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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43화 (43/100)

43화

“민 팀장님, 이런 질문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같이 출근하시는 걸 여러 번 봐서요. 저, 박 이사님과는 어떤 관계세요?”

기획팀 한 대리가 부서별로 청첩장을 돌리면서 수아에게도 점심 식사를 권했다. 그런데 장소가 하필이면 윤성과 왔었던 아구찜 전문 식당이었다.

맛집은 맛집인가 봐, 회사 사람들도 다 알고.

며칠 전 자신의 모습을 잊으려 노력하던 수아는 옆에 앉은 박 과장의 질문에 멈칫 굳었다.

그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테이블에서 대화 중이던 직원들이 일제히 수아를 쳐다보았다.

이런 질문을 예상하긴 했다. 그렇게 눈에 띄는 ‘이사님’과 같이 출퇴근을 하는데 언제까지 비밀일 수는 없을 테니까.

수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을 마시며 미리 생각해 놓은 답안을 읊었다.

“같은 동네 주민이에요. 이직할 때 한 번 뵀는데 우.연.히 같은 동네라는 걸 아시고 카풀을 해 주셨어요. 되게 친절하시더라고요.”

“친절이요? 누가요? 박화희 이사님이요?”

바로 박 과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카풀이 아닌 의외의 포인트에 반박당하자 당황스러웠다. 왠지 박 과장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지만 수아는 저도 모르게 변호하듯 덧붙였다.

“저도 처음엔 좀 무서웠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이사님은 농담도 곧잘 하시고 그냥 평범…… 하시진 않지만 되게 친절하세요. 성실하시고요. 음, 제가 잘 아는 건 아니지만요.”

수아가 말을 끝내자마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박 과장이 ‘비아냥도 아니고 농담이래.’ 중얼거리다가 한 대리에게 옆구리를 쿡 찔리고 입을 다물었다.

너무 과하게 편을 들었나? 들킨 건 아니겠지? 멋쩍어진 수아가 뭐라 덧붙이려고 했지만 타이밍 좋게도 그 순간 식사가 나와서 화제가 음식으로 전환됐다.

그렇게 위기를 한고비 넘겼다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직원들과 요양원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본관 앞 화단 턱에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수아는 윤 할머니를 알아보고 가까이 가려다가 놀라서 주춤 물러났다.

“우리 애기씨. 나 구해 주느라 많이 아팠을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윤 할머니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생글 웃으면서 대꾸하는 건 주해린이었다.

“아, 할머니한테만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그 언니는 옛날부터 오지랖이 한강이었어.”

“우리 애기씨 욕하지 마. 애기씨가 얼마나 예쁘고 고운데.”

“무슨 소리야, 할머니. 예쁘긴 내가 훨씬 더 예쁘지.”

“아니야, 우리 애기씨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할머니, 나는 우주에서 제일 예쁘거든?”

쟤가 왜 여기 있지? 수아는 윤 할머니와 친근하게 옥신각신하는 해린을 믿을 수 없어 멍하니 쳐다보다가 얼른 걸음을 옮겼다.

아, 그냥 모르는 척하자.

그러나 곁에 있던 한 대리가 고개를 길게 빼고 주해린을 살피다가 박 과장과 속닥거렸다.

“저기 저 여자 혹시 JU호텔 손녀 아닙니까?”

“맞지?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SNS에서 자기네 집안 호텔 플렉스로 유명한 여자, 맞지?”

JU호텔 손녀라고? 게다가 유명했어?

수아가 경악하는 사이 시선을 느낀 것처럼 주해린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수아는 모르는 척 바로 고개를 돌렸으나, 벌떡 일어난 해린이 손을 흔들었다.

“언니! 사람을 왜 그렇게 몰래 훔쳐봐요? 그냥 대놓고 봐도 돼. 어차피 언니 기다린 건데.”

한 대리가 주춤 물러서는 수아에게 경악해서 물었다.

“헉, 민 팀장님, JU호텔 손녀도 알아요?”

“알긴요, 아니에…… 어?”

수아가 질색하면서 부정하려 했으나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면서 쪼르르 달려온 해린이 바짝 붙어서 팔짱을 꼈다.

수아는 한 대리에게 어색하게 웃으면서 팔짱을 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해린은 여전히 힘이 천하장사였다. 그녀가 매달리듯 수아를 꽉 붙잡고 투덜거렸다.

“설마 지금 나 피하는 거 아니지? 길을 잃고 헤매는 할머니도 내가 데려왔는데?”

“이거 좀 놓…… 할머니를 데려왔다고요?”

멈칫한 수아가 윤 할머니를 가리키며 되묻자 해린이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는데 입구에서 만났거든. 왠지 혼자 나가면 안 될 것 같길래 내가 이리로 데려왔어!”

