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화희가 장난처럼 벌린 셔츠의 목덜미에 수아의 시선이 닿았다.
갸름하지만 남자답게 굴곡진 턱 아래로 뻗은 긴 목선이 고아했다. 가운데가 움푹 파일만큼 곧고 도드라진 쇄골에 잠시 마른침을 삼킨 수아는 시선을 좀 더 내렸다. 넓은 가슴팍 때문에 얇은 셔츠가 판판하게 당겨진 모습이 단단한 근육을 상상하게 했다. 금욕적이지만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도 있어. 특히 벌어진 셔츠 깃 사이의 목덜미는 정말…….
잠시지만 제 생각에 당황한 수아가 시선을 올리자마자 화희와 눈이 마주쳤다. 넥타이 매듭을 손끝에 걸고 끌어내린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지금 그 표정은 내가 좀 알죠.”
“어, 언제 넥타이를 풀었…… 아니, 왜 풀었어요?”
“수아 씨 마음에 안 차는 것 같아서 벗었어요.”
넥타이를 벗는다고 표현하지 마! 자신의 야릇한 상상이 들킨 것 같아서 얼른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던 수아는 깜짝 놀랐다.
어, 다 왔잖아? 선물을 고민하느라 벌써 도착한 지도 몰랐다.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 던진 화희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자, 솔직히 말해 봐요.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오는 동안 날 그런 눈으로 본 건지.”
“마, 마음에 안 들긴요. 오히려 너무 마음에 들어…… 큼, 큼 그런 거 아니에요.”
“차마 말 못 하겠으면 직접 짚어 봐요. 거슬린 건 넥타이입니까?”
화희가 그녀의 손을 제 가슴팍 위에 올리며 재촉했다. 얇은 셔츠 아래 단단한 가슴팍이 느껴지자 수아는 움찔 몸을 떨며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손목을 잡아 제 몸을 쓰다듬듯 차례로 손을 옮겼다.
“아니면 셔츠?”
제 손이 셔츠 위를 미끄러져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셔, 셔츠가 왜 이렇게 얇은 거야? 와, 몸에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급기야 제 손이 판판한 배를 지나 벨트 끝에 걸리자 수아는 화들짝 놀랐다. 지나치게 심장이 쿵쾅거려서 숨이 다 가빠지려 했다.
“벨트는 어때요?”
“아, 아니라니까요!”
“그럼 설마 바지?”
“난 그 바지 같은, 아니 아니, 바보 같은 유머가 제일 마음에 안 들어요!”
그녀는 짓궂게 제 손을 놓아주지 않는 그의 팔을 찰싹 때리며 차 문을 열었다. 한 박자 늦게 과장된 신음을 흘린 화희가 손을 놓아주며 큰 소리로 웃었다.
“아, 수아 씨한테 혼났어. 내 옷이 그렇게 별로예요?”
“몰라요, 어서 내리기나 해요. 배고프단 말이에요.”
식사 중에도 화희는 뭐가 마음에 안 든 거냐면서 내내 놀려댔다.
“이젠 그런 표정으로 날 보지 않네요? 이 니트는 마음에 드나 봐요?”
좀처럼 빨개진 얼굴이 가라앉지 않아서 곤란해진 수아는 그를 흘겨보았다.
아, 잘못 골랐나. 그걸 선물로 주면 지금처럼 계속 놀리는 거 아냐?
아까 차에서는 버럭 화를 냈지만, 사실 그 순간 선물이 결정됐다. 그때를 떠올리며 하마터면 탄탄한 가슴팍의 촉감까지 되새길 뻔했던 그녀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놀림당할까 걱정됐지만, 그가 좋아할 모습을 떠올리니 왠지 조바심까지 났다.
식사 후, 남은 일이 있다고 둘러대며 일찍 방에 돌아온 수아는 핸드폰으로 열심히 ‘넥타이’를 골랐다. 이리저리 검색하다 보니 넥타이와 셔츠에 관련된 액세서리도 많다는 걸 알았다.
넥타이핀도 예쁘네. 어, 남자도 진주 액세서리를 하나?
수아는 기획용 커플용 액세서리로 나온 넥타이핀과 진주 귀걸이가 신기해서 자세히 살펴보다 멈칫했다.
“어? 할머니가 찾던 구슬이 이런 모양 아니었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수아는 순간 질색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슬에 대해 알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아…….”
낮의 일을 떠올리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인터넷 검색을 너무해서 눈에 무리가 온 듯했다. 머리를 쿡쿡 쑤시는 통증에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수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잘 채비를 했다.
오늘 밤엔 그 꿈 좀 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수아는 눈을 감고 일부러 기분 좋은 것들을 되새겼다.
엄마 냄새, 서늘한 배게 밑, 부드러운 강아지 털, 달콤한 라테.
……그리고 화희의 목소리.
‘같이 있는 것만으로 데이트 같아서.’
“나도요.”
