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2020년, 비둘기 요양원>
늦가을인데도 요양원 정원엔 꽃이 만발했다.
누구의 능력인지 뻔했다. 며칠 전 민철은 서태산에게 민수아가 좋아하는 꽃을 피워 놓으라는 화희의 명령을 전했다.
이렇게까지 많은 꽃을 피울 수 있다니. 서태산을 떠올리던 민철은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가 인간인가 새삼 깨닫게 됐다.
그런 사람을 수족처럼 부리는 이분은 말할 것도 없겠지.
민철은 좀처럼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화희를 룸미러로 훔쳐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창밖을 노려보며 한 시간째 꼼짝하지 않았다. 민수아와 결혼할 생각에 거침없을 줄 알았더니 뜻밖이었다.
“……젠장.”
갑자기 화희의 입에서 흘러나온 욕설에 민철은 움찔했다.
역시 뭔가 큰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가 지켜본 박화희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극히 적었다. 아무리 끔찍한 상황에서도 코웃음 치거나 눈썹을 치켜세우는 반응이 전부였다.
긴장한 민철이 잠시 숨을 죽였으나 언제 욕설을 뱉었냐는 듯 화희는 다시 무표정해졌다. 그리고 천천히 넥타이를 고쳐 매고 차에서 내렸다.
별일 아니었나 싶어서 안도하는 것도 잠시, 민철은 조심스럽게 창문을 내렸다.
화희가 몇 걸음 가다 말고 멈춰 서서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혼잣말을 다 하시다니. 뭐라고 하는 거지?’
민철은 창문 틈 사이로 귀를 바짝 대고 얼핏 들리는 말에 귀 기울여 보았다.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결혼합시다. 결혼해요. 결혼해 보셨습니……. ……젠장.”
화희는 같은 말을 스페인어 동사의 규칙 변형처럼 바꿔서 말해 보고 있었다.
‘설마 민수아를 만날 생각에 긴장했던 거야?’
처음엔 제 귀를 의심했던 민철은 이내 어이가 없어져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 여자가 특별하다 해도 쓸데없는 고민이 아닐까 싶었다. 과연 박화희를 마다할 여자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잘생겼지, 돈 많지, 배경 빵빵하지, 물론 성격은 개차…… 흠흠, 어쨌든 목숨도 구해 주는데.
‘민수아 일만 끝나면 꽃길만 남은 거겠지?’
변호사로서 서류 절차가 복잡한 결혼은 극구 반대지만, 지금처럼 파수꾼 역할만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앞으로 변호사다운 일만 할 수 있다면서 들떠 있던 민철은 금세 실망해야만 했다.
세 시간 만에 돌아온 화희의 분위기가 매우 흉흉했다. 믿을 수 없게도 민수아에게 거절당한 모양이었다.
더불어 그의 꽃길도 진흙으로 뒤덮이는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멘탈이 무너질 뻔해서 민철은 자신을 다독여야만 했다.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아무렴, 처음 본 남자가 다짜고짜 결혼하자면 당연히 누구나 거절할 수 있어.
그래도 시간문제일 거야. 그 누가 박화희를 거절하겠어?
차를 조심스럽게 출발시키면서 민철은 룸미러로 화희를 흘깃거렸다.
차에 탄 이후로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시만 했던 화희는 내내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설마 상처에 붙이는 밴드?
화희에게는 절대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흉흉한 표정으로 왜 저런 걸 들고 있는지 갈수록 궁금증이 커져만 갔다.
민철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묻고야 말았다.
“……그 밴드는 무엇입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서운 시선이 표창처럼 날카롭게 꽂혔다. 민철은 얼른 입을 다물고 운전에만 매진하는 척했다.
그대로 무시당할 줄 알았는데 잠시 후 의외로 화희가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머리가 아픈 거냐면서 붙이라더군.”
“예?”
헉,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그리고 설명은 끝이었지만 민수아가 화희를 어떻게 대했는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청혼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그 박화희’를 돌은 자 취급하다니! 위기 상황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그 여자의 멘탈은 강철로 된 것이 틀림없었다.
아, 의외로 강적이군. 앞으로 그 여자 때문에 얼마나 더 살얼음판을 걸어야 할까.
민철은 화희의 눈치를 보면서 운전에 심기일전을 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차 안 공기가 그다지 숨 막히지 않았다. 오히려 가는 동안 화희는 몇 번이나 헛웃음을 흘렸다.
한 시간 후, 차에서 내릴 때쯤엔 한결 가벼워진 그의 표정이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화희는 몇 번이나 민수아에게 거절당하면서도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드러워지고 유해졌다.
그렇게 변하기 시작해서 지금 이렇게까지 됐지.
아, 물론 이 모든 것은 민수아에게만 해당 되는 일이고.
민철은 병실 문에 기대 서 있다가 돌연 고개를 휙 돌려 자신을 돌아보는 화희와 눈이 마주쳤다. 어찌나 매섭게 노려보는지 혹시 치부를 지켜본 그를 입막음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누가, 누가 외박하다 들켜서 쫓겨난 남편처럼 대놓고 그러고 있으랬나!’
