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윤성아! 다쳤어?”
얼떨결에 그에게 감싸 안겼던 수아는 얼른 품에서 빠져나와 그를 살폈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차 꽁무니를 노려보던 윤성이 상처가 난 제 손을 내려다보며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이딴 건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긴, 봐 봐!”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차에 손등을 긁힌 모양이었다. 수아가 그의 손을 살펴보려 했는데 숨기려는 것처럼 팔을 잡아 뺀 윤성이 다른 손으로 거세게 상처를 문질렀다.
“누나만 안 다쳤으면 됐어.”
보기만 해도 쓰린 것 같아서 수아는 그의 손목을 잡고 말렸다.
“다쳤는데 문지르면 어떡해? 얼른 치료부터 하자.”
“됐다니까, 내가 알아서 해.”
“지금 치료 안 하면 그냥 놔둘 거잖아. 너, 다리 인대 늘어났을 때도 내가 우겨서 병원 갔었어!”
“알았어, 알았다고. 나중에 할 테니까 먼저 나랑 얘기 좀 해. 지금은 내가 문제가 아니라고.”
“그럼 뭐가 문제인데? ……설마 너, 저 차 알아?”
수아는 대답 대신 침묵을 지키는 윤성을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우연한 사고라고 하기에는, 차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마치 위협을 하듯 다가왔고 게다가 윤성의 태도는 SUV 차주를 알고 얼버무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혹시 전에 윤성을 다치게 했던 사람일까? 하지만 그게 그의 문제가 아니라니?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윤성을 보던 수아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내 사무실로 가서 치료하면서 얘기해.”
사고가 잦다 보니 일하는 곳에 반창고나 소독약을 두는 게 버릇이 되었다.
화희를 만나고부터 필요가 없었는데 자신을 감싸 주다가 다친 윤성에게 약을 쓰게 되자 씁쓸했다.
수아는 캐비닛에서 구급상자를 꺼내면서 화희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일이 조금 남아서요. 죄송한데,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잠시 기다려보았지만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치료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윤성이 소매를 내리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 요즘 이상하지?”
“어? 어, 뭐…… 좀?”
그녀의 대답에 자조적으로 웃는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요즘 내게 안 좋은 일들이 생겼는데…… 누나가 가장 큰 이유야.”
“나 때문에? 그럼 혹시 조금 전 차 사고가…….”
그렇지 않아도 방금 전 사건을 의심하던 수아가 놀라 되묻자 윤성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누나를 위해서 얼마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라는 거야.”
“그런 걸 왜 고민해? 오히려 내가 너보다 사회 경험도 많으니까 혹시라도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센 척하지 마. 누나도 혼자 겁에 질려서 꼼짝 못 하고 있잖아.”
“……뭐?”
“나도 그러니까. 그런 건 바로 알 수 있어.”
정곡을 찔린 수아가 멈칫하자 윤성이 불시에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수아가 반사적으로 피하려 하자 그는 그녀를 더욱 가까이 당기면서 사정하듯 속삭였다.
“아까 내가 한 말 진심이야. 제발 그 남자랑 엮이지 마. 난 누나가 위험해지는 게 싫어.”
이상했다. 윤성이 어떤 의미에서건 자신을 걱정해서 말한다는 걸 알지만, 화희를 걸고넘어지는 게 더 신경 쓰이고 거슬렸다.
수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해. 너, 저번부터 왜 그래? 이런 식으로 자꾸 이사님만 걸고넘어질 거라면 더 듣고 싶지 않아. 다친 데는 혹시 모르니까 엑스레이라도 꼭 찍어 봐.”
“내 얘기 아직 안 끝났…….”
윤성이 다시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리고 바로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선 화희가 그녀를 보고 옅게 웃었다.
“기다려도 안 오기에 마중 나왔습니다.”
“어, 많이 기다렸어요? 미안해요. 저기, 주차장에서 접촉 사고가 있어서…….”
“접촉 사고? 다쳤습니까?”
성큼 다가온 화희가 수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윤성을 가리켰다.
“난 괜찮아요. 근데 윤성이가 절 감싸 주다가 다쳐서 치료하던 중인데…….”
수아를 매서운 눈초리로 샅샅이 살피던 화희가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수아 씨만 괜찮다면 문제없습니다. 그럼 마저 하세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기다리죠.”