그를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렸는데 얼굴이 또 달아오르려고 했다. 잠시 쑥스러워서 몸부림치다 보니 다행히 머리의 통증이 가시고 잠이 몰려왔다.
* * *
“아악!”
수아는 제 비명에 기겁해서 잠에서 깼다.
또 그 꿈이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싫었던 느낌은 남았는데 정작 정확한 내용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지없이 그 꿈이 분명한 것만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니 사나운 꿈이 계속될까 찝찝했다.
아씨, 오늘 휴일인데. 투덜거리던 수아는 휴일의 늦잠을 포기하고 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 가지 터득한 건 한시바삐 움직이다 보면 불쾌한 꿈의 잔상은 금방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화희 씨도 이미 일어났으려나?’
수아는 항상 완벽한 모습으로 거실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그를 떠올리고 화장대 서랍에서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던 선물 상자를 꺼냈다.
어제 요양원에서 택배로 받아 저녁때 주려고 했는데 쑥스러워서 말도 못 꺼냈다.
그간의 고마움에 대한 답례라고 하기엔 너무 약소한 것 같고. 그렇다고 데이트 선물의 답례라고 하면서 주기엔 과한 것 같기도 하고.
대체 뭐라고 하면서 줘야 하지?
상자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결국 몰래 식당이나 거실에 두고 오기로 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저택 내부는 새벽녘의 묵직한 공기에 잠겨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일 층으로 내려갔지만, 화희는 보이지 않았다.
몰래 두고 오기로 했으면서도 슬쩍 실망감이 들었다. 그래도 마주치면 못 이는 척 직접 주려고 했는데.
일말의 미련이 남은 수아는 용기를 내서 화희를 찾았다. 휴일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없는 집안은 매우 조용했다.
화희에게 건넬 말을 고르며 서성거리다 보니 얼마 전 고생했던 피트니스 룸, 서재를 지나 복도의 끝방까지 왔다.
‘거실에서 안 보이면 이 방에 있던데. 혹시 여기 있나?’
살짝 귀를 대보았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사님? 음, 화희 씨?”
수아는 노크하면서 어색하게 그를 불렀다. 잠시 기다리자 대답은 없었지만 문이 스르륵 열렸다.
“저기요, 잘 잤어요? 오늘 아침 조깅은…….”
문이 열리자 화희에게 말을 걸며 안으로 들어서던 수아는 흠칫 멈춰 섰다.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크기도 그렇지만 내부는 예사 방처럼 보이지 않았다.
벽에 죽 걸린 흑백의 사진들과 스크랩한 신문 기사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초상화들까지 흡사 오래된 역사 박물관처럼 과거의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화희는 넓은 방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찾던 수아의 시선이 문득 박제된 나비처럼 유리관 안에 보관해 놓은 옛 서책에 멎었다.
분명 처음 본 것임에도 어딘가 낯이 익었다.
불에 타서 반밖에 남지 않은 책은 글자마저 까맣게 번져서 읽을 수가 없는데도, 그것조차 익숙했다.
의아하게 책을 살펴보던 그녀는 벽에 걸린 기사와 사진들까지 죽 훑어보았다.
방을 둘러보던 수아는 본능적으로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스크랩된 기사 속 내용과 화재의 유류품, 그리고 얼룩진 검과 다른 오래된 물건들. 이 방의 모든 것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사건과 사고로 이루어진 죽음. 이 방의 모든 물건은 각양각색의 죽음이 남긴 유품인 것이다.
화희가 왜 이런 방을 만들었는지 몰라도 본능적으로 느낌이 아주 좋지 않았다. 무서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름이 돋고 등골이 오싹해서 나가려는데 불쑥 화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아 씨.”
“여기 있어요!”
소리쳐 그에게 답한 그녀는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그러다 급히 돌아서는 그녀의 팔꿈치에 뭔가 툭 닿았다. 기겁해서 돌아보는 순간 철그럭,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그녀 바로 앞으로 뭔가 떨어졌다.
손잡이와 칼날이 검은 먼지로 뒤덮인 오래된 단검이었다.
칼날에 시선이 닿자마자 갑자기 가슴팍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격통에 숨이 콱 막히는데도 기이하게 검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이 검을 잘 알고 있어. 방금 불에 탄 서책을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강렬한 기시감이 그녀를 압도했다. 가슴의 통증에 헐떡거리면서도 수아는 중얼거렸다.
“이, 이건…… 먼지가 아니…… 야.”
검을 검게 뒤덮은 얼룩은 먼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뜨겁고 끈적끈적했던…… 피였다.
내, 내가 어떻게 알지?
가슴의 격통이 심해져서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그녀의 귀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는, 나의 신부는…….’
목소리를 쫓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순간, 그녀는 창가 아래에 쓰러져 있었다. 나무로 된 창틀은 부서져 바닥에 나뒹굴고 부서진 창 너머로 흰 달이 보였다. 눈물이 차올라 달이 물속에 잠긴 듯 흐릿했다.
