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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48화 (48/100)

48화

날씨는 추웠지만 햇볕은 제법 따뜻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산책을 핑계로 정원을 돌아다니던 수아는 작은 정자를 발견했다. 사실은 화회와 마주치기 싫어서 피해 다닌 것이지만 막상 안을 들여다보니 꽤 마음에 들었다.

정자 안의 의자에 앉아 하늘하늘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있자니 발소리가 났다.

“……습니까?”

몇 번을 물어서야 그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수아가 힐끗 올려다보자 화희가 건너편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꽃이든 나무든 정원에 두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습니다.”

“…….”

수아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면서도 귀찮은 기색이 없는 화희를 보면서 눈만 깜빡였다. 멍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쳐다보면 없던 음심도 돋겠습니다. 그렇다고 평소에 음심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만.”

“……음심이요?”

“아, 기분 나빴습니까? 미안합니다.”

따지고 보면 잘못이 없는데도 어제 이후 화희는 계속 그녀의 눈치를 보며 끊임없이 말을 건넸다. 그리고 바닥까지 침울해진 수아는 그의 말을 무시하거나 제대로 듣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만 보면 손에 잡힐 듯 안 잡힐 듯 어른거리는 불쾌감이 점점 커졌다.

전생의 기억을 되살렸다 해도 그가 달리 보이는 건 분명 아니었다. 여자가 그를 싫어했다 해도 지금 수아가 화희를 싫어할만한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쁠까. 혹시 전생에 대한 원망을 그에게 쏟고 있는 걸까?

화희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돌리려는 듯, 끈질기게 다시 물었다.

“좋아하는 식물이나 선호하는 정원 스타일이 있습니까? 이곳을 수아 씨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 넣고 싶습니다.”

“지금도 멋지고 예쁜데요.”

수아는 여느 수목원 못지 않게 잘 꾸며진 정원을, 자신의 말 한마디에 당장이라도 갈아엎으려는 그의 기세에 잠시 어이가 없어졌다.

이 남자는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그녀는 자신이 어느새 꿈속 남자에게 화희를 자꾸 대입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수아는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열어 물었다.

“이미 이 정원은 그 여자의 취향대로 꾸며진 거 아닌가요? 목련 나무가 많던데.”

“……그 여자?”

말뜻을 알아챈 것 같았지만 되묻던 화희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말을 고르는 듯 침묵이 길어진 사이 그의 미간이 점점 좁혀져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어제만 기억났던 게 아닙니까?”

“……가끔 꿈을 꿨어요. 깨고 나면 기억이 거의 남지 않아요.”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꿈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나중엔 설마 했어요. 이사님이 오백 년 동안이나 찾을 만한 사이로는 전혀 보이지 않아서.”

말해 놓고 아차 싶어 혀를 깨물었지만 늦었다. 눈에 띄게 움찔한 화희가 짧게 숨을 내쉬면서 성마른 손길로 찌푸린 미간을 문질렀다. 수아는 표정을 숨기는 것처럼 얼굴을 가린 그를 보면서 내친김에 이어서 물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나요?”

“……간절하니까요.”

“간절하다고요?”

“나는 매번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를 기다리고 찾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기억을 각성합니다. 간절하지 않을 수 없죠. 각성한 기억은 오로지 당신에 대한 것들뿐인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그 여자는, 그 여자는…… 당신을 싫어했잖아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당신을 만나지 않길 빌었잖아. 차마 뒷말까지 할 수 없어 말을 삼켰지만 벌써 화희가 굳는 게 느껴졌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매우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한 것 같은 기색이었다.

수아 역시 가슴이 아파서 입술을 깨물었다.

답을 알면서도 굳이 물어서 상처 주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일부러 이러는 걸 알면서도 화도 내지 않는 그도 싫다.

싫어. 진짜 싫어. 스스로 이상하다는 자각이 들었지만 수아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다.

괜찮으려고 노력하고 그런 척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한번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봇물 터지듯 말이 나왔다.

수아는 화희에게 따지듯 물었다.

“왜 처음부터 말 안 해 줬어요? 내가 이런 일들을 겪는 이유를 알고 있었잖아요.”

“말했다면 나를 믿었겠습니까?”

“쉽게 믿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배신감까지 느끼지는 않았겠죠.”

“내가 본 것이 사실의 전부가 아니니 쉽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하루를 부탁했던 것이었고.”

“만약 내가…… 옛날 일 같은 건 전혀 알고 싶지 않다면요?”

그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미간을 문지르던 화희가 문득 손을 떼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초조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싫습니까?”

“뭐라고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자 이번엔 그가 부쩍 가라앉은 목소리로 캐묻듯 대답을 재촉했다.

“수아 씨는 전생을 기억할수록 내가 싫어집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당신은 나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끔찍하게 싫어했으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싫어진 거냐고 물었습니다.”

당신? 지금 나를 그 여자 취급한 거야?

위잉, 그의 말에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무엇이, 왜 충격인지도 모르면서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수아가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자 화희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즉시 사과했다.

“내 말이 부담스러웠습니까? 미안해요. 충격이 컸을 텐데 내 입장만 내세웠군요.”

그가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무시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신경은 온통 그에게 쏠렸다.

