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잠에서 깬 수아는 양손을 치켜들었다. 아직도 고양이 털의 감촉이 손끝에 생생했다.
“아, 이건 또 무슨 꿈이야?”
내 꿈이 일기도 아니고, 대체 언제까지 이들 이야기를 봐야 하는 건데.
짜증을 낸 수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분이 이상했다.
죽은 그녀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봐서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전처럼 남의 일처럼 생각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그 남자가 이제는 화희로 보여서 곤란한 것 같기도 했다.
이 꿈으로 하나는 알았다. 적어도 화희 혼자만의 마음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건.
그렇다 해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어제 화희와 대화한 이후로 여자의 마지막 마음속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나는 이 검을 구명줄처럼 온 힘을 다해 쥐고 있지만, 이것으로 제 생명을 잘라 낼 것입니다. 두 번 다시 당신과 만날 수 없도록.>
어제 정원에서 하마터면 그에게 대놓고 물을 뻔했다.
전생의 그녀는 당신이 싫어서, 당신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것이냐고.
아마 그것이 문제로 남아서 전생의 일을 꿈으로 꾸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복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출근 준비를 하고 나가려는데 문득 창턱에 올려둔 화병에 시선이 닿았다.
다른 것은 하나도 섞이지 않고 청보라색 델피늄만 모인 꽃다발은 지금 보니 의미가 달리 느껴졌다.
<흰색은 ‘왜 나를 싫어합니까? 라더군요.>
꽃말을 알기 전엔 흰색 꽃도 좋아했는데.
파란 꽃은 그녀에게 주고 흰 꽃만 골라 들고 씁쓸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둡게 그늘졌던 그의 표정이 이젠 이해됐다. 화희가 그토록 그리던 그녀는 그를 증오했으니까.
흰색 꽃을 주지 않았던 건, 그것의 표현인 셈이었다.
설레던 데이트도, 이 꽃다발도 어쩌면 내 것이 아닐지도 몰라.
그러니까 박화희는 자신을 증오하던 ‘신부’를 천 년 동안 수없이 환생했어도 잊지 못해서, 다른 모습으로 환생한 수아에게도 이리 절절매는 것이다. 천하에 둘도 없을 순애보였다.
침실을 가득 채웠던 비단과 옷, 장신구가 떠올라 새삼 수아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요양원 화재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자신이 걸친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화희가 준비해 준 것들이었다.
나는 왜 그의 배려와 애정을 당연하단 듯이 받아들였을까.
아무리 사지에 몰렸다 해도 정체가 의문스러운 남자와 이렇게 한집에 살고 더군다나 마음까지 준 자신도 이젠 믿을 수 없어졌다.
* * *
“아가씨 피앙세 좀 불러주겠나?”
점심시간이 다 되었을 때 뜻밖의 방문자가 수아의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던 수아는 문앞에 버티고 선 노신사를 보고 한 걸음 물러섰다. 화희의 조부, 박 회장 뒤로 남자 세 명이 경호원처럼 바짝 붙어 서 있었다.
그들을 병풍처럼 두르고 선 박 회장이 수아에게 손짓했다.
“자네 피앙세가 요즘 바쁘잖나. 그래서 할애비가 손수 이리 걸음 했다네. 그러니 내 수고를 생각해서 아가씨 피앙세 좀 불러주게.”
상대가 듣기 싫어하는 단어를 반복하는 건 집안 내력인가. 수아가 피앙세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렸음에도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하듯 거듭 말했다.
그의 말은 한마디로 수아더러 대신 화희를 부르라는 것이었다. 민철이 전에 했던 충고가 생각났다.
<회장님은 자기 혈육이라고 귀엽게 봐주는 양반이 아닙니다. 덕분에 어릴 적엔 이사님도 고생 많이 했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어른이라고 굳이 대우해 줄 필요 없다는 의미인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말을 떠올리고 보니 박 회장의 눈빛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어떻게 구워삶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아래위로 훑는 그의 눈길이 거슬렸다.
수아는 뒤로 한 발자국 더 물러서며 슬쩍 거절했다.
“손주분은 회장님께서 직접 전화하시면 더 좋아하지 않을까요.”
“피앙세를 부르지 않겠다면 관두게. 대신 아가씨가 나와 식사라도 함세. 장차 내 손주며느리가 될 지도 모르는데 서로 알아가야 하지 않겠나.”
박 회장이 망설이는 수아를 가는 눈길로 보더니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수행원들이 박 회장을 지나쳐 사무실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크게 놀란 수아가 급히 책상 위에서 핸드폰을 찾아 손에 들자 박 회장이 껄껄 큰 소리로 웃었다.
“뭘 그렇게 무서워하나? 설마 내가 귀한 손자의 피앙세를 어찌할까. 그저 이 할아비는 장차 손자며느리가 될 아가씨에게 밥 한 끼 사 주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 조용히 따라오려무나.”