어느덧 수아는 오래전 시대의 그녀가 되어있었다. 꿈에서처럼, 여자의 애달프고 처연한 감정이 오롯이 제 것처럼 느껴졌다.
가슴의 격통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픈 몸을 가눌 의지도 없이 처연하게 달을 올려다보며 남자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비는, 나의 신부는 내가 원하는 한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제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며 그때 그에게 하지 못했던 대답을 입 밖에 냈다.
“아니요, 당신이 틀렸습니다.”
나는 이 검을 구명줄처럼 온 힘을 다해 쥐고 있지만, 이것으로 제 생명을 잘라낼 것입니다. 두 번 다시 당신과 만날 수 없도록.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어나는 것도 포기한 수아는 두 손으로 검을 잡고 제 가슴팍에 겨누었다.
끈질긴 미련으로 검이 든 손이 떨렸지만 그건 잠시였다.
그녀가 된 수아는 이내 검을 높이 쳐들고 제 심장을 힘껏 찔렀다.
“……흐윽!”
고통보다 숨이 막혀서 비명이 샜다. 거센 충격으로 뒤틀리던 몸이 곧 무너져내렸다. 기울어진 세상에 붉은 천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나풀거렸다. 수아는 그것이 자신의 피라는 것을 아주 천천히 깨달았다. 하지만 인지는 찰나였다.
죽음이 곧 그녀의 육체를 통째로 씹어먹기 시작했다. 시야를 뒤덮은 붉은 천마저 사라져 온 세상이 어둠에 잠기고 모든 감각도 사라졌다.
한숨처럼 마지막 숨을 내쉬던 순간, 수아는 몸서리치면서 가까스로 눈을 떴다.
빛에 눈이 부셨다. 바닥이 시리게 차가웠다.
납처럼 무거운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간신히 눈으로만 주위를 훑어보고서야, 자신이 이상한 방에서 쓰러졌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이곳이 현실이다. 머리로는 깨달았지만 정신은 두 공간 사이를 방황하는 것처럼 제멋대로 부유했다.
나는 무슨 일을 겪은 거지?
……스스로 심장을 찌르고 죽었어.
민수아가 아닌 그 여자가 죽었지만……, 그것은 내 죽음이기도 했어.
눈앞에 말라붙은 얼룩을 뒤집어쓴 검이 보였다. 그것은 피였다. 그 여자의 피이자 자신이 흘렸던 피.
죽음의 잔상이 머릿속에 들러붙어 의식을 휘저었다.
절망, 공포, 고통, 원망, 있을 수 있는 부정적인 모든 감정이 뒤섞인 늪에 잠식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수아는 태아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떨었다. 공포로 인한 한기 때문에 이대로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수아 씨!”
다급한 부름이 그녀의 의식을 흔들었다.
겨우 고개를 들자 허리를 굽히고 그녀를 살피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화희였다.
제발…… 나 좀 구해 줘요.
본능적으로 그에게 매달리려고 손을 뻗었던 수아는 몸을 떨며 팔을 거둬들였다.
지금 눈앞의 그는 자신이 아는 화희가 아니었다. 바닥에 끌리는 흰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화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아 씨.”
목이 멘 것처럼 쉰 목소리가 분명 그녀의 이름을 불렀는데 다른 말이 덧입혀졌다.
‘……신부.’
수아는 눈물로 얼룩진 시야로 화희이되, 화희가 아닌 남자가 자신에게 손을 뻗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본래는 흰색이었을 소매가 붉게 젖어 있고 손에는 그녀의 목숨을 끊었던 검이 들려 있었다.
“괜찮아요? 수아 씨, 내가 잠시만 안을게요.”
‘이 검은 당신의 의지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수아가 검을 받는 순간, 붉은 비단옷의 팔이 사라지고 검은색 카디건을 입은 화희가 보였다.
“다, 당신이 그…… 그녀를…… 신부라고…….”
그녀를 안아 들려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팔을 뻗었던 화희가 움직임을 멈췄다.
“……수아 씨.”
“당신이 나를 신부라고…… 나의 비라고…… 그렇게 불렀어……. 그렇죠?”
“수아 씨.”
대답 대신 화희가 그녀의 이름만 불렀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여느 때보다 깊고 어두웠다. 그것이 확답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그 여자인 것처럼 화희는 그 남자였어.
꿈이 아니었다. 여자가 느꼈던 감정과 고통은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기억’이었으니까. 의식의 무저갱 저 아래에 묻혀있던, 전생의 기억.
꿈속의 그녀는, 아홉 번째 전생의 민수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바로 이 검으로.
부정하고 싶었으나 가슴에 검이 꽂힌 것처럼 숨이 막혔다.
다시 찾아든 격통에 헐떡이면서 수아는 화희에게 필사적으로 물었다. 부정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다, 당신의 신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 어……. 그래서 나는…… 그 벌로 이렇게 죽어야만 하는…… 건가…… 요.”
그러나 답은 듣지 못했다. 화희의 얼어붙은 눈동자를 보면서 수아는 그대로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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