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45화 (45/100)

45화

* * *

수천 권이 넘는 고서가 가득한 서재는 언제 와도 을씨년스러웠다.

성민은 오래된 종이 냄새와 지독한 향냄새에 코가 마비되다 못해 구역질까지 치밀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간단한 보고인데도 생각에 잠긴 것처럼 한참 말이 없던 부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래, 내 아들이 그 계집을 위해 제 몸 다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거지?”

성민은 의자에 앉은 부신을 감히 내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허리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네, 회장님. 도련님께서 그 여자에게 마음을 품은 것 같았습니다.”

“앙큼한 계집이군. 화희로도 부족하든가.”

성민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의아해졌다.

화희? 착각인가, 카마의 부산 지부까지 망쳐 놓은 놈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시다니.

박화희 때문에 하루아침에 수배자 신세로 전락한 성민은 순간 울화가 치밀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눈앞의 남자는 천부신이었다. 한낱 깡패 조직에 불구했던 카마를 거대한 제국으로 키워 놓은 신화적 인물.

그가 원수인 박화희를 친근하게 불렀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평범한 계집을 위협하라고 명한 것도 큰 뜻이 있기 때문이고.

부산 지부장을 맡았던 자신이 고작 그런 짓에 직접 나서야 했던 건 수치스러웠지만, 부신을 위해선 못할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자신을 거둬줄 것은 천부신뿐이었다. 조직의 다른 이들은 모두 그를 모른 척하며 버렸다.

성민은 자신이 그를 위해 한 일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였다.

“저, 다만 염려가 되는 것이 도련님께서 저를 알아보신 것 같았습니다.”

“신경 쓸 거 없다. 내 아들은 그깟 사소한 일로 앙심 품는 소인배가 아니니까.”

“네, ……회장님. 그런데 저는 이제…….”

머리를 조아린 채 방에서 나가지 않는 성민을 내려다보던 부신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수고했다. 나가는 길에 권 실장에게 들르면 섭섭지 않게 대해 줄 거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회장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거듭 인사하면서 머리를 조아린 성민은 자신의 인생이 다시 안정기에 접어들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부신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말았다. 향냄새로 가려졌던 썩은 내가 역하게 코를 파고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윽, 순간 치솟는 구역질에 성민은 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를 지나치던 부신이 멈칫 걸음을 멈췄다.

당장 바닥에 넙죽 엎드린 성민은 더듬거리며 둘러댔다.

“용서하십시오. 저, 저녁에 먹은 회가 얹혀서 그만…….”

“그래. 그럴 수 있지.”

“가, 감사합니다.”

책상 위에서 뭔가를 집은 부신이 웃으며 그에게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헌데, 거짓말을 하다니 모욕적이구나.”

성민은 그의 손에서 번뜩이는 은빛을 뻔히 보고도 꼼짝할 수 없었다.

“……컥!”

외마디 비명을 지른 그가 안간힘을 쓰며 목을 감쌌으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터져 나왔다.

제대로 소리도 못 지른 그가 바닥에 쓰러지자 부신은 피 묻은 페이퍼 나이프를 경련하는 몸뚱이에 던지며 혀를 찼다.

“이런, 권 실장이 섭섭해하겠구나. 좋은 것만 처먹은 네 장기를 잔뜩 고대하고 있던데. 이제 못 쓰니 아깝게 되었어.”

마지막 숨을 내쉬는 성민의 귀에 부신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그는 곧 싸늘한 시체가 되어 아무것도, 무엇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 * *

제법 매서운 바람이 며칠 불더니 오늘따라 햇볕이 유난히 따사로웠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진 수아는 정원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열심히 검색했다.

어제 데이트에 대한 답례로 화희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로맨틱한 레스토랑과 꽃다발은 최고였다.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자신도 화희에게 작은 성의라도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틈날 때마다 인터넷을 뒤져보았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이제껏 남자 선물이라곤 새 아버지에게 지갑을 선물해 드린 게 전부였다.

델피늄 꽃말처럼 좋은 뜻을 가진 선물이 뭐가 있을까?