수아가 질색하며 주춤거리자 박 회장이 인자한 척 웃으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망설이던 그녀가 고개를 젓자 귀한 예비 손자며느리에게 뱀 같은 눈을 번뜩인 박 회장이 수행원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덩치가 큰 경호원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듯 수아의 등에 살짝 손을 대고 밀었다.
그녀는 도움을 청하듯 수행원들의 어깨너머로 복도를 내다보았다. 흔치 않은 광경에 지나던 사람들이 고개를 길게 빼고 사무실을 넘겨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주해린과 있을 때 경악했던 한 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박 회장을 알아보고 옆 사람과 쑥덕거리는 중이었다. 여기서 그녀가 뻗대면 화희와의 소문까지 각색되어 막장 드라마로 소문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화희를 부른다 해도 박 회장은 그가 올 시간까지 기다려줄 것 같지 않았다.
수아는 잠시 고민하다 수행원이 안내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새 별일을 다 겪어서 그런가, 대기업 회장님을 독대하다 못해 납치까지 당하는데 그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다만 오늘 아침에 도망치듯 화희 몰래 출근했는데 그에게 뭐라고 연락해야 하는 지가 더 고민이었다.
막 차에서 내렸던 화희가 민철의 말을 듣자마자 살벌한 욕을 내뱉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무서운 욕에 아찔해진 민철은 저도 모르게 몇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왜 민수아는 나한테 직접 연락하고 그래.
그녀에게서 온 연락을 보고 그도 기분이 좋지 않았건만 화희가 무섭게 나오자 괜히 수아가 원망스러워졌다.
“위…… 위험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화희가 노려보자 민철은 얼른 그녀에게 온 문자를 보여주었다.
[박 회장님이 나를 납치해요. 어쩌죠? 지금 속초 방향으로 빠졌어요. 멀리도 가네요.]
속초 방향이라면 강원도 별장 쪽이었다. 구렁이 노인네의 심산이야 뻔했다. 서울 내에서라면 화희가 수십 분 이내에 수아만 빼내서 가 버릴 게 뻔하니까 아예 먼 곳에서 자리를 만들 셈인 듯했다. 단 한 가지를 간과했지만.
화희가 진심으로 화를 낼 것이라는 것.
성인이 된 이후 화희가 박 회장 일가를 끝까지 쥐어짜지 않은 건 귀찮아서일 뿐이라는 걸 아직 모르는 듯했다.
지금 바로 출발해도 박 회장을 따라잡으려면 두 시간은 족히 걸렸다.
이것저것 따져보던 민철은 어떤 상상을 하는지 몰라도 이를 갈며 잔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시겠습니까?”
화희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참는 것처럼 숨을 고르며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지시했다.
“일단 미행을 붙이고 동태를 파악하다 수아 씨가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이면 당장 도와드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민수아 씨는 속초까지 가도 괜찮겠습니까?”
“나 다음으로 안전한 게 그 영감 곁이다. 사기도 피하는 재주를 가진 놈이니까.”
“저, 이사님. 그런데 만약의 경우 민수아 씨를 돕고 싶어도 회장님을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급하면 총이라도 쏘라고 해. 죽이지만 않으면 상관없다.”
“예?”
민철이 기겁하는 순간, 말과는 다르게 짧게 한숨을 내쉬는가 싶던 화희가 도로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것도 운전석 쪽으로.
“오빠, 기껏 와서 어딜 가요?”
그때 한복을 차려입은 주해린이 저택 안에서 달려 나와 앞을 막았다.
민철은 해린에게 화희를 어서 안으로 들이라고 눈짓했다.
오늘따라 부쩍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화희와 박 회장이 맞부딪치면 P그룹은 끝장이었다. 조부고 손자고 서로 핏줄이라고 봐줄 인간들이 아니라는 걸 굳이 오늘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주위에 눈길도 주지 않고 차에 올라타려는 화희의 앞을 해린이 달려들어 온몸으로 막았다.
“가면 안 돼요! 오늘이 아니면 자세히 보기 힘들댔잖아. 음기가 가장 좋은 날이라면서.”
“……비켜.”
“다른 날에도 시도해 봤는데 다 실패했잖아. 오늘은 뭔가 보일 수도 있어. 나, 컨디션 완전 좋거든. 오늘 놓치고 또 1년을 오빠한테 들볶일 수는 없어. 제발 가지 마, 내가 꼭 봐 볼게!”
화희가 애꿎은 해린을 한참 노려보았다. 그러다 다행히도 그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민철은 그가 확실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경호팀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멀리 간 줄 알았던 화희가 어느새 되돌아와 딱 잘라 말했다.
“수아 씨에게 손끝만 대도 그냥 죽이라고 해. 내가 책임진다고.”
자기 할 말만 하고 휙 가 버리는 상관 덕택에 민철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 * *
가끔 바다가 보고 싶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오게 될 줄이야.
