에 죄목 하나를 더 추가할 필요는 없었다.
기겁해서 눈을 부릅뜬 박 회장이 제 팔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 이런 괴물 같은 놈! 내게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버럭 고함을 지른 박 회장이 삿대질을 하다 화희가 눈썹을 치켜세우자 황급히 문을 열고 도망쳤다.
야비한 종자인 주제에 두 번이나 그녀에게 구제받다니, 복도 많지.
잠시 문을 노려보던 화희는 손에 쥔 단검으로 제 손바닥을 세게 그었다.
검붉은 피가 깊게 갈라진 살을 스멀스멀 비집고 나오자, 공중에 흩뿌려 결계를 쳤다. 아까부터 그의 주위를 맴도는 사념들이 유난히 거슬렸다.
결계에 걸린 사념들이 갈기갈기 찢기며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다 사라졌다.
그의 피를 먹고 몸체를 떨던 단검이 이내 잠잠해졌다. 피가 솟던 손바닥엔 어느새 아무런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나으면 곤란한데.
그래도 아플 때만큼은 나를 가여워 해 주는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안 된다. 새벽에 수아 앞에서 부서뜨렸던 손 역시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검을 책상 위에 내던지고 제 손을 뒤집어보던 화희는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그를 간호하다 곤히 잠들었던 수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군가 그토록 진심으로 자신의 고통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했던 건 처음이었다. 사념에 묶이는 지독한 악몽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위안을 받았다.
그때부터였을까, 더는 이러한 생을 반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건.
이번 생에서 반드시 그녀의 ‘저주’를 끝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녀의 기억을 온전히 되살려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수아는 영영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다시는 그의 얼토당토않은 농담에 웃어 주지도, 운동하기 싫다면서 무방비하게 투덜대지도, 물수제비를 뜨며 으쓱해 하지도 않겠지.
“……읏.”
수아를 떠올리자 가슴에서 지독한 격통이 느껴졌다. 화희는 신음을 억누르며 검에 찔렸던 상흔을 짚었다.
수아가 기억을 자각하는 것과 동시에 다시 생겨난 걸 보면 아마도 아마도 자신의 지독한 사념이 깃든 흔적일 것이다.
쉽사리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화희는 희게 질린 얼굴로 가슴의 상흔을 누르며 눈을 감았다.
흔적만 남은 상처는 그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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