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화희는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이나 수아를 바라보았다.
혼절한 듯 잠이 들어서도 희게 질린 얼굴이 안쓰러웠다. 악몽을 꾸는 것처럼 찌푸려진 이마를 위로하듯 쓰다듬어 보았으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은 검을 집어 들고 노려보았다.
수아는 혼절하면서도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었다. 꼭 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피를 받고 신부의 피를 잡아먹고서 천년을 보냈으니 사념이 강해질 만도 한가.
수아가 보았던 ‘절명의 장면’은 그도 수차례 보았었다. 이 검에 담긴 사념을 통해서였다.
억눌렀던 분노와 슬픔이 새삼 치밀어올라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 검은 당신의 의지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분명 신부는 검을 준 그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원치 않는 것들을 그의 명으로 없애 준다는 배려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키는 것이 사명이었던 검으로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지독하게 잔인하다.
“신부, 나는 이 일을 다시는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검에 말라붙은 피를 노려보던 화희는 검날을 힘껏 잡아 쥐고 그었다. 손바닥에서 흐른 그의 붉은 피가 말라붙은 검날을 적셨다.
부스스, 검은 재처럼 부서진 피들이 허공에 떠올라 먼지처럼 부유했다. 잠시 손바닥을 펼쳐 그녀의 피를 쳐다보던 화희는 눈을 감고 손을 내저었다.
휘익, 바람에 휩쓸리듯 피들이 허공을 맴돌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깨끗해진 검날에 피로 새긴 붉은 문양이 드러났다.
‘守護(수호)’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재들이 자석처럼 검에 도로 달라붙었다. 검은 다시 말라붙은 피로 뒤덮였다.
하, 짧게 한숨을 내쉰 화희는 검게 변한 검을 탁자 위에 내던졌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 방에 가득 찬 그녀가 남긴 모든 것들은 어느 순간 제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매번 그녀를 눈앞에서 잃는 고통을 끝없이 각인 당해야 했다. 마치 천벌처럼.
그토록 바라고 원해도 그녀를 찾지 못하고 끝났던 생들도 있었다. 그런 생은 끝없는 기다림만 가득했다. 반대로 그녀를 찾을 수 있는 생은 또 다른 죽음을 목도해야만 하는 절망 그 자체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죄로 매 생마다 처참한 죽음을 맞는 것이 그녀의 벌이라면, 그런 그녀의 죽음에 끊임없이 절망하고 기다림을 반복하는 것은 그의 천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이번 생은 아주 특별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그녀를 보호해야 하는지.
그 방의 물건들로 답을 알아낼 수 없었으니, 수아의 기억으로부터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하루’를 대가로 원했으면서도 막상 그녀가 전생을 떠올릴까 꺼려졌다. 자신에 대한 감정 또한 되살아날까 봐.
증오의 ‘기억’이 현재의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면, 대체 어떡해야 하는 건가.
불과 하루 전인데도 수아와 웃고 떠들던 시간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만약 깨어난 수아가 나를 ‘그녀’처럼 바라본다면, 어제의 특별했던 민수아가 사라진다면, 천벌만 반복되는 생을 다시 견딜 수 있을까 의문마저 들었다.
<만약 다른 생이 있다 해도 우리 둘 다 이번 생은 단 한 번뿐인데.>
수아의 말이 가슴 깊숙한 곳을 절절히 울렸다.
화희는 숨을 죽이고 수아가 눈을 뜨길 기다렸다.
몇 시간 후, 그녀의 눈꺼풀이 떨리고 동그란 눈동자가 드러났을 때 그의 심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화희는 조용히 물었다.
“괜찮습니까?”
“…….”
그의 목소리에 수아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아무런 대답하지 않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꼭 자신을 외면하기만 하던 ‘그녀’처럼 보였다.
겨우 물었던 말은 자신이 듣기에도 어색했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화희는 자신이 생각보다 더 많이 긴장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수아 씨.”
“…….”
“수아 씨, 괜찮아요?”
