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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50화 (50/100)
  • 50화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박 회장이 노기 어린 말투로 혀를 찼다.

    “할애비가 부른 것 중에 제일 빨리 오는구나, 괘씸한 녀석.”

    “늦어서 미안합니다, 수아 씨.”

    놀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팔짱을 푼 화희가 짧게 인사했다. 낮은 목소리가 적잖게 화를 억누르는 기색이어서 고개를 끄덕인 수아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난 괜찮으니 그만 가자는 표시였지만, 그는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서 탁자의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나도 오라 가라 함부로 못 하는 분을 감히 낚아채신 이유가 고작 이것 때문입니까?”

    “무슨 말을 그리 쌍으로 험하게 하나? 네가 도통 얼굴을 비추지 않으니까 이 할애비가 겸사겸사 부른 것 아니냐.”

    “못 본 사이 노망이 느셨군요. 분명 연을 끊겠다 말씀드렸을 텐데.”

    “오랜만에 보는 손주놈 인사가 참으로 정겹구나. 네놈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기 전까진 내, 노망도 미룰 게다.”

    조손의 대화가 듣기 매우 껄끄러웠다. 일어나려다 당황한 그녀가 둘을 번갈아 보는 사이 선 채로 봉투를 던지고 대충 서류를 넘겨보던 화희가 차게 코웃음 쳤다.

    “그러니까 이 계약서의 저의를 알고 싶으시다?”

    “늘 하던 대로 하면 된…… 뭐 하는 게냐?”

    박 회장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화희가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로 휙 내던졌다. 계약서처럼 보이는 종이들이 어지럽게 흩날리며 사방으로 떨어졌다.

    부신 건설이라면 윤성이네 회사 아닌가?

    제 앞에 떨어진 종이를 확인하던 수아는 순간 놀라서 숨을 죽였다.

    종이 위 글자가 마치 움직이듯 모양이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가 세로로 좁혀졌다. 제 눈을 의심하며 자세히 보려는데 갑자기 종이에서 타는 것처럼 새까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흩어진 종이들을 보며 못마땅하게 눈썹을 치켜세우던 박 회장 역시 침음을 삼켰다.

    종이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촘촘한 글자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스멀스멀 움직여 허공에 떠오르고 있었다. 한글과 숫자가 몸을 털며 날아간 계약서는 드문드문 몇 글자만을 남기고 곧 하얗게 변했다.

    까만 먼지처럼 공중을 부유하는 글자들을 보던 수아는 몸을 떨었다. 피의 결계와 비슷하지만 새카맣고 끈적끈적하게 움직이는 글자들은 어딘가 불길해 보였다.

    화희가 손바닥을 펼치자 공중에 부유하던 글자들이 벌레떼처럼 꿈틀거리면서 몰려들었다. 까맣게 뒤덮인 제 손을 천천히 뒤집어 보던 화희가 불쑥 박 회장을 쏘아보았다. 글자들에 둘러싸인 그의 눈빛이 검게 번뜩였다.

    “말이 안 통하니 몸으로 알게 해 드리지.”

    “회사 일 좀 돕는 것 갖고 뭐 그리 유세를…… 바, 박 이사!”

    적잖게 놀란 듯 그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박 회장이 멈칫 몸을 뒤로 물렸으나 한발 늦었다.

    눈살을 찌푸린 화희가 휙 손을 펴자 벌레떼처럼 떠오른 글자들이 줄지어 그쪽으로 날아갔다. 박 회장이 기겁하며 피하려고 했지만 새까만 글자들은 그의 목과 얼굴에 집요하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괘씸한 놈! 다, 당장 치우지 못해?”

    피부를 파고들 것처럼 꿈틀거리는 글자들이 밧줄처럼 박 회장의 목을 휘감았다. 손으로 긁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글자들을 보던 수아는 경악해서 화희를 쳐다보았다. 그의 싸늘한 표정을 보니 박 회장이 가족이라는 건 아예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불쑥 화가 치민 그녀는 빈 종이를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파리채 휘두르듯 글자 떼가 떠다니는 화희의 손을 힘껏 후려쳤다.

    “지금 위대한 한글로 무슨 짓이에요!”

    멈칫 굳은 화희가 그녀를 돌아보자 수아는 종이로 삿대질하면서 버럭 소리 질렀다.

    “아무리 할아버지가 경우 없는 짓을 했다고 손자까지 똑같이 행동하면 어떡해요?”

    “…….”

    “아, 진짜. 업무 시간에 난데없이 끌려와서 편지 전하는 비둘기 꼴이 된 것도 화나는데, 내가 가족 싸움까지 봐야겠어요? 진짜 이럴 거예요?”

