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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42화 (42/100)

42화

새벽에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다행히 다음 날은 휴일이라서 늦잠을 잘 수 있었다.

늦은 아침 일어나자마자 윤성에게 문자를 보냈던 수아는 몇 번이나 답장을 읽어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다툰 거라니까.]

아무리 심하게 다퉜다 해도 목을 조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게다가 끝까지 누구와 다툰 건지 말하지도 않고.

더 캐묻기에는 어쩐지 심한 오지랖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모른 척하기엔 악의가 느껴질 정도로 심하게 멍든 목덜미가 자꾸만 떠올랐다.

한참 고민해 봐도 그녀의 입장에선 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윤성에게 온 문자를 바라보다가 더 답장이 오지 않자, 그녀는 간단하게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하루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화희를 만나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진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화희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잘 잤어요?”

“오랜만에 늦잠까지 잤네요. 근데 같이 늦게 잤는데도 이사님만 여전히 상큼하시네요.”

“불만이면 얼마든지 더럽혀 주시라니까요.”

그와 아옹다옹하면서 식당에 들어서며 웃던 수아의 미소가 굳었다.

푸짐하게 차려진 식사는 양배추와 감자가 주된 요리였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반찬이 ‘위’에 좋은 식재료들로 만들어졌다.

수아는 화희가 빼준 의자에 앉으면서 멋쩍게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제 위가 새것처럼 튼튼해지겠어요.”

“위만 문제가 아니죠. 몸 전체가 튼튼해져야 하니까 식사 마치고 운동합시다.”

“운동이라니요?”

“내 피가 먹히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 민수아 씨를 단련시킬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야…….”

수아가 의기소침하게 바라보자 화희가 턱을 치켜들었다. 단호한 눈빛에서 널 강하게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압박에 못 이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반찬을 수아의 앞으로 몰아준 그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운동하기 싫어서 먹구름이 드리워졌던 그녀의 기분에 한순간 햇볕이 쨍 비칠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나, 나 좋자고 운동시켜 놓고 뭐가 그리 좋다고?

“왜 또 그렇게 야성미 넘치는 표정으로 날 봅니까? 아무리 그래도 운동은 안 봐줄 거니까 나 대신 음식이나 꼭꼭 씹어요. 수아 씨의 연약한 위를 위해서.”

“뭐, 뭐래요.”

농담을 던지는 화희의 눈꼬리가 이젠 요망하게 물결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남자의 웃음이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건 착각일까? 분명 처음엔 보는 사람이 어색해질 정도로 이상하게 웃었던 것 같은데.

그를 안 보려고 했지만 화희가 싱글거리자 젓가락이 자꾸만 그의 앞쪽으로만 갔다.

반찬을 집는 척하면서 그의 웃음을 더 보려는 간지러운 마음에서.

그의 요망한 웃음에 속아 넘어간 게 실수였다.

저녁나절, 수아는 운동을 시작한 지 단 삼십 분 만에 깨달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칩거 1년, 요양원 내에서만 3년, 하루에 걸어 봤자 삼천 보 이내인 생활을 4년째 했으니 체력이 저질인 건 당연했다.

실내에 설치된 런닝머신 십 분을 뛰는데 십 년이 지난 것 같았다. 스쿼트 열 다섯 번을 하고 나니 십오 년은 늙은 것 같았다.

벌써 이십오 년 치의 체력을 다 써 버린 수아는 숨이 턱 끝까지 차서 항의했다.

“이…… 이…… 봐요! ……본인 체력이 수…… 슈퍼맨이라고 남들까지 그…… 런 줄 알아요? ……제발…… 하아…… 제발…… 그만 해요, 난 틀렸어요.”

옆에서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화희가 혀를 찼다.

“그래요, 정원에 나가서 산책이나 합시다. 제대로 걸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군요, 민수아 씨는.”

“하아…… 너무…… 모욕적이에요. 안 갈래요.”

“그럼 산책하러 정원에 나갑시다.”

“정원에 나가서…… 하아…… 산책하는 거랑 뭐가 다른데요?”

“섹스하기 위해 옷을 벗는 것과 옷 벗은 김에 섹스하는 차이?”

“갑…… 갑자기 그 단어가 왜 튀어나와요!”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데는 섹스가 최고라고 들었거든요. 조금 전까지 앓는 소리를 내던 민수아 씨가 펄쩍 뛰는 걸 보면 역시 섹스는 효과가 탁월하군요.”

“차라리 운동해요, 운동…… 하아…… 진짜…….”

결국 수아는 ‘아침마다 조깅 삼십 분’이라는 약속을 하고도 화희에게 이끌려 정원으로 나왔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는 겨울밤은 달빛도 차게 느껴졌다.