조바심이 나서 재촉하듯 거듭 부르자, 수아가 혼잣말처럼 겨우 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옅은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 벌떡 일어난 화희가 손을 뻗었으나 수아는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그는 허공에 손을 멈춘 채 주먹을 쥐었다. 그쪽으로 전혀 눈길을 주지 않은 수아가 이불을 뒤집어쓰며 중얼거렸다.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아요. 화가 나요. 슬프기도 하고요……. 모르겠어요.”
울먹이는 목소리에 가슴이 쥐어짜이는 듯 답답해졌다.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싶었지만 수아는 그를 외면했다. 오히려 화희 때문에 더 괴로운 것처럼 보였다.
설마 예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겠지.
화희는 이를 악물고 수아가 숨은 동그란 이불 더미를 쳐다보다가 검을 들고 방을 나왔다.
달칵, 문이 닫혔다.
동시에 수아는 혼자 남겨졌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덩그러니.
아니, 반대인가? 믿을 수 없는 전생에 거꾸로 처박힌 것 같았다.
매번 죽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제 처지를 원망했는데 현실은 그나마 전생보다 나은 것이었다. 끔찍한 사고를 수없이 겪고도 이렇게 잘 살아 있고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로 죽을 생각을 할 만큼 나약하지 않으니까.
화가 나고 분했다. 억울하고 슬펐다.
스스로 심장을 찌르고 죽었다가 눈을 떴을 때 벼락같이 깨달았다. 수없이 죽을 위험에 처하고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걸 봐야만 했던 이유가,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었다니.
너무나 억울했다. 아무리 자신의 전생이라고 해도 그 여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감정, 고통을 고스란히 느낀다 해도 그건 ‘민수아’가 아니었다.
민수아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성 좋은 부모님들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라, 배우며 자랐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노력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공부면 공부, 일이면 일, 열심히 했다.
옥외 광고판 사고 후 그 충격으로 1년 정도 은둔 생활을 했지만 그 와중에도 나름 열심히 살았다. 정기적으로 정신과 상담도 받고 틈틈이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시간을 허투루 보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 모든 노력들이 하등 쓸모없는 일인 것처럼, 천 년 전의 일 때문에 죽어야만 하는 건데? 나는 모르는 일이야. 그런 일을 저지른 건 내가 아니야!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어도 자신을 이해할 사람이라곤 화희밖에 없었다. 그러나 화희는…….
화희는 처음부터 그 여자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녀가 한 일을 알고서도, 그녀의 환생체인 자신을 간절히 기다렸다고 했다.
수아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진심으로, 간절하게 그리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하루가 간절합니다. 지금의 당신은 기억할 수 없는. 그러니 반드시 살아서 나와 그 하루를 지내 줘요.>
<어차피 이 생은 하나만을 위해 덤으로 사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화희는 그 여자의 기억을 찾기 위해 나를 살렸다고 했으니까. 꿈인 줄 알았던 기억에서조차 그 남자는, 아니, 화희는 여자에게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에게 차마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다.
수아는 처음부터 간과하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나는 왜 여러 전생 중에 그들의 기억만을 꿈으로 되살리고 있는 걸까.
여자는 남자를 싫어하고 남자는 애틋해 하지만 제멋대로 굴고.
증오에서 애증으로 변한 꿈을 되새겨 봐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남자를 무서워하고 증오하지만,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손짓 하나에, 눈짓 하나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정성을 다해 대했다.
처음에는 화희가 무서워 꾼 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적은 일기나 다름없었다.
그럼 대체 나는 뭐지? 결국 전생의 잘못 때문에 천벌을 받는 거라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발버둥 친 거지? 자살한 그 여자의 벌을 내가 받고 화희가 도와주는 꼴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수아는 이불을 뒤집어쓰다 던져버리고 몸부림치다 버둥거리고 울다 웃고를 반복했다. 어이가 없고 분통이 치밀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지쳐서 안전한 이불 속으로 기어들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런 제 감정들이 결국엔 다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어차피 앞으로 하루하루가 죽을 위기일 텐데.
지금 제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는 전생의 기억을 깨달아 이번 생의 생존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갔을 뿐이었다.
아니, 반대로 멈춰 선 것인가? 과거는 절대 바꿀 수가 없으니까.
분하던 기분이 사무치는 서러움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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