수아는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탁 트인 바닷가 풍경을 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처음 본 수행원들과 차에 실려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해안가 개인 별장이었다. 고풍스럽지만 유별나게 화려한 한옥 별장엔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들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편히 불러 주세요.”
좌식 구조로 된 방으로 안내한 직원이 수아에게 정중히 방석까지 놓아 주고 나갔다. 민철에게 문자로 납치라고 이른 것이 민망할 만큼 대접이 융숭했다.
“식사는 박 이사가 오면 같이 하고 우린 기다리면서 차나 한잔 들지.”
먼저 자리에 앉아있던 박 회장이 준비된 다기를 눈짓하며 자리를 권했다. 수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어르신 덕분에 전 지금 회사에서 무단 외출 중이에요. 용건을 바로 말씀하시지 않으면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다니, 누구 마음대로?”
평가하는 눈길로 그녀의 행동거지를 지켜보던 그가 기가 막힌 듯 낮게 웃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참 성미가 급해. 버르장머리도 없는 것 같고 말이야.”
“저, 아무리 버릇이 없다 해도 납치보다야 낫지 않을까요?”
수아가 조심스럽게 대꾸하자 차관(찻주전자)을 내려놓은 박 회장의 눈초리가 대번에 매서워졌다. 그러나 그녀가 꼼짝 않고 가만히 마주 보자 이내 그는 웃으면서 혀를 찼다.
“이런, 납치라니. 박 이사가 오해할라. 이 할애비가 시간 좀 내서 손주 며느리와 덕담 좀 나누겠다는데 무정하게 그러지 말게.”
피앙세에서 손주 며느리까지 발전했다. 차라리 그녀의 조건이 부족해서 이 집안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대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았다.
오는 내내 귀한 손주랑 떨어뜨리려고 할아버지가 이러는 게 아닌가 고민했던 것이 무색해졌다. 난감해진 수아가 어디부터 정정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사이, 박 회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다.
“그래, 할애비에게는 무심한 우리 손주가 피앙세에게는 다정한가?”
“무슨 말씀이신지…….”
“박 이사가 다 좋은데 세심한 면이 부족하지? 아가씨 같은 인재를 고작 팀장 자리에 앉히다니 말이야. 자네 이력이 꽤 쓸만하던데 아깝잖나.”
“…….”
“내 보기에 자네라면 요양원 하나 정도는 따로 맡아도 될 법한데. 어떤가?”
나한테 왜 이러시는 거지? 수아는 자신을 어르려는 게 분명한 박 회장을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보았다.
“갓 입사한 제가 승진을 논하는 건 과한 것 같습니다. 그런 요행을 바라지도 않고요.”
“요행? 우리 박 이사와 연이 닿았으면 그것도 능력이지. 아가씨가 그 목석을 무슨 수로 흔들었을까, 내 장히 궁금하단 말이야.”
“전부터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희는 아직 미래에 대해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는 보기보다 개방적인가 보군. 진작 한집에 붙어살면서 그런 말을 하는가?”
“제게는…… 어르신께 말 못 할 사정이 있습니다.”
수아의 말이 의외인지 박 회장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새삼 훑었다.
“말 못 할 사정? 할애비인 내가 손주 일을 몰라야 하나?”
“죄송합니다만, 제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미간을 찌푸린 박 회장이 길게 한숨 쉬었다. 수아는 그를 살피다가 흠칫했다. 이마와 입매가 어딘가 화희와 닮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위압적이고 강한 분위기도 비슷한 것 같았다.
생각에 잠긴 채 턱을 쓰다듬던 박 회장이 미리 옆에 놓아둔 듯한 서류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렸다.
“그럼 둘 사이는 알아서 하도록 하고. 자네, 이걸 박 이사한테 전해 주겠나? 제대로만 전달된다면 내 톡톡히 갚음세.”
수아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 고작 이것 때문에 자신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건가?
화희가 받지 않았으니까 그녀한테 전하라는 게 분명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이용하려 드는 박 회장에게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아무리 사이가 소원해 보여도 그는 화희의 할아버지였으니까.
그녀는 서류를 도로 앞으로 밀어 놓고 차관을 들어 그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하실 말씀이 이것뿐이라면 그만 가 보겠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부르시지만 않았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감히 내 부탁을 거절하는 겐가?”
찻잔을 받아들던 박 회장이 멈칫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제까지 어르려던 표정이 사라지고 매서운 눈빛이 그녀를 압박했다.
“박 이사가 아가씨에게 잘해 주는 모양이야, 감히 내가 아쉽지 않은 걸 보면? 훗날을 위해서라도 내게 잘 보이는 게 자네 신상에도 좋을…… 하, 정말 왔구먼.”
그런데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던 그가 갑자기 그녀의 뒤로 시선을 주더니 코웃음을 쳤다.
수아는 얼떨결에 제 뒤를 돌아보았다. 문 앞에 기척도 없이 선 화희가 팔짱을 낀 채 박 회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분위기가 무척 싸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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