아직도 가쁜 것 같은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마른 가지만 남은 목련 나무가 보였다. 어렴풋이 꿈속에서 남자가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목련 꽃이 떠올랐다.

수아는 반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화희를 새삼 돌아보았다. 저도 모르게 검은 카디건에 슬랙스를 입은 세련된 그와 꿈속의 남자와 비교하게 됐다.

꿈을 떠올리자 머릿속에 의문이 넘쳐났다.

왜 화희를 보면 꿈속의 그 남자가 떠오르는 걸까? 아니, 반대로 왜 자신의 꿈에 화희가 그 남자로 나오는 건지 고민해야 하나?

만약에 꿈이 꿈이 아니라서 이런 거라면?

화희가 ‘기억’을 보여줬던 것처럼 그의 기억을 꿈으로 꾸는 그런 거라면? 그렇다고 하기엔 여자의 감정이 너무도 생생한데…….

수아는 나무에 시선을 준 채 화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음, 내 아홉 번째 전생이라는 거 말이에요. 되게 옛날이겠죠? 아홉 번이나 태어나기 전이라면.”

“대략 천 년 전입니다.”

수아가 보고 있던 나무 끝을 따라서 올려보던 화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런 걸 묻습니까? 혹시 떠오르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갑자기 궁금해서요. 이사님이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걸 보면 엄청나게 강렬한 인연이 아닐까 전부터 궁금했어요.”

“강렬하긴 하죠. 그 생은 나의 첫 생이자 모든 것이 시작된 생이었으니까.”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찾은 적도 있나요?”

“없습니다.”

“나를 보면 혹시 그때 일이 기억나는…….”

“민수아 씨.”

화희가 질문을 끊고 수아의 이름을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렀다.

집에서 나오기 전까지 농담하며 느물거리던 표정은 흔적도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둡고 차가운 그늘이 그의 얼굴에 들어찼다.

“민수아 씨.”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다시 한번 느릿하게 불렀다.

“나는 당신을 살리기 위해 기억을 찾아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난 어떤 실마리도 주지 않을 겁니다. 이유는…… 아마 기억하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되겠죠.”

“……좋은 기억이 아닌 거죠?”

화희가 대답을 피하는 것처럼 목련의 마른 나뭇가지 끝에 걸린 달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첫 생이라던 천 년 전이라면 꿈속의 시대와 얼핏 비슷하다. 그녀가 본 적도 없는 시대 공간과 상황, 지나치게 구체적인 의상과 말투까지, 만약 꿈이 아니라면 화희의 기억일까?

아니면 나의 전생일까.

조바심이 났으나 수아는 화희에게 더 캐묻지 않았다.

전처럼 자신의 전생에 대해 알기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이젠 그의 과거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이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화희가 원하는 전생은 지금의 ‘민수아’가 아니기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꿈속의 자신이 정말 존재했다면 화희는 이제까지 그 여자를 찾아 헤맨 셈이…….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수아는 머리를 저었다. 더 생각하면 불쾌한 감정에 자신까지 잠식당할 것 같았다.

지금 확실한 건, 과거의 기억에 어두워진 그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수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멈칫한 화희가 돌아보자 그녀는 장난스레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집까지 뛰어가요. 내일 조깅 대신.”

“……뭐라고요?”

“내일은 월요일이잖아요. 월요병 때문에 가뜩이나 힘든데 아침부터 조깅은 무리에요.”

그녀의 표정을 살피는 것처럼 빤히 쳐다보던 그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부터 농땡입니까?”

“고용주께서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되죠. 업무에 매진하기 위해서인데.”

“고용주의 간절한 소망을 잘못 해석하고 계신 것 같은데?”

“설마 운동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앗!”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던 화희가 갑자기 맞잡은 손에 힘을 줘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수아를 품에 파묻듯 안고 그녀의 어깨에 턱을 기댄 화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무엇이든 난 당신이 목적이죠. 뭐든 좋으니 민수아 씨, 다신 아프지 맙시다. 정말, 다시는.”

화희의 품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솔향 같기도 하고 허브 향 같기도 한 체취에 수아의 심장이 운동할 때보다 더 빠르고 격하게 뛰었다.

제 얼굴이 그에게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터질 듯 붉어진 것도 그렇지만, 분명 욕심이 드러났을 테니까.

화희가 과거 말고 오롯이 현재의 민수아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나와 있는 순간에는 오직 나만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아무래도 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 수아는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제 자신에게 고백했다.

* * *

[시간 되면 저번에 못 먹은 밥 먹자. 언제든 네 연락은 꼭 받을게.]

민수아가 변했네. 윤성은 몇 번이고 문자를 곱씹었다. 자신에게 냉정하던 그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야 뻔했다.

동정이거나 미안함이거나. 그도 아니면 어쭙잖은 호기심이거나.

