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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52화 (52/100)
  • 52화

    사람들의 함성이 멀어지고 그의 충격 어린 시선만 느껴졌다.

    가슴에 검이 박히고도 남자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이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운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수아는 자신이 남자에게 준 고통과 증오를 고스란히 되돌려 받기 위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를 마주 보는 그의 눈빛엔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에게서 차가운 살의를 느낀 그녀는 오히려 옅게 웃었다. 남자는 곧 검을 빼서 제 가족을 죽인 것처럼 자신도 죽일 것이다.

    눈살을 찌푸린 남자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나를 죽이려거든.’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인 그는 단검을 쥔 그녀의 손을 겹쳐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에서 검을 빼냈다.

    스륵, 칼이 그의 피부를 뚫고 나오는 느낌이 선연했다.

    남자는 흠칫 떠는 그녀의 어깨를 꼼짝하지 못하게 붙들고 검을 든 손을 검상 바로 위쪽으로 이끌었다.

    ‘여기를 찔러야 합니다.’

    그녀는 시선을 내려 검이 겨누어진 그의 가슴팍을 보았다. 피로 젖어 들었을 용포는 붉은색 때문인지 흔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어차피 단숨에 그의 숨을 끊을 수 있을 거라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놔요.’

    차라리 수아는 주변의 금군에게 그의 피가 묻은 검을 내보이고 처형당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녀가 움직이자마자 그녀의 손을 제 소매 안으로 숨겼다.

    그녀가 그를 밀어내려 바르작거리자 뒤쪽에서 대기하던 금위군 대장이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듯 다가오려 했다.

    ‘황태자전하, 제단에 오르셔야 합니다.’

    ‘물러서라.’

    ‘황태자전하, 안색이 좋지 않으십-.’

    ‘물러서라 했다!’

    단호하게 그들에게 다가오는 대장을 막은 남자가 그녀를 시야에 가리듯 제 품에 안았다. 수아의 이마가 스치듯 그의 어깨에 닿자 그의 손이 잘게 흔들렸다. 잠시 옅은 신음을 흘린 그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이다지도 나를…… 참을 수 없습니까?’

    대답 대신 그녀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그의 손이 검날로 미끄러졌다. 그러나 제 손이 베는 것도 개의치 않고 검날을 움켜잡은 그는 말했다.

    ‘그대가 기필코 저들의 손을 빌어서라도 죽겠다면 나는 이 자리의 모두를 죽이겠습니다.’

    핏기가 사라진 그녀의 뺨과 잘게 떨리는 입술을 차례로 훑은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붉어진 눈가가 경련하듯 바르르 떨렸다.

    ‘……신부를 놓아주겠습니다. 그러니 지금만은 내 뜻을 따라주세요.’

    놓아준다고?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저절로 손에서 힘이 빠져 검을 놓치고 말았다.

    검을 소매 안에 숨긴 그가 그녀의 어깨를 안은 채 제단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몸에 검상을 입은 남자보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은 오히려 그녀였다.

    “치료부터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호가 걸린 틈을 타 민철이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그의 말은 화희에게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차창 밖을 노려보는 화희의 표정이 시시각각 싸늘해졌다. 그의 셔츠는 언제 피로 젖었냐는 듯 멀쩡하게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운 듯 가슴팍을 손으로 짚었다.

    아직 다 낫지 않은 건가? 대체 무슨 상처인 거지?

    이렇게 기이한 현상은 민수아와 관련된 일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피를 흘렸을 땐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듯했다.

    피를 흘리며 가쁜 숨을 토해 내던 그가 급히 집으로 간다고 했을 때 걱정스러운 마음에 따라나섰지만, 이내 후회가 됐다.

    화회의 표정을 보니 느낌이 매우 좋지 않았다. 요새 그의 기분이 바닥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폭탄처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뒤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사님!”

    현관 앞에 차가 완전히 서기도 전에 화희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놀란 민철이 급히 뒤따르다가 하마터면 그와 부딪칠 뻔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던 화희가 갑자기 멈춰 서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칼에 깊게 벤 것처럼 길게 갈라져 검붉은 피로 젖고 있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민철이 상처를 살펴보려 했으나 화희는 들은 척도 않고 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늦게 따라 들어가자 마중을 나왔던 이 실장이 현관 앞에 서서 민철에게 복도 너머를 눈짓해 보였다.

    화희가 거침없이 향하는 곳은 ‘그 방’이었다.

    “민수아 씨는요?”

    민철이 묻자 이 실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화희가 간 방향으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대체 그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숨을 죽인 민철은 화희의 뒤를 쫓았다. 거침없이 달려가던 그의 발걸음이 ‘그 방’에 다다르자 서서히 늦춰졌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민수아가 보였다. 당황한 민철이 그녀를 부르려 했으나 화희가 들어가고 문이 스르르 닫혔다.

    지잉, 문 근처에 다가가려 해도 공기가 진동하면서 기분 나쁜 생각이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화희가 접근을 막은 것이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철컥, 검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검을 내던진 수아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두 손이 온통 피에 젖은 것처럼 붉게 보였다. 남자를 검으로 찔렀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녀는 묻은 피를 닦아 내려는 것처럼 연신 옷자락에 손바닥을 문질러댔다.

    “……수아 씨.”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나지막이 불렀다.

    고개를 들자마자 허리를 숙여 그녀를 굽어보는 화희와 눈이 마주쳤다.

    소름이 끼쳤다. 이 남자는 살인자였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녀의 가족까지 죽였다. 좁은 방안에 짐승처럼 사람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렀다.

    “……아!”

    “괜찮아요?”