    그녀와 마주 보는 사이, 화희의 차가운 분위기가 눈에 띄게 느슨해졌다. 그가 종이로 얻어맞은 손을 슬쩍 거둬들이자 박 회장의 목을 파고들던 글자들이 새까만 가루가 되어 우수수 떨어졌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고…….”

    박 회장이 노한 기색으로 중얼거리면서 목을 털어내는 것을 보고 그만 참으려고 했지만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씩씩대던 그녀는 손에 쥔 종이를 구겨서 바닥에 힘껏 던져 버렸다. 그러다 금방 다시 주워들고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헛기침한 화희가 그녀를 따라 주변을 둘러보며 미심쩍게 물었다.

    “왜 다시 줍…… 뭘 찾습니까?”

    “쓰레기통이요.”

    “……지금요?”

    “그럼 이딴 걸 방바닥에 버려요?”

    화희가 입을 다물자 목을 털면서도 종이를 향해 손을 뻗었던 박 회장조차 헛웃음을 흘렸다. 잠시 방 안에 침묵이 흐르자 수아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지금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머쓱해진 그녀는 자신에게 쏠린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휙 몸을 돌렸다.

    “수아 씨…….”

    화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녀는 방을 나선 후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동해안답게 거친 자갈 섞인 모래사장은 끝도 없었다.

    수아는 발밑에 걸리는 돌을 주워 바다에 힘껏 던졌다.

    에잇, 더러운 기분아, 날아가라.

    힘이 모자라 모래밭에 돌이 떨어지자 그녀는 다른 걸 들어서 있는 힘껏 던졌다.

    “뭐 하는 겁니까?”

    열 번째 던졌을 때,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던 화희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수아는 열한 번째 돌을 던지면서 쏘아붙였다.

    “보면 몰라요? 화풀이 중이에요.”

    “……설마 수아 씨 상상 속에서 저 돌을 맞는 게 납니까?”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화희도 돌을 집어 들어 수아처럼 힘껏 던졌다. 그녀가 던진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멀리 날아가자 수아는 그를 휙 쏘아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방해하지 마요!”

    “수아 씨도 내 화풀이 방해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왜 문자를 그리 보냅니까? 나보다 강 변하고 더 친해요?”

    “네?”

    지금 이 판국에 그게 중요해……? 수아가 흘겨보자 화희가 보란 듯 돌을 또 멀리 던졌다.

    아이씨, 지기 싫은데.

    투덜거리던 수아는 몇 번 돌을 더 던져보았다. 그래도 그보다 멀리 던질 수 없자 대신 얇은 돌을 골라 들고 공중으로 비스듬히 던졌다. 날아간 돌이 징검다리를 건너듯 퐁퐁퐁 물수제비를 일곱 번이나 떴다.

    화희가 따라 하려는 듯 그녀처럼 던졌으나 돌은 멀리 날아가서 그냥 물 위로 떨어졌다.

    “하, 어떻게 한 겁니까?”

    “글자도 날리는 분이 이건 못 하네요?”

    드디어 이겼어. 수아는 코웃음 치면서 연이어 돌로 물수제비를 뜨려다가 뇌리를 스치는 기억에 움직임을 멈췄다.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지금 화희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던 아버지는 어린 그녀를 붙잡고 몇 시간이나 넘게 설명하고 시범을 보여 줬었다. 싫은 기색 하나 없이 그녀가 성공할 때까지 내내. 끝내 두 번밖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무척 기뻐하면서 지켜보던 엄마한테 큰 소리로 자랑했다.

    파란 하늘, 비릿한 바다 냄새, 엄마의 웃음소리, 제 손에 돌을 쥐어 주던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이젠 몇 남지 않은 추억은 갈수록 희미해져서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고작 이런 희미한 장면뿐이었다.

    안타까웠다. 천 년 전의 전생은 꿈에서라도 이렇게 생생한데.

    대체 어떤 것이 내 기억인 걸까?

    갑자기 멍해져 수아는 답답한 마음에 화희를 등지고 걸음을 빠르게 옮기기 시작했다.

    구두를 신고 걷기란 여간 쉽지 않아서 아예 벗어 버릴까도 싶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자신을 뒤따라오는 화희를 곁눈질하고는 그만두었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말해 두지만, 반경 3㎞ 이내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쩐지. 길을 잃은 줄 알았더니 길 자체가 원래 없는 거였구나.

    이런 상황이라면 오늘 회사로 복귀하기는 무리겠어. 한 대리가 벌써 소문을 내고 다닐 텐데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그녀는 자잘한 문제를 고민하면서 더 곤란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성큼 다가온 화희가 부쩍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혹시 해서 말하는데 진심으로 조부를 어쩌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수아 씨 앞에서 그럴 리가요. 다신 귀찮게 하지 말라고 살짝 겁을 준 것뿐…….”

