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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51화 (51/100)

51화

Part. 6 그대와 나 사이의 침묵은

얼마나 애원했는지 모른다. 제발 이 모든 것을 끝내 달라고.

사람들이 죽는 걸 지켜보는 것은 끝없는 고통이었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그를 죽여야만 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그가 없어져야 죄 없는 이들의 죽음은 끝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도 저도 할 수 없으니 그녀는 차라리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자 했다.

그러나 혀를 깨물어 비릿한 피를 삼키기도 전에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달려들었다.

‘신부…… 이럴수록 그대만 고통스럽습니다.’

강제로 그녀의 입 안에 부드러운 손수건이 물렸다. 그녀는 꼼짝할 수 없도록 자신을 가둔 남자의 품에서 몸부림치며 오열했다.

이 모든 것은 당신 때문이야.

그러니 이 삶을 끝내주지 않을 거라면 제발 내 앞에서 사라져.

“짜증나, 진짜!”

이젠 잠에서 깨기도 전부터 욕이 나왔다. 수아는 눈을 뜨자마자 화를 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여자가 죽고자 했던 건 마지막 순간만이 아니었는지 이번 꿈에서는 제 혀를 깨물었다.

입 안에 남은 듯한 피맛이 끔찍해서 양치를 하고도 수십 번이나 입안을 헹궈내야만 했다.

그저 꿈이라고 여겼을 때는 하루를 시작하면 사라지던 잔상은 검을 본 이후로 끈덕지게 머릿속에 달라붙었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종일 멍했다. 기분이 끝없이 가라앉아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요 며칠 꿈 때문에 잠을 설치고 아침마다 화희와 마주치며 은연중에 신경까지 곤두섰다. 요새 그와의 대화는 늘 어색한 분위기로 끝나기 마련이라 제대로 된 이야기는 하지도 못했다.

“진짜, 어떡해야 하지.”

수아는 중얼거리면서 화원의 잡초를 있는 힘껏 뽑았다. 점심시간을 틈타 몸을 쓰는 일을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했는데 생각은 같은 자리만 맴돌았다.

“언니, 귀한 손에 흙 묻히지 마. 안 어울려.”

아, 얜 또 왜 왔어.

일부러 건물 뒤쪽 화원으로 나왔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주해린이 그녀의 어깨너머로 구경하듯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수아가 못 들은 척 바삐 손을 움직이자 흥, 콧소리를 낸 해린이 대뜸 물었다.

“언니도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네. 화희 오빠도 요즘 기분이 안 좋죠?”

돌아보진 않았지만 수아의 손이 저절로 멈췄다. 옆에 쭈그리고 앉은 해린이 고개를 들이밀고 조잘거렸다.

“진짜 안 보이더라고요. 오빠가 그렇게 화를 내고 가 버려서 나 진짜 무서웠거든. 언니가 잘 좀 말해 주면 안 돼요?”

“뭐가 안 보였다는 거죠?”

“뭐겠어요, 언니지. 그렇잖아요, 그렇게 애를 썼는데 갑자기 보일 리가 있어? 아무리 음기가 센 날이라 해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결국 잡초를 집어 던진 수아는 휙 돌아 해린을 노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은 해린이 팔짱을 끼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수아의 손에 묻은 흙을 보고 얼른 팔을 물렸다.

“어쨌든 언니가 애 좀 써봐요. 다 언니 살리려고 하는 일인데.”

“날 왜 살…… 이봐요, 내가 알아듣게 말해요! 육하원칙에 맞춰서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건지!”

수아는 단호하게 말하며 해린을 아래위로 매섭게 훑었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한데 넌센스 퀴즈까지 받아 줄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

오늘이야말로 불쑥 나타나서 지 말만 하고 가는 버릇을 고쳐 주겠어.

그녀는 해린이 흙 묻은 제 손을 경계하듯 힐끔거리는 것을 보고 위협하듯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확 묻혀버릴 거야.”

“읏, 저리 치워요! 나 흙 싫단 말이에요. 온갖 벌레랑 지렁이가 꿈틀거렸던…….”

“그러니까 대답해요.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뭘 봤다는 건지.”

해린이 제 보라색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제, 12시쯤. 원래는 밤에 봤어야 했는데 오빠가 밤에는 언니랑 있겠…… 아, 알았어요. 사언정, 12시에 오빠가 그날을 보고 싶다고 갑자기 왔어요.”

“그날?”

“언니가 처음으로 죽은 날 말이에요. 오빠가 전부터 그날을 자세히 보고 싶어 했거든.”