“막 끝난 참이었어요.”
“그럼 가죠.”
문 앞에 선 화희가 그녀에게 먼저 나가라는 듯 손짓했다. 핸드백을 챙겨 든 수아는 바닥만 노려보며 입을 다문 윤성을 재촉했다.
“오늘은 그만 가자. 병원 꼭 가 봐, 알았지?”
힐끗 그녀를 올려다본 윤성이 한숨을 짧게 내쉬며 마지못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방을 나가나 싶었는데 화희 앞에 멈춰 서서 그를 노려보며 협박조로 말했다.
“당신, 뭔 짓을 하든 누나 옆에는 내가 있다는 걸 알아 둬.”
“윤성아!”
“알았어. 가, 간다고!”
수아가 놀라 부르자 윤성이 휙 나가 버렸다.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싶어 화희를 올려다보았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자, 이제 갈까요?”
아무래도 윤성이는 오늘 사고에 대해 뭔가 아는 것 같아.
혹시 전에 싸웠다던 일과 관련이 있을까? 그런데 왜 내가 위험하다고 했지?
“너무 정면만 보면 목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나도 좀 봐주면 어떨까요, 그래도 데이트니까.”
레스토랑에 도착한 이후로도 생각에 빠졌던 수아는 화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미안해요. 접촉 사고가 마음에 걸려서…….”
“아무래도 그렇겠죠. 당연합니다. 첫 데이트에는 가벼운 와인이 좋다고 들었는데, 한잔할래요?”
화희가 다 이해한다는 듯 자애롭게 웃었다. 어색하게 마주 웃은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벨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뭐지, 발음이 왜 이렇게 좋아?
프랑스 와인을 주문하는 화희의 발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포인트에 놀란 수아가 눈길을 들자 고개를 기울인 화희가 또 싱긋 웃었다.
왜 이렇게 달콤하게 웃지? 그를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한 내가 잘못한 것 같은데.
미심쩍게 쳐다보는 수아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화희가 대답했다. 아니, 강조했다.
“데이트니까요.”
“네?”
“처음 데이트해 보는데 좋아서 웃음이 절로 나네요. 나만 그런 것 같아서 안타깝지만.”
데이트. 맞아, 이건 데이트였어. 근데 매너 없이 이게 무슨 짓이람.
요양원에서부터 자신이 딴생각만 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 화희는 말없이 기다려 주었고.
뒤늦은 자각에 수아는 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스스로 어이가 없어서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지중해풍으로 꾸며진 로맨틱한 레스토랑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안에는 그와 자신, 둘밖에 없었다.
“설마 여길 통째로 빌린 거예요?”
“데이트니까요.”
“여기 정말 예쁘네요. 너무 고마워요.”
“뭘요, 당연한 건데. 데이트니까.”
화희가 웃는 얼굴로 벌써 여섯 번이나 데이트를 강조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보니, 그가 삐딱선을 타기 일보 직전이라는 깨달은 수아는 얼른 정자세로 고쳐앉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이트니까 우리, 이제 무슨 얘기 할까요?”
화희가 옅게 웃으면서 불쑥 물었다.
“어떤 남자 스타일을 좋아합니까?”
“갑자기 그건 왜요?”
“대망의 데이트를 했으니까 앞으로 수아 씨 말을 더 잘 들으려고요. 오늘도 기특하지 않습니까? 애송이가 허락도 없이 감히 수아 씨의 손을 덥석 잡았지만, 참고 얌전히 기다렸잖아요. 저번에 멋대로 방해했다가 혼났으니까.”
“…….”
“아, 혹시 연하를 선호하는 건 아니겠죠? 그럼 곤란한데요, 나는 천년이나 묵었으니까. 하지만 힘은 내가 더 셀 텐데? 키도 내가 이만큼 더 큰 것 같고.”
수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검지와 엄지 사이를 벌리고 자신의 눈앞에 들이대는 화희를 어이없이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았으면서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더 순수하기도 하죠. 아무래도 난 데이트도 해 본 적 없는 동정적인 남자니까. 이 정도면 어때요?”
“……뭐가 어떤 건데요?”
“수아 씨 마음에 들 만한 연하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냐고요.”
수아는 답을 기다리듯 눈썹을 치켜세운 채 빤히 쳐다보는 화희를 미심쩍게 쳐다보다가 슬쩍 물었다.