숨을 죽인 채 그녀를 집요하게 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지자 참다못한 수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깜빡 잊고 있었네요. 할 일이 있었는데.”

도망치듯 자리에서 피하는 그녀를, 화희는 막지 않았다. 하지만 한참 멀어질 때까지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수아는 화희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를 계속 마주하면 물어선 안 될 말까지 묻고 싶어질 것 같았다.

* * *

침소에 산더미 같은 비단이 쌓였다. 그도 모자라 상시관들이 날라오는 나무 궤짝마다 보석이 한가득이었다.

‘이제 용종만 잉태하시면 이 궁에서 마마님을 모두 떠받들어 모실 것입니다!’

‘암요, 암요. 그도 머지않았습니다. 황태자전하께서는 저희 태자비마마님만 찾지 않으십니까.’

상시장들과 상궁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수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제 남자가 무엇을 가지고 싶냐고 묻기에 다른 여자와 같은 것을 원한다고 말했었다.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재량, 안온한 자유, 그리고 가족.

자신이 진정 원하는 건 그가 자신에게 줄 리 없는 것들이기에 대충 둘러댔더니 오해한 듯싶었다.

잠시 후, 남자가 들어와 허리를 끌어안을 때까지 수아는 창밖을 보면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요즘 들어 상시관들은 그의 왕래를 일일이 고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는 그녀의 침소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매번 그의 손길에 놀랐다. 그것이 재미있는 듯 짓궂게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남자가 웃으면서 창밖을 손짓했다.

‘신부는 목련이 그리도 좋습니까?’

이미 꽃이 지고 새파란 잎들이 돋아난 나무를 쳐다보던 수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일 눈을 뜨면 창밖에는 신부가 좋아하는 것들만 보일 겁니다.’

그저 의미 없는 시선이 닿았을 뿐인데 남자는 당장 화원을 목련으로만 채울 것 같았다.

가슴이 낯선 감정으로 빠르게 뛰었다.

이 남자는 내게 왜 이렇게 집착할까. 그리고 나는 왜 그것에 점점 흔들리는 것일까.

안 될 일이었다.

그의 손엔 수많은 피가 묻었다.

내 아비와 가솔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피가.

그에게 흔들리는 것은 그들을 배반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마음을 주고서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었다. 이리 다정하게 보여도 이 남자는 살인귀였다. 제 마음을 그만 멈춰야만 했다.

그녀를 안아 침상 위에 눕히는 남자에게 수아는 청을 가장한 거절을 했다.

‘첩실을 들이시는 게 어떨지요.’

그녀의 옷깃을 벌리던 남자의 손이 멈칫 굳었다.

‘내가 또 신부를 섭섭하게 했습니까?’

‘저는 신녀로 십 년을 살았습니다. 후사를 이을 수 없는 몸이니까 드린 청입니다.’

‘후사를 원했으면 이미 신부는 내 아이를 안고 있을 겁니다. 나는 오로지 그대만 원해요.’

그가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에 반감이 일었다. 무엇을 원하든 이루어지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궁도, 권력도, 심지어 그녀조차 이제 모두 그의 것이었으니까.

입술을 깨문 수아는 다시 한번 말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셨지요. 첩실을 들여주세요. 저는 그것을 원합니다.’

고개를 기울인 남자가 그녀의 나신을 훑어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리 어여쁜 신부를 두고 내가 왜 그래야만 합니까?’

‘부디 저를 냉궁에 내쳐 주세요. 이렇게 사는 것이 제게 지옥입니다. 더는 견딜 수…… 읏.’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른 수아가 몸을 일으키자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화를 내는 것처럼 그녀를 노려보는 것만으로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목석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목을 쓰다듬었다.

‘지옥이라…… 비는 아직도 내가 그리 싫습니까?’

‘…….’

수아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잠시 말이 없던 남자가 그녀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그러나 곧 그녀를 밀치듯 놓아 버리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몸에 걸린 속박이 풀렸으나 끝까지 눈을 뜨지 않은 그녀의 귓가에 남자가 속삭였다.

‘안 됐지만 싫어도 나를 참아 내야만 할 겁니다. 나는 그대를 놓아줄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

그가 나간 후 황실 직속령으로 사흘간 근신 명이 떨어졌다. 그리고 남자는 이레간 오지 않았다.

수아가 혼자 잠든 지 아흐레째 되던 날 아침, 창밖의 화원은 온통 목련 나무로 바뀌어 있었다.

놀라서 밖을 내다보던 그녀 앞으로 고양이가 한 마리가 창턱 위로 뛰어올랐다. 그녀의 손을 할퀴었다고 남자가 화를 냈던 그 고양이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아 걱정했더니 오히려 보살핌을 잘 받았는지 살이 올라 통통해졌고 털에선 윤기가 흘렀다. 목에는 태자궁 문양이 새겨진 금사가 매여 있었다.

목련과 고양이. 남자가 건넨 화해의 손짓이었다.

‘이제 나는 어떡하지.’

단단히 얼어야만 하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려고 했다. 힘없이 중얼거린 그녀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사람에게 느낄 수 없는 따스한 온기가 가여운 생명에게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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