처음으로 죽은 날? 뜻밖에 말에 충격으로 잠시 멍해졌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전생의 여자가 검으로 제 심장을 찌르려던 장면이 뇌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수아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해린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제라면 박 회장이 그녀를 개인 별장으로 데려간 날이었다. 그러니까 그때 화희는 주해린과 ‘그날’을 보려고 했다는 건가?

“당신이 그걸 어떻게 봐? 그게 가능하다고요?”

“난 전생을 기억할 수 있으니까요. 자세히 보이는 건 아니지만 오빠처럼 영기가 넘치는 사람이랑 있으면 더 잘 보이거든.”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다른 건 몰라도 그날 일에 대해선 알죠. 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 자리에 있었다고? 어…… 어떻게?”

수아가 놀라 묻자 해린이 제 얼굴에 턱을 괴고 방실방실 웃었다.

“어떻게 아냐니까!”

수아는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해린에게 왈칵 짜증이 일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움찔 놀란 해린이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투덜거렸다.

“아, 깜짝이야. ……언니, 참 많이 변했어. 그땐 말도 거의 안 하고 맨날 울기만 하더니.”

“……뭐?”

“예쁜 얼굴 아깝게 맨날 상복만 입고 허구한 날 창밖만 보면서 울었잖아.”

“…….”

“오빠가 준 예쁜 옷들은 전부 시녀들만 주고. 그래서 오빠도 덩달아 시시한 옷만 입었잖아, 금색 용포가 진짜 잘 어울렸는데. 언니가 용포 입으면 가까이 못 오게 해서 오빠가 맨날 옷 갈아입고 언니 만나러 간 거 알아?”

수아는 얼음처럼 굳었다. 해린이 전생의 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꼭 눈앞에서 본 것처럼. 어쩌면 꿈보다 더 자세하게.

그녀의 놀란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던 해린이 제 턱에 손 받침을 하고 방실 웃었다.

“어떻게 아냐고? 그러니까 보면 모르겠어요? 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수아는 저도 모르게 해린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보고 있자니 퍼뜩 납골당 앞, 처음 봤을 때 스쳐 지나갔던 환영이 떠올랐다.

주해린이 그녀의 꿈에서와 꼭 같은 차림을 하고 서 있었던. 검고 긴 머리칼의 가채, 붉은 혼례복을 입은 해린이 박제된 짐승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신당 제단 앞에 서 있던 모습을 떠올리며 수아는 망연자실 중얼거렸다.

“……설마 당신이 그 여자였어?”

“응? 아니야, 바보.”

해린이 어이없다는 듯 웃기 전에 수아는 제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꿈속에서 거울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전생의 여자는 수아의 얼굴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수아는 그 여자와 많이 다르다는 건 화희의 말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너, 그 여자와 똑같이 생긴 거였어?”

“어머, 자기를 그 여자라고 하니까 웃긴다. 그리고 똑같은 게 아니라 비슷한 거야. 내가 훨씬 예쁘거든? 언니 미모가 너무 아까워서 내가 얼마나 꾸며주려고 노력 많이 하는데.”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나야 모르지, 왜 언니 얼굴로 태어났는지. 근데 예뻤던 언니가 부럽긴 했어. 그래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죽을 때까지 언니 얼굴만 보고 있어서 그랬나?”

혼이 빠진 표정을 한 그녀를 보고 해린이 웃었지만 수아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생에 죽었을 때 해린이 옆에 있었다는 것도, 그녀가 하필 같은 얼굴로 태어났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만 모르는 일이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제 손으로 심장을 찌르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여자의 모습의 잔상이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야오옹, 저 멀리 어디선가 희미하게 고양이의 울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허무하게 스러져가는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 * *

사무실에 돌아와서도 해린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결국 수아는 급한 일만 처리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화희를 찾았지만, 이 실장이 일이 있어서 늦는다고 먼저 식사하라 했다는 그의 말을 대신 전해 주었다.

생각이 없다는 말로 저녁 식사를 거른 수아는 방안을 서성였다. 화희에게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다.

왜 당사자인 자신을 두고 해린에게 전생의 일을 물으려고 했을까? 뭘 알아낸 게 있을까?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하루빨리 뭐라도 알아내지 않으면 피폐한 여자의 감정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화희를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던 수아는 방을 나와 아래층을 서성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어느새 ‘그 방’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머뭇거리던 수아는 천천히 문을 열어보았다.

박물관 같은 내부는 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수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다 홀린 것처럼 그것을 찾았다.