    질색하는 그녀를 살피던 화희가 조용히 물으며 손을 내밀었다. 수아는 속에서 치미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팔을 휘둘렀다.

    쫘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감정을 담아서 쳤는지 그녀의 손바닥이 얼얼했다.

    “저리 가요!”

    터져 나오는 수아의 말에 화희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했지만 지금 수아의 눈에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환영과 현실이 뒤섞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가족들의 죽음에 비통하던 그녀의 심정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들을 죽인 것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 배신감이, 풀 곳 없는 원망과 비통함이, 그녀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비틀린 고개를 숙인 채 뺨을 만지던 화희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왜 나를 보고 싶지 않냐고 물어야 합니까?”

    말투는 무심했으나 목소리가 아주 낮게 가라앉아 쇳소리까지 섞였다.

    뒤늦게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수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현실이다.

    그 여자는 이미 죽었고 화희는 그 남자가 아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저 제 앞에 서 있는 화희가 무섭고 두렵고 끔찍했다.

    수아는 한참을 기다려도 가라앉기는커녕 소용돌이처럼 격하게 치미는 감정을 수습하지 못한 채 눈을 뜨고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 난 그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나약하고 온갖 청승이나 떨기만 하던 그 여자가 싫었어……. 하지만 당신이 그 여자의 가족을 죽였잖아요. 당신이…… 다 죽여서…… 그 여자가…….”

    뺨을 맞은 것보다 그녀의 말이 더 충격적인 것처럼 화희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굳은 표정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 그는 수아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민수아 씨,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아닙니다. 그때 나는…….”

    “당신이 죽였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사죄라도 하는 것처럼 내게 잘하는 거예요? 사람들을 그렇게 죽여 놓고 이제 와서 그런다고-.”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아가 소리치자 화희 역시 괴로운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말을 잘랐다.

    “그만, 민수아 씨.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겁니까? 제발 그만 해요.”

    “당신이야말로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그 여자가 제일 바란 건 당신이 잊어주는 일 같은데!”

    그녀의 마지막 말에 정곡을 찔린 것처럼 움찔한 화희가 대번에 눈빛이 싸늘해져 냉기를 뿜었다.

    “하,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지?”

    수아는 그의 시선에 높은 것에서 떠밀리는 것처럼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처음으로 그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보았는지 깨달았다.

    그 여자를 입에 담자 화희는 심한 모욕이라도 받은 것처럼 화를 내고 있었다. 그에게 지금 이 순간 수아는 전생의 그녀와 그 사이를 가로막은 이물질이었다.

    화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난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 당신마저 내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왜 자신까지 다쳐가면서 나를 살리려고 할까, 나는 그 여자가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봐도 전생이든 현생이든 이렇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 받기만 하는 관계는 정상이 아닌데!”

    “……정상이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은 내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군요.”

    “뭐라고 해도 수많은 사람을 죽인 건 맞잖아요.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가 반란을 일으켜서!”

    “제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말은 집어치워요.”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이 생긴 것만 같았다. 수아와 화희는 서로 다른 곳을 보며 격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수아는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고 맺힌 말을 내질렀다.

    “집어치우라고요? 나도 지긋지긋해요. 내가 왜 당신들 일에 이렇게까지 얽매여야 하는데? 알고 보니 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당신 때문에 그 여자가 죽은 거죠? 당신만 아니라면 나한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잖아!”

    “……나 때문에? 하, 그러니까 민수아 씨, 당신 말은 기억을 되살리고 나니 역시 내가 싫다는 뜻입니까? 내가 싫어서 꼴도 보기 싫다고?”

    수아는 미묘하게 엇나간 남자의 물음을 부정하지 못했다. 정말 화희가 그 여자의 가족을 죽였다면, 살인자라면, 그래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이라면 그녀는 절대로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마, 하는 기대를 품은 얼굴로 미심쩍게 그녀를 바라보던 얼굴이 차갑게 굳기 시작했다.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화희가 집요하게 노려보았으나 수아는 끈질기게 시선을 피하면서도 아무런 말로도 부정하지 않았다.

    “진짜 내가 이럴 줄은…….”

    말을 하려다 멈춘 그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의 주위로 온도가 급격하게 낮아졌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온몸이 알 수 없는 무게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수아가 본능적으로 그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화희가 손짓으로 제지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섰을 뿐인데, 그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무표정한데 섬뜩한 기운이 드리운 건 바로 그 남자와 똑같았다.

    앞에 버티고 서서 내려다보는 그에게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화희가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는 선 채로 삐딱하게 고개를 꺾은 채 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리며 긴 한숨을 내쉰 후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하, 어쩐지 잘나간다 했어. 저 여자가 날 얼마나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도대체 난, 뭘 기대한 거지?”

    대놓고 저 여자라고 말하는 그의 안중에 수아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독하게 상처받은 기색을 풍기는 그의 말에도 반박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심장이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크게 뛰기 시작해서 숨이 차올랐다.

    화희가 몇 번이나 머리를 성마르게 쓸어 넘기다 감정이 주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돌려 증오에 가까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누굴 탓하겠어? 그렇게 잔인한 여자인 걸 알면서도 기다리고 또 기대한 내가…… 빌어먹을.”

    이제까지 싸늘함은 농담이었다는 듯, 숨길 생각이 없는 적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눈과 마주치자 수아의 숨이 막혔다.

    얼어붙은 그녀의 표정을 즐기듯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제 가슴팍을 세게 움켜쥐었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과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낮은 신음에 놀라 수아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휙 돌렸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서 방을 나갔다.

    수아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뱉어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지친 그녀는 눈을 감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지독한 슬픔에 만신창이가 된 느낌이라 그것만도 감당하기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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