델피늄은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꽃이라는 생각보다 화희가 먼저 떠올랐다. 처음 그가 청보라색 델피늄을 주면서 했던 말도.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금은 그때와 마음이 달라졌으니까 그렇게 무거운 약속도 좀 변했으면 좋겠는데. 이제 그와 나의 사이는 계약 결혼 같은 것 이상이니까. 어쩌면 이제 그와 내가 함께 하는 미래를 꿈꿔도 좋지 않을까?

의미 있는 선물로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해주고 싶은데 정작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선물도 선물이지만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산책 중이던 서 할아버지가 한창 고민 중인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면서 다가왔다.

“어이, 민 팀장.”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얼굴이 아주 좋구만. 팔불출 얼굴에 꽃이 피더니 민 팀장 얼굴엔 꽃나비가 날갯짓을 하네.”

“에이, 꽃은 할아버지 얼굴에 폈는데요? 김 할머니께 꽃나무에 관한 건 잘 알려드렸는데 효과가 있었죠?”

“큼큼, 김 할매가 글쎄, 어젠 곶감을 주더니 오늘 아침엔 홍삼즙을 주더라고. 한 봉 먹어 봤는데 막 힘이 넘쳐서 이렇게 돌아다니는 중이지.”

서 할아버지가 짐짓 헛기침하면서 양팔을 힘있게 접었다 펴 보이기까지 했다. 한참 웃던 수아는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저, 할아버지. 선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어, 음, 이사님은 선물로 뭘 좋아할까요?”

“엥? 선물? 그냥 민 팀장이 웃어주기만 해도 충분할 것을, 다 가진 놈에게 뭣 하러. 돈 아꼈다 까까나 하나 더 사 먹어.”

“어제 월급날이었거든요. 고용주님에게 잔뜩 이것저것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성의 표시로요.”

“그놈 취향까지 내가 어떻게 아나? 그놈이 팔불출이라는 것밖에 난 몰라.”

팔불출. 왜지, 그 단어가 요즘 따라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건.

수아는 오늘 아침에 그녀를 데려다주면서 싱긋 웃던 화희를 떠올리고 저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서 할아버지가 어디가 간지러운 것처럼 팔을 긁더니 툭 말을 던졌다.

“강민철한테 물어보지, 왜?”

“강 변호사님은 이사님한테 비밀이 없잖아요. 좀 놀라게 해 주고 싶거든요.”

“맞아, 강민철이 은근 입이 싸지.”

“어머, 전 그렇게까지 말 안 했어요!”

“뭐, 어때. 사실인데.”

수아는 서 할아버지가 은근 민철을 욕하자 귀가 솔깃했다. 그래서 그에게 은근히 남아 있던 앙심을 슬쩍 털어놓았다.

“하긴, 강 변호사님이 이사님더러 소시오패스 갑 증후군이라고 막 저한테 그러는 거 있죠?”

“소시오패스? 아, 그게 그거지? 사람을 사람처럼 안 대하는 놈.”

“네, 그러니까요! 너무 심하죠? 이사님이 처음 본 사람한테는 좀 무섭긴 해도 기부나 후원 같은 좋은 일도 많이 하고 그러는 거 아시죠?”

그녀의 말을 듣던 서 할아버지가 동의하듯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강민철 그 작자, 그렇게 안 봤는데…….”

“그쵸? 자기 상사 욕을 그렇게 심하게 하다…….”

“맹해 보여서 몰랐는데 역시 배운 자였구만. 어떻게 그런 말을 찰떡같이 잘 써먹어, 아주 유식해.”

“네?”

지금 그렇게 심한 말에 격하게 동의한 거야? 감탄까지 하면서? 배신감에 떨며 수아가 흘겨보자 서 할아버지가 헛기침하면서 딴청을 피웠다.

“팔불출이 괜히 팔불출이야? 제 여인한테만 강아지지, 남한테는 개…… 차반이지.”

그때, 휠체어에 탄 할머니가 반갑게 그녀를 불렀다. 윤 할머니였다.

