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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41화 (41/100)

델피늄 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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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수아 씨.”

뭔가가 가볍게 손을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퍼뜩 꿈에서 깬 수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녀에게 몸을 숙인 화희가 살짝 미소 지으며 물었다.

“잘 잤어요?”

“……!”

수아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크게 떴다. 다른 공간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무방비한 자신의 상태에 당황한 수아는 화희가 슈트 차림인 걸 보고 순간적으로 제 옷차림을 확인했다.

환자복이네. 왜 나는 환자복을 입고 이 남자 앞에서 누워 있…….

‘설마 나 그대로 자 버린 거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병실임을 깨달은 수아는 기겁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화희가 한발 물러나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아, 내가 또 질색했지.

왜 그렇게 놀랐는지 되짚을 사이도 없이 수아는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잠이 든 줄 몰라서 놀랐어요. 저기, 지금 몇 시예요?”

“열한 시 반입니다.”

잠시 틈을 주며 대답한 화희가 보조 의자에 앉아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환자복에 닿은 그의 시선에 멋쩍어져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나 때문에 계속 여기 있었던 건 아니죠?”

“너무 곤히 자서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핥아도 됩니까?”

뭐라고? 제 귀를 의심한 수아는 제 붕대 감은 손을 들어 보이며 그에게 되물었다.

“저기, 아무래도 난 병원 체질이 아닌가 봐요. 멀쩡한 손이 다치더니 이젠 귀까지 어떻게 됐나 봐. 지금 뭐라고 했어요?”

“수아 씨 손을 핥아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화희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붕대 감은 손을 눈짓하며 답했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벌써 붕대를 풀고 있었다.

기겁한 수아는 잠깐 사이 붕대가 풀려 시퍼런 멍이 드러난 제 손을 잡아 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눈을 가늘게 뜬 화희가 코웃음 쳤다.

“왜요, 혹시 싸가지 없는 어린 남자친구가 있어서 안 됩니까?”

“누가, 누가 남자친구예요? 그건 윤성이가 마음대로 한 말이에요.”

“오해할 수도 있죠. 버릇없게 굴기에 살짝 꾸중했을 뿐인데 수아 씨가 자해까지 하면서 말리니까.”

“자해라니요? 그때는 급하니까 그런 거고요.”

“아까 일은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미안해요. 그러나 수아 씨도 한 가지만 명심해 줘요.”

농담처럼 말하던 화희가 일순간 고개를 숙이며 진지하게 사과했다. 왠지 무거운 말이 이어질 것 같아서 수아는 제 손이 다시 잡혔다는 것도 모르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당신이 안전하지 않으면 무엇도 안중에 없습니다. 민수아 씨가 싫어할 만한 어떤 짓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죠.”

어떤 짓도? 그의 진심 어린 말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멈칫한 수아에게 시선을 맞추던 화희가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러니 남을 위하는 것도 좋지만, 제발 스스로를 아껴주면 안 되겠습니까.”

“뭐, 뭐 하는 거…… 읏!”

그의 뜨겁고 붉은 혀가 손등의 생채기를 핥았다. 손에서 퍼지는 저릿한 느낌에 소스라치던 수아는 순간 강한 기시감을 느끼고 몸을 굳혔다.

<그러니 바라건대, 스스로를 아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남자 역시 그녀의 손등을 핥으며 같은 목소리로 말했었다.

황금빛 휘장이 드리워진 나무 창문, 열린 창문 틈으로 쏟아지는 빛을 등지고 속삭이던 그의 얼굴이 순간 화희와 겹쳐 보였다.

설마 아직도 꿈에서 덜 깬 거야?

어찌나 느낌이 강렬한지 현실을 확인하려고 그녀는 혀까지 깨물어 보았다. 아팠다. 이건 분명히 꿈이 아니었다.

이젠 뻔히 눈을 뜨고도 꿈을 꾸나?

나 진짜 왜 이러지?

크게 혼란스러워진 수아는 멍이 사라진 제 손등과 화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화희의 언짢은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싫어진 것처럼 보이는군요.”

“…….”

“친밀해졌다 여겼는데 다시 원점이 되면 나는 크게 상처받는다고 했을 텐데요.”

“그, 그게 아니라…….”

지금 제 표정의 의미를 설명하려 했지만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수아가 머뭇거리는 사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화희가 그녀의 머리 옆으로 양손을 짚었다.

“상처받은 나는 삐뚤어지기 딱 좋죠.”

그리고 위협하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수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닿을 듯 말듯 가까워지자 그녀는 주춤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벽에 막혀서 피할 데가 없어졌다.