“혹시 음, 이게 그런 걸까요? 질투라고 불리는 그것?”
“그럴 리가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서술했을 뿐입니다.”
“어느 부분이 사실인데요? 윤성이와는, 이사님께서 굳이 방해할 만한 사이가 아니에요. 그리고 난 연하는 별로고요.”
“다행이군요. 아무래도 천년은 너무 늙은 것 같아서 기억에 있는 나이로 오백 년밖에 안 묵었다고 정정하려던 참인데.”
“아, 오백 년밖에? 되게 어리셨구나.”
“그러니까요. 이렇게 어리니까 애송이한테 하시는 것처럼 말 편하게 놓으시죠. 우린 이제 데이트도 했는-.”
“그럴까? 저기, 화희야. 내가 진짜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만해 줄래?”
“뭘 그만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싫습니다.”
코웃음 친 화희가 웃음기를 지우고 턱을 치켜들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수아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윤성이를 질투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게다가 데이트가 처음이라면서 강조하는 모습이…….
……귀엽잖아?
귀, 귀엽다니? 수아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나이도 505살 정도 더 많은 남자를 두고 귀엽다고 생각하는 저 자신에게 놀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깐 딴생각만 하더니 이젠 시선을 피하네요. 수아 씨는 참 다채로워요.”
그녀는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고 애쓰면서 대꾸했다.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갑자기 그쪽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요.”
“좋군요, 그렇게 어색해하니까 카풀 하는 사이의 진정성도 느껴지고.”
“음, 그건 막 둘러대다 보니까 어쩌다 나온 말이고요. 같이 산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지금 어색해진 건 화희 씨 때문이에요. 자꾸 데이트를 강조하니까 막, 막…… 수줍잖아요!”
“아, 그래요? 그럼 할 수 없군요. 오늘 같은 날 둘 다 수줍어하면 곤란하니까 내가 용감해지는 수밖에.”
“어떻게 용감해질 건데요?”
“……이렇게?”
화희가 천천히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린 수아의 손을 잡았다. 크고 강한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감쌌다.
그저 손만 잡았을 뿐인데 넓고 단단한 그의 품에 따뜻하게 안기는 느낌이 들었다. 맞잡은 손에서부터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가슴까지 데워지는 듯했다. 간지럽고 따뜻하고 취기가 도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수아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깍지를 껴 보았다. 그녀처럼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던 화희가 감탄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수줍은 수아 씨는 어딘가 야하군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뭐래요.”
수아는 웃으면서 입술을 삐죽였지만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식사가 와서도, 와인을 마시면서도 내내.
모든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고 오로지 그만 보이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그녀는 회사 이야기, 어릴 적 추억 등 그가 묻는 대로 재잘댔다.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그와 ‘생존’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일상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간간이 그가 던지는 야한 농담에 질색하는 척 즐거워하면서.
지금 이 순간만은 마치 사고 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우연히 만난 멋진 남자와 첫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고 들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화희가 그녀를 차에 태우면서 드디어 맞잡은 손을 놓았다. 수아는 땀이 찬 제 손이 부끄러우면서도 못내 그의 손을 놓은 것이 아쉬웠다. 이상하게도 허전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화희가 그녀가 앉은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손엔 큼지막한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청보라 색만 가득한 델피늄 꽃다발이었다.
화희는 옅게 웃으면서 그녀의 품에 꽃다발을 안겼다.
“오늘 나와 데이트해 줘서 고마워요.”
수아는 감탄하면서 꽃다발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이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뻗어와 그녀의 볼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스치듯 닿았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은 그녀의 볼을 더없이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손을 맞잡았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마음을 데웠다. 그의 손길에 맑은 병을 채운 따뜻한 물처럼 찰랑거리는 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수아는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대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꽃 고마워요. 너무 예뻐요. 오늘 정말 최고의 데이트네요.”
떨리는 목소리를 들킬까 봐 작게 속삭였는데 화희는 그녀의 이마에 깃털처럼 가볍게 입술을 대고 화답했다.
“나도 고마워요. 수아 씨가 최고라서요.”
집으로 가는 내내 뒷좌석에 앉은 둘은 다시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수아가 먼저 손을 잡고 화희가 깍지를 낀 것만 다를 뿐이었다.
찰랑찰랑, 마음에 담긴 감정이 요란하게 물결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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