    “그럼 뒤에서는 괜찮고요?”

    그녀가 휙 돌아보자 팔짱을 끼고 있던 화희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수아 씨가 하지 말라면 안 합니다.”

    “나도 혹시 해서 말해 두는데요, 안 도와줘도 됐어요. 어차피 거절하고 나오려던 차였어요.”

    “그건 수아 씨와 별개로…… 미안합니다. 어쨌든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요.”

    수아는 걸음을 멈추고 화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과하긴 했지만 민철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박 회장도 좋은 할아버지만은 아니었으니 딱히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게다가 이번 경우엔 그녀 때문에 더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언제나 이랬다. 그녀의 안위가 위협당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무섭게 굴었다가도 상황이 해결되고 나면 순한 양처럼 변했다.

    그것이 믿음직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마음대로 화도 못 내는 지금 이 상황이 부담스럽고 짜증이 났다.

    대체 내가 뭐 하고 있는 걸까. 내 인생인데 마음대로 되는 게 있긴 한 걸까.

    “뭔가 이상해요. 당신 주변 사람들은 당신 때문에 나를 이용하려고 하고. 당신은 전생의 여자를 지키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고 하고. 나는 도대체 뭐죠?”

    화희가 고개를 기울여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무거운 목소리로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다신 오늘 같은 일이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수아 씨, 이것만은 확실히 해 둡시다. 나는 당신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수아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신 없이 대꾸했다.

    “알아요, 지켜 준 건 정말 고마워요. 근데 전생 여자 때문이잖아요. 나를 전혀 알지도 못했으면서, 단지 그 이유만으로 나를 지키는 거잖아요.”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닙니다. 처음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저기 말이에요.”

    말이 남은 것처럼 그가 말끝을 흐렸으나 수아는 그만 그의 말을 잘랐다.

    화희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꿈속의 남자가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목매던 애정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런 기분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현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깰 수 없는 악몽 속을 끊임없이 헤매는 기분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걸 싹 잊고 싶었다.

    혹시 화희가 처음에 제안했던 것을 해내면 가능하지 않을까?

    “당신이 말한 그 하루 말이에요. 그걸 기억해 낼 방법이 있다면 당장 하면 어때요?”

    수아가 충동적으로 묻자 미간을 찌푸린 화희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늘진 표정에 꺼리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잠시 기억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나에 대한 감정이 달라졌어요. 완전히 기억하고 나면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 싫어질지도 모릅니다.”

    “내 감정이 달라졌다고요?”

    “아닙니까? 지금 수아 씨는……!”

    화희가 순간 울컥하는 것처럼 언성을 높였다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짧게 한숨을 쉬고서 부쩍 낮아진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를 똑바로 보지도 않고 나와 스치기만 해도 질색합니다. 수아 씨도 느끼고 있잖아요.”

    “저, 그건 생각이 좀 복잡해서…….”

    “내 말은 전생을 다시 겪고 나면 ‘그때처럼’ 내 도움을 받는 것이 죽어도 싫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정 원한다면 안전하게 결혼부터 하죠.”

    그의 아픈 표정에 무겁게 울리는 감정을 지그시 참아내던 수아는 순간 경직됐다.

    그때처럼? 대체 누굴 말하는 거예요? 순식간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 여자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나 역시 화희를 꿈속의 그 남자와 동일시하니까.

    반박할 수도 그렇다고 긍정할 수 없는 애매한 감정은 되새길수록 불쾌감만 더해졌다.

    마음이 복잡해진 수아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닷물이 밀려오네요. 일단 여길 벗어나요.”

    먼저 앞장섰으나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자갈에 구두가 걸려서 비틀거렸다.

    화희가 급히 부축했으나 수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밀쳐진 팔을 허공에 둔 그대로 화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뒤늦게 당황한 수아가 얼른 사과하며 둘러댔다.

    “저기,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사님도 같이 넘어질까 봐서요.”

    화희가 대답하지 않고 시선만 내려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싸늘한 시선의 압박에 수아는 눈을 굴리다가 어색하게 그의 팔에 손을 뻗었다.

    “아, 여기 모래가 묻었네요. 털어 드릴…….”

    그런데 그녀의 손이 닿기도 전에 이번엔 화희가 한 발자국 물러나 그녀를 피했다. 잠시 마주 본 채로 굳었던 둘은 약속이나 한 듯 각자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아는 머쓱해서 머리만 쓸어 넘기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참 어색하고 좋네요. 어색한 김에 카풀의 진정성도 잘 살게 회사까지 태워다 줄래요?”

    “……피곤할 텐데 오늘은 그만 집에 가서 쉬죠.”

    “그럴까요, 그럼?”

    둘은 천천히 왔던 방향으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자갈 섞인 모래밭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지만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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