수아는 화단의 꽃들을 쓰다듬는 윤 할머니를 다시 돌아보았다. 아마도 치매 증상이 있는 할머니가 혼자 길을 잃고 돌아다니셨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호사님은 어디 가셨지?

“잠깐만요.”

수아는 해린에게 팔이 붙잡힌 채로 보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배탈이 난 보호사가 자리를 비웠는데, 그사이 할머니가 없어져서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당장 오겠다는 답을 듣고 전화를 끊고 나자 해린이 그것 보라며 턱을 치켜들고 손바닥을 턱 내밀었다.

“맞지? 그러니까 나, 그거 줘요.”

“고맙긴 한데, 음, 내가 뭘 줘야 하는데요?”

수아가 빈 손바닥을 미심쩍게 쳐다보며 되묻자, 팔을 놓아준 해린이 코웃음 치면서 대꾸했다.

“난 쓸데없이 착한 짓은 절대 안 하거든. 그러니까 나한테 받은 게 있으면 꼭 갚아야 해. 저번에 그 찻잔 주세요. 아무리 비싼 찻잔에 비춰 봐도 거기에 비친 내 모습만 못 하더라고.”

찻잔? 화희를 대접하려고 샀던 금박 찻잔 말인가? 전 피앙세 어쩌고 하면서 정신을 쏙 빼놓는 바람에 해린에게 처음을 양보하고 말았던 그 찻잔?

새삼 전 피앙세란 말이 떠오른 수아는 눈을 부릅뜨면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세트라서 안 돼요.”

“그럼 두 개 다 주면 되잖아. 돈은 얼마든지 낼게.”

“돈 문제가 아니거든?”

“그럼 뭐가 문젠데요?”

“그건 나와 박…….”

“박 누구? 설마 화희 오…… 앗?”

하마터면 화희를 언급할 뻔했던 수아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가 해린이 그 이름을 이으려고 하자 그녀의 팔짱을 끼면서 황급히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잡아끌었다.

“어머, 언니. 지금 나한테 친한 척하는 거야? 몇 번이나 봤다고 벌써 이러면 곤란한데.”

“네가 먼저 팔짱 꼈…… 우리 다른 데 가서 얘기해요.”

어색하게 말끝을 흐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호기심 넘치는 직원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식사 내내 ‘이사님’과 별 사이 아니라고 둘러대느라 진땀을 뺐는데 이젠 주해린까지.

수아는 직원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쉽게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는 해린을 이끌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어차피 화희와 처음 써 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냥 줘버리고 다른 찻잔 세트를 사자.

하지만 아까운데……. 수아는 떠밀리듯 캐비닛에 숨겨 놓았던 찻잔을 꺼내며 그 잔 표면에 제 모습을 비쳐 보았다. 이게 이쁘다고……? 올록볼록해 보이는 게 사람으로 보이면 다행이었다.

수아가 든 잔을 빼앗듯 가져간 해린이 생글거리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것 봐. 언니는 예쁘게 안 보이죠? 봐, 날 비출 땐 곡선이 예술이다? 웬만한 미모로는 이렇게 예쁘게 비치기 힘들거든.”

찻잔에 비친 자신에게 감탄사를 연발하는 주해린은 진심이었다. 너무나 진심이라서 보고 있자니 자괴감이 밀려왔다.

한창 바쁜 시간에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그녀는 커피잔 두 개를 전부 해린에게 떠맡기듯 안기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빨리 가요. 다신 오지 마.”

“어머, 이 언니 말 섭섭하게 하는 것 좀 봐. 난 언니 일하는 시간에 맞춰 오느라고 잠도 못 자고 기다린 건데.”

커피잔을 신나서 받던 해린이 입술을 삐죽이며 따지자 수아는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너무 심했나? 오늘은 그래도 윤 할머니도 도와드렸는데.

“남 일하는 데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면 곤란하단 뜻이에요.”

“흥, 일단 오늘은 그냥 갈게. 나도 바쁘거든?”

“일단?”

마지막에 마음이 약해져서 말을 둥글게 해버렸는데 해린이 먼저 새침하게 말하며 문을 턱짓했다.

“나, 문 좀 열어줘요.”

수아는 저도 모르게 문을 열어주고서 해린을 쳐다보다 기가 막힌 한숨을 흘렸다.

커피잔을 양손 각 검지에 걸고 딸랑거리며 걷는 그녀의 뒷모습이 무척 신나 보였다.

뭔가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아, 그냥 다신 보지 말자고 콱 잘라 버릴걸.

일을 하려고 책상에 앉자 점심 때 직원들의 눈초리가 마음에 걸렸다. 해린이 들렸다는 얘기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수아는 화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민수아 씨.

전화 목소리는 실제 얼굴을 맞대고 들을 때보다 더욱 부드럽게 느껴졌다.