검은 처음 봤던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검게 말라붙은 섬뜩한 핏자국을 노려보던 수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막상 그 끔찍한 장면을 다시 보려니까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용기를 내서 검을 잡았다. 까슬하고 차가운 금속의 재질이 느껴지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휘익, 발밑이 한없이 꺼져 들었다. 기절할 것처럼 어지럽고 숨이 막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세상이 뒤바뀌어 있었다.

‘신황제폐하 만세!’

사람들의 환호성에 귀가 먹먹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손이 묶인 것처럼 무거워서 내려다보니 자신은 긴 소맷자락이 바닥에 끌릴 정도로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풍성한 소맷자락 안으로 꽉 움켜쥔 검이 느껴졌다.

흰 비단에 금색의 꽃이 새겨진 신복을 입은 그녀는 신당의 제단 앞이었다. 건국일을 맞이하여 신당에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는 중이었다.

제단 아래에서 고위 관직들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현 황제가 막 축원을 끝냈다.

이제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제단에 올라서 축원을 읊을 차례였다. 그러나 제단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남자와 나란히 선 수아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신황제폐하 만세!’

궁 문밖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후려쳤다.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들이 추앙하는 이들이 식인귀라는 것을.

수아는 모든 것을 알고도 단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죄 없는 목숨들이 단숨에 스러졌다.

바로 남자와 그의 아비 때문에. 아니, 이 남자 때문에.

이 남자야말로 황제의 검이자 식인귀 그 자체였으니까.

수아는 옆에 선 남자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잠시나마 그에게 흔들렸던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남자가 그녀의 가족들을 죽였다.

너무 늦게 알고 말았다. 귀양 간 줄 알았던 자신의 가족들이 남자의 명으로 좁은 방 안에 갇혀서 타 죽었다는 걸.

현실을 믿을 수 없어 차라리 모든 걸 잊고자 혀를 깨물어 자진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했고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제식 단상으로 향하려던 남자가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신부.’

수아는 잠시 희고 단정한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망설임은 잠시였다.

그녀는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리고 소매 안으로 쥐고 있던 검을 힘껏 내질렀다.

옷을 뚫고 살과 근육을 가르는 느낌이 끔찍했다.

‘……!’

남자는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그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친 채로 검을 더욱 깊게 밀어 넣었다. 짧은 숨을 뱉어낸 남자가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틀거렸다.

그에게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그녀는 그제야 눈을 감고 검을 놓았다.

민철은 불안하게 자신의 상사를 지켜보았다. 웬일로 칼 같은 귀가 시간을 어기고 민수아를 만나러 가지 않는가 했더니 그의 기분이 실시간으로 바닥을 치는 게 보였다.

박 회장 일로 수아와 싸우기라도 했나? 아닌가, 그전에 주해린을 찾아갔을 때부터 심기가 안 좋은 것 같았는데.

오늘 하루만 해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일은 일대로 다 하고 화풀이는 화풀이대로 다 했다.

회사에서는 재무팀, 기획팀, 광고팀 부장들을 줄지어 소환시키더니 밖에서는 계열사 불시 감찰에, 지금은 서태산을 족치고 있었다.

수아가 퇴근하고 없는 요양원에 들이닥친 화희는 서태산을 불러 놓고 위협했다.

“이곳에서 한 번만 더 수아 씨가 위험에 처하면 그땐 마지막이야.”

서태산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긁다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나. 내가 막는 것도 한두 번이지, 어차피 만날 인연은 만나게 되고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돼 있어.”

“그딴 말로 책임을 회피하겠다?”

“너무 하네, 그려. 박 회장 그 능구렁이가 갑자기 떼로 밀고 들어왔는데 그럼 어쩌라고. 자네도 막지 못한 일을 나더러 어찌 막으라는 거야? ”

정곡을 찔린 듯 화희의 눈빛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책상에 기대 팔짱을 끼고 서 있던 그는 몸을 길게 펴고 위협적으로 서태산을 내려다보았다.

움찔한 서태산이 눈을 굴리며 변명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도 좀 이상하지 않나? 비둘기 요양원 때부터 말이야. 자네랑 나랑 지키고 섰는데도 호로자식이 불을 질렀잖아. 저번에 주차장 일도 그렇고. 이상하게 나도 전혀 안 보였…… 알았어, 알았다고. 좀 더 신경 쓸게.”

“너. ……하!”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던 화희가 갑자기 짧게 신음을 뱉으며 가슴팍을 손으로 짚었다.

서태산과 민철이 당황해서 그를 지켜보다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화희의 흰 셔츠가 붉은 피로 흥건히 젖어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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