“애기씨!”

서 할아버지에게 따지려던 수아는 휠체어를 보고 놀라 보호사에게 물었다.

“할머니가 왜 휠체어를 타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어제 혼자 나간다고 움직이시다가 그만 넘어지셨어요. 요즘 부쩍 집에 가야 한다고 그러시네요.”

“또요?”

“네. 뭘 찾으셔야 한다면서요.”

저번에 주해린이 왔을 때도 혼자 나가시려고 했던 것 같은데. 수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대꾸하는 보호사를 보다가 무릎을 굽혀 윤 할머니에게 시선을 맞췄다.

“할머니, 혼자 나가시면 위험해요. 찾으시려는 게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가 볼게요.”

“으응, 애기씨한테는 말 못 해. 내가 미안해서.”

“괜찮아요, 할머니. 정말 제가 다녀올까요?”

그녀의 눈치를 보듯 망설이던 할머니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사실은 있잖아. 애기씨가 준 하얀 구슬, 그거 잃어버렸어. 아무리 찾아도 없어. 그래서 내가 너무 미안해.”

속상한 듯 울상이 된 할머니를 보니 안타까워졌다. 수아는 그녀의 손을 맞잡으면서 열심히 위로했다.

“사고가 있었다면서요. 할머니 탓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애기씨한테 소중한 거였잖아. 엄마 유품이라고…….”

“구슬이요? 아, 근데 그건요…….”

할머니에게 맞장구치며 대꾸하던 수아는 문득 말을 멈췄다.

뭐지? 뭔가 떠올랐는데? 꼭 내가 그 구슬을 아는 것처럼…….

그럴 리가, 내가 그걸 언제 봤다고?

잠시 멍해져서 순간 뇌리에 스친 물건을 더듬는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서 할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마음이 열리니 그것도 열려 버리는구만. 그 뭐냐, 판대라? 판때기? 그 상자가. 팔불출은 이제 어쩌나.”

“네? 할아버지, 뭐라고 하셨어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수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는데 서 할아버지는 이미 어디론가 가 버리고 없었다.

금방 어디 가셨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윤 할머니가 손을 붙잡으며 졸랐다.

“애기씨, 구슬 없어도 정말 괜찮은 거지? 그럼 나 머리 땋아줘. 애기씨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따주잖아.”

“그럼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할머니. 자, 오늘은 어떤 모양으로 땋아 드릴까요?”

에이, 구슬을 떠올린 건 그냥 착각이겠지. 고개를 흔들어 의문을 떨쳐낸 수아는 할머니에게 웃으면서 양 소매를 걷어붙였다.

* * *

“지금 표정은 야성미와 다른데. 무슨 의미죠?”

퇴근길 신호가 멈춘 사이, 핸들에 팔꿈치를 올린 채 돌아본 화희가 그녀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가는 내내 화희를 몰래 훑던 수아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말을 돌렸다.

“……배고파서요. 언제쯤 도착하는지 궁금한 표정이었어요.”

“이런, 좀 더 천천히 가려고 했는데. 카풀이 카풀 같지 않아서 큰일이네요. 수아 씨와 같이 있으면 전부 데이트 같아서.”

아, 설레잖아. 선물 후보를 놓고 그에게 이것저것 대보느라 복잡하던 머릿속이 순간 백지가 됐다.

수아는 말 한마디로 자신을 들었다 놓는 남자를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가, 불현듯 더 좋은 선물을 주고 싶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저기,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검정 계열 옷이 많던데 무채색 좋아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준비해 주는 대로 입는 것뿐이라서요.”

“그럼 옷 말고 평소에는요? 무슨 색을 좋아하거나 싫어해요?”

“딱히 가리지 않아요, 색 같은 건 의식해 본 적 없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그런데 왜 묻습니까? 내게 따로 입히고 싶은 색이 있어요?”

예의 ‘놀릴 때’의 표정으로 빙긋 웃은 화희가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리면서 덧붙였다.

“내 옷이 마음에 안 들면 당장 벗을까요? 아무리 봐도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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