하지만 무엇이든 간에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하도 민수아에게 변변치 않은 모습을 보이다 보니 얻는 거라도 있어야 덜 수치스러울 것 같았다.

결코 보여선 안 될 부분까지 들키고 말았으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바로 내쳤을 텐데.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녀의 문자에 설레서 언제 만날지 고민부터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아파하면서도 제 걱정을 하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던 그 여자에게 욕심이 일었다.

이쯤 되자 악착같은 오기가 일었다.

그 남자만 없으면,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될 것도 같은데. 민수아 곁의 그놈이 문제였다.

민수아와 어떤 관계든, 자신이 더 오래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작은 요양원에 처박혀 외로울 때 자신이 곁에 있어 줬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놈만은 절대 민수아와 이뤄지게 둘 수 없었다.

그는 겉만 번지르르한 성격 이상자였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보는 게 아닌 물건을 평가하는 듯한 감정 없는 눈빛은 더러운 내면을 숨길 수 없다.

윤성은 그런 눈을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천부신, 제 아버지가 그러했으니까.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놈을 감싸기만 하는 민수아가 심히 걱정됐다. 어떻게 그놈을 민수아에게서 떼어내지?

한참 문자를 들여다보던 윤성은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뒷짐을 진 부신이 수행원 둘을 거느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젠 저놈들을 집안에까지 들이다니. 야비한 인상의 수행원들에게 거부감이 들었지만 윤성은 표정을 감추고 공손히 인사했다.

“부산에 내려가기 전에 아버지께 인사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대답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죽 훑던 부신이 입가를 늘어뜨려 웃었다. 재미있는 물건을 보는 것처럼.

그래, 이런 눈빛이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장난감이나 도구로 보는 것 같은. 쓸모를 재보다가 거슬리면 가차 없이 망가뜨릴 수 있는 잔혹함이 드러나는 눈빛. 어떻게 이런 눈으로 아들인 자신을 볼 수 있을까?

한참 그를 훑으며 웃던 부신이 선심 쓰듯 말했다.

“부산은 가지 않아도 좋다.”

“예?”

“그 요양원 아가씨 말이다. 네가 부산에 가지 않겠다는 게 그 아가씨 때문인가 싶어서 아비로서 마음에 걸려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지 뭐냐.”

갑자기 민수아가 왜 나와?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스치고 지나갔다. 윤성은 울컥 치솟는 불안함에 바로 반박했다.

“아버지께서 왜 민수아를 신경 쓰십니까? 저와 그 여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웃던 부신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흠칫한 윤성이 눈을 내리깔자 부신이 손바닥만한 종이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윤성은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들이 사진인 것을 확인하다 이어지는 부신의 말에 바짝 몸을 굳혔다.

“네 아가씨 곁에 이놈이 붙었더구나. HH그룹 후계자인데, 요즘 내 사업에 큰 골칫거리야. 네가 아끼는 그 아가씨와 무슨 사이인지 알아 오려무나.”

“하, 하지만 아버지…….”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못 하면 바로 회사 일에 투입시킬게다. 이놈들이 내 아들이라고 특별히 밑바닥부터 잘 가르쳐줄 거야.”

부신의 말에 호응하듯 수행원들이 윤성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평범하지 않은 인상의 그들은 딱 봐도 보통의 회사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윤성은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바닥만 노려보며 숨을 죽였다.

부신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돌리자 수행원 중 하나가 서류 봉투를 사진 위에 올려놓고 그를 따라나섰다.

윤성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사진을 들어 올렸다.

한눈에 봐도 감시한 것처럼 멀리서 찍은 것이었다. 네 장의 사진 속에 민수아가 있었다.

요양원의 주차장에 출근하는 모습, 건물에서 나오는 모습, 차에 타는 모습, 길을 걷는 모습. 옷차림은 달랐지만 배경은 거의 지금의 요양원이었고 곁에는 그 남자가 있었다.

서류를 꺼내 보자 그에 대한 자료가 나왔다.

박화희, 그것이 남자의 이름이었다.

윤성은 서류를 죽 훑어보다가 집어던지고 다시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남자에게 시선이 가자마자 일순간 그것마저 신경질적으로 구겨버렸다.

민수아를 보는 박화희의 시선이 매우 거슬렸다. 사진 속 남자는 전부 수아의 곁에 딱 붙어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당신이 싫습니다! ……증오합니다! 날 원한다면 차라리 내 시신을 능욕하세요!”

갑자기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흠칫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윤성은 환청임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소설의 영감처럼 떠오르던 목소리와 장면이 어느 순간부터 실제 감각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것들은 점점 수아의 목소리와 닮아갔다.

“아, 젠장.”

환청을 무시하려고 하자 비명은 삐익 날카로운 이명으로 바뀌었다.

윤성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에 구겨진 사진을 떨어뜨리고 귀를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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