다른 직원들이 그에게 거리감을 두는 걸 들었더니 처음보다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새삼 와닿았다.

다정한 목소리에 한결 마음이 놓인 수아는 고민을 털어놓는 것처럼 화희에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저기요, 이사님. 기획부랑 같이 식사를 했는데요. 우리가 어떤 사이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답했습니까?

“카풀 하는 사이라고 했는데요. 음, 근데 아무도 안 믿는 것 같더라고요.”

-…….

“여보세요?”

핸드폰 너머에서 갑자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액정을 확인한 수아가 다시 그를 부르려는데 화희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였어요?

“네?”

-점심 메뉴가 뭐였냐고 물었습니다.

“아구찜인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저기, 어떡하죠?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뭘 어떡합니까. 점심엔 매운 걸 먹었으니 저녁엔 담백한 거로 하죠. 친밀하게 딱 붙어서 로맨틱하게 와인도 한잔하고.

수아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소문과 아구찜과 로맨틱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지?

그런데 왜 가슴이 뛰는 거야. 아, 얼굴은 왜 빨개지고.

핸드폰을 귀에 바짝 댄 그녀는 책상에 의미 없는 손가락 낙서를 하면서 조심스레 되물었다.

“음, 로맨틱하게요? 우리가요?”

-남자가 여자한테 같이 식사하자고 수줍고도 진지하게 물으면 뭐겠습니까?

“……결투?”

-데이트 신청하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훨씬 부끄러운 건데 왜 민수아 씨가 헛소리를 합니까?

“어, 데이트요? 우리 데이트해요?”

-아니요, 카풀이죠. 로맨틱한 장소에서 식사하러 가는데 마침 차에 자리가 남으니까.

“…….”

-다섯 시간 남았군요. 카풀 시간에 맞추려면 바빠서 이만 끊겠습니다.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수아는 액정을 내려다보다가 빨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면서 괜스레 투덜거렸다.

“카풀이라니, 그 말이 그렇게 싫었나?”

그럼 같이 출퇴근한 걸 뭐라 그래. 소문 걱정이라니까 아예 데리러 온다니.

……데이트래, 데이트.

해린의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소문도 더욱 부풀리게 될지도 몰랐지만 거절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을 되새길수록 가슴이 두근두근 속절없이 빠르게 뛰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수아는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하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일해야지, 일. 오늘은 무조건 정시 퇴근이야! 아니지, 조금 일찍 끝내고 화장도 다시 고치고 해야지!”

수아는 자신 역시 변했다는 걸 느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다니. 좋아하는 걸 스스로 인정하자 화희의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 * *

“아, 너무 일찍 나왔네.”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나온 수아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쑥스럽게 중얼거렸다. 화희가 도착한다는 시간보다 이십 분이나 일렀다.

옷매무새를 슬쩍 매만진 수아는 슬슬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가기로 했다. 주차장 입구에 도착해서 고개를 길게 빼고 이리저리 내다보는데 갑자기 장신의 남자가 앞을 막아섰다.

화희인 줄 알고 반색했으나 뜻밖의 얼굴이었다.

“어, 윤성아?”

“누나,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어? 너 연락도 없이 어떻게 왔어?”

수아가 놀라 묻자 인상을 쓴 윤성이 주위를 살피는 것처럼 그녀의 어깨너머를 힐긋거렸다. 급히 뛰어온 것처럼 숨까지 몰아쉬는 모습이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할 말이 있다니까. 여긴 좀 그렇고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해.”

“나 지금 가 봐야 하는…… 설마 그 일 때문이야?”

수아는 잠시 시계를 확인하다가 전에 보았던 그의 상처가 떠올라서 멈칫했다. 미간을 찌푸린 윤성이 턱짓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내 얘기가 아니야. 누나에 관해 이상한 소문을 들었어.”

“……무슨?”

“누나 옆에 있던 그 남자가 생각보다 거물이고 그래서 누나까지 위험하다는 소문.”

“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확실한 거니까…… 일단 어디 안으로 들어가자.”

화희 얘기가 왜 나오지? 뜻밖의 말에 수아가 반문하려고 하자, 갑자기 뒤에서 끼이익, 차 소리가 들렸다. 수아와 윤성은 말을 멈추고 동시에 차를 돌아보았다.

막 주차장에서 출발한 듯한 검은 SUV가 인도 위에 서 있는 그들 쪽으로 무섭게 달려왔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엔진 소리는 찰나 음주 운전 사고의 악몽이 떠오를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저 새끼가…….”

욕설을 짓씹은 윤성이 놀라 굳은 수아의 등을 감싸며 재빠르게 잡아당겼다.

그들 앞 인도 위까지 넘어설 기세로 달려오던 차가 인도 턱에 타이어를 갈고 아슬아슬 스쳐 지나갔다.

“윽…….”

팍,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윤성이 움찔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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