“……어, 어떻게 삐뚤어지게요?”

수아가 중얼거리듯 묻자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준 화희가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고개를 비틀었다. 키스하는 것처럼 그의 입술이 아슬아슬 그녀의 입술을 스치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흘러나오려던 신음을 겨우 참는 수아에게 화희가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이렇게. 당신의 허락을 빼앗을 겁니다.”

그의 뜨겁고 습한 숨결에 닿은 입술이 저릿했다. 그러고도 화희는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고 시선으로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벽과 화희의 양팔 안에 갇힌 채 입술까지 농락당하는 느낌을 참으려니 온몸이 간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아주 또렷했다. 그녀가 먼저 키스하길 원하는 것이다.

다른 상황도 아니고 이런 심술에 내, 내가 질 줄 알고?

왠지 억울해진 수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시야가 차단되자 가볍게 맞닿은 입술이 화끈거리는 감각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의 손이 유혹하듯 수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긴 손가락들이 부드럽게 살결을 어루만지고 단단한 엄지가 귓불을 간질였다. 화희가 한숨처럼 내쉬는 숨결이 입술을 적시자 갈증 같은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이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오로지 그의 입술과 체취만 느껴졌다.

마른침을 삼키면서 애타게 제 입술을 핥던 수아는 제 혀가 그의 입술에 스치듯 닿자 흠칫했다. 부드럽고 뜨거운 그의 입술은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으음, 그가 목을 울리는 듯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자마자 갈증은 극에 달했다.

수아는 눈을 감은 채로 와락 그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아!”

너무 세게 당기는 바람에 입술과 입술이 세게 부딪쳤다. 쿡, 짧게 웃음을 터트린 화희가 고개를 비틀어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먼저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이고 다음엔 입술 안쪽을 혀로 죽 더듬었다.

수아의 입술이 항복하듯 벌어지자 뜨겁고 축축한 그의 혀가 틈을 쑤시듯 파고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약을 올린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화희는 거침없었다. 그녀의 혀를 아플 정도로 옭아매고 타액을 전부 가져갈 듯 강하게 탐했다.

“으응....”

등골이 오싹할 만큼 강한 자극에 신음이 샜다. 그의 단단한 혀가 입 안 깊숙한 곳을 찌르자 수아는 몸을 떨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잠시 숨을 늦춘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고 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다시 진득한 키스를 이으면서 손등을 애무하듯 쓰다듬었다. 얽힌 손가락이 손등을 쓰다듬는 감촉과 입안을 헤매는 혀의 감촉까지 더해져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릿저릿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깊고 진했던 키스가 어느새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키스로 변했다.

입가를 정돈하듯 그녀의 입술을 찍어누른 그가 입술을 떼자 수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키스의 여운에 온몸이 뜨거운 물에 잠긴 것처럼 노곤했다.

그녀의 이마에 버드 키스를 하며 몸을 일으킨 화희가 가볍게 웃었다.

“수아 씨의 이런 야성미 넘치는 표정은 착각하기 딱 좋은 것 압니까?”

정곡을 찔려서인지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겨우 숨을 고르고 있던 수아가 이불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화희가 먼저 잡아채 휙 던져 버렸다.

퇴로가 막혀버린 수아는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대꾸했다.

“그쪽이야말로 동정, 아니, 순진하다는 거 다 거짓말 아니에요? 키, 키스를 이렇게 잘하는데.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아니고…….”

“본래 몸으로 하는 건 빨리 배우는 편이긴 한데. ……혹시 그 말 칭찬입니까?”

수아가 멈칫하는 사이 그가 대답을 강요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긴 속눈썹에 쌓인 그의 검은 눈동자가 빠져들 듯 깊었다. 좀처럼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 심장의 진동에 수아는 살 구멍을 찾는 것처럼 재빨리 대답했다.

“그, 그럼 아메리카노 말고 모카 라테라고 할게요. 되게 맛있, 아니 달콤하고 진해요.”

“좋습니다, 라테는 배도 부르니까요. 양에 비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한 화희가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수아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무척이나 바라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쁨과 즐거움이 드러내는 그를 보니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한참 웃던 그가 그녀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면서 말했다.

“지금 같아선 여기에서 밤도 샐 수 있을 것 같지만. 나는 수아 씨가 병원에 있는 게 싫어요. 괜찮다면 그만,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우리 집. 다사다난한 하루 끝에 돌아갈 곳이 있다는 어감이 매우 좋았다.

수아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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