얼른 튀려고 했지만 화희가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민철을 손짓으로 불러세웠다.
“이 실장에게 위에 좋은 음식을 준비해 두라고 전해.”
“……네?”
제 귀를 의심하며 저도 모르게 되물었는데 이번엔 진짜 살기가 느껴졌다.
등 떠밀리듯 이 실장에게 전화한 민철은 문득 자괴감이 몰려와 자문자답했다.
박화희의 변화는 좋은 건가, 나쁜 건가.
그는 민수아를 위해 크게 터질 인재를 사전에 예방하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것은 물론,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회 복지’에도 최선을 다한다.
반대로 조금만 수틀려도 언제 터질 핵폭탄처럼 변해 버린다. 모르긴 몰라도 36년 전 일이 반복된다면 박화희는 그때처럼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나는 어느 편에 서야 하는 거지?
대체 변호사다운 일은 언제 할 수 있는 거고.
화희를 만난 이래 뫼비우스 띠처럼 반복된 의문이 한계에 다다랐다. 제 생각에 압도된 민철은 한참이나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5. 일방적인 관계
야오옹.
상처 입은 검은 고양이는 그 날 이후, 불쑥불쑥 찾아왔다. 처음엔 경계가 심해서 수아가 건포를 내려놓아도 멀리서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건포를 먹기 시작한 고양이는 점차 가까이 다가왔다.
담벼락에서, 화원을 지나, 창문 아래까지, 오늘은 창턱에 올라앉았다.
겁먹은 호박색 눈동자가 수아의 손바닥 위 건포와 그녀를 번갈아 흘깃거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바짝 마른 몸뚱이에 곪은 상처는 심각했다. 바로 도망칠 듯 잔뜩 긴장한 고양이에게 그녀는 가만히 속삭였다.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꼭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빤히 쳐다보던 고양이가 그녀의 손바닥을 핥았다. 까슬까슬한 혀가 건포를 낼름 가져가자 그녀는 다른 건포를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고양이에게 연고를 바르려고 했는데, 침소 밖에서 상시관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 전하 납시오!’
캬아악. 큰 소리에 놀랐는지 날카롭게 울부짖은 고양이가 털을 곧추세우고 손등을 할퀴었다.
“……아!”
“이런.”
수아가 신음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바로 뒤에서 나지막이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어느새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그가 시선을 준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 덫에 걸린 것처럼 꼼짝하지 못하고 바르르 떨기만 했다.
“놓아 주십시…… 아!”
급히 남자에게서 물러선 수아가 고양이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그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피가 맺히기 시작하는 손등의 생채기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무표정했지만 눈빛이 싸늘했다.
수아는 움직이지 못하는 고양이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부디 가여운 짐승을 해하지 마십시오. 배가 고픈듯하여 제가 먹이를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고양이는 안중에 없는 듯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불쑥 물었다.
‘비는 괴로운 것이 좋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본인을 해하는 것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시는 듯해서요.’
‘……고작 이 정도로 말씀이 과하십니다.’
‘고작 이 정도라. 어찌 되었든, 비는 늘 자신을 홀대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손을 놓아준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눈빛은 차디찼다.
조바심이 난 수아는 고개를 숙이며 간청했다.
‘제가…… 제가 경솔하였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터이니 고양이를 놓아 주십시오.’
‘놓아 주면?’
그녀의 턱을 치켜든 남자가 되물으면서 나른하게 웃었다.
색향을 진하게 드러내는 미소에 뜻하는 바가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순간 수치심이 밀려와 수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과 가느다란 목덜미, 동그란 어깨를 훑으며 비웃듯 말했다.
‘내게는 짐승의 것이든 사람의 것이든 목숨값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짓이겨진 그녀의 입술에 눈길을 내린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양이를 눈짓했다. 그러자 작게 운 고양이가 가볍게 뛰어내려 창밖으로 도망쳤다.
동시에 수아는 거칠게 끌어 당겨져 그의 품에 빈틈없이 갇혔다.
남자는 잇자국이 난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오직 나의 신부만 다릅니다.’
‘무슨…… 아!’
남자가 입술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렸다. 상처에 입술에 닿았나 싶었을 때 붉고 축축한 혀가 생채기를 길게 핥았다.
따끔거리는 통증보다 그의 외설적인 행위가 더 아찔했다. 질색하며 손을 잡아 빼려 했지만 검은 눈동자에 담긴 힘이 고양이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를 옴짝달싹 못 하게 압박했다.
집요하고 끈적하게 몇 번이나 생채기를 핥은 남자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니 바라건대, 스스로를 아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수아는 차마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눈길을 내렸다.
그의 말은 얼핏 다정하게 들렸지만 그 뜻은 지독했다.
네 몸은 나의 것이다.
손등의 생채기가 핏빛을 잃고 희미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보드라운 살결을 되찾자 그가 손을 놓아주었다.
그런데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녀는 남자의 품에 안긴 채 집요한 시선으로 훑어졌다. 시간이 지나서야 수아는 그가 자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학대당하고 상처 입은 고양이와 자신의 신세가 그다지 다른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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