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외전. 악몽 같은 나의 보스
“말도 안 돼. 고작 위경련이라니.”
민철은 병실 복도의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아 연신 중얼거렸다.
절대 위경련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선천성 소시오패스 갑 증후군’의 상관을 둔 덕분에 그도 몇 차례나 겪었었다. 정말 이대로 죽나 싶을 만큼 괴롭고 아픈 병이라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목숨까지 걸기엔 ‘고작’ 위경련이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시속 100킬로 이상으로 밟으며 다른 차를 추월하고 신호를 위반한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법을 다루는 변호사로서는 더욱 심각한 사안이지만, 위급한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넘어간다 치더라도. 민철이 껄끄러운 건 세상만사에 불가능이 없어 보이던 상관의 ‘허점’을 본 것이었다.
고통을 떠넘기기 싫다며 피를 거부하는 수아에게 화희가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당신이 죽으면 어차피 나도 죽어.>
그것이 박화희의 ‘허점’이었다. 36년 전 있었던 어떤 일처럼.
21살이던 자신에게 불쑥 나타난 화희가 ‘보여준’ 그들의 전생은 그 말이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민철은 안개처럼 흐릿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180도 뒤바꾸기엔 충분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 * *
<1984년, 부산>
이번에도 간발의 차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충분히 절망적일 만큼.
축 늘어진 여자를 안은 남자가 방안에 들어섰다.
온도가 알맞게 설정된 스위트룸에 그가 들어선 순간 피비린내 섞인 냉기가 밀려들었다.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던 민철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결과를 짐작하고도 남았건만, 안타까움이 사무쳐 소리 내어 묻고 말았다.
“결국 늦었습니까?”
순간 살기가 짙어진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움찔한 민철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잘못 건드리면 환생의 실타래 자체가 엉킨다고 바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 죄송합니다.”
남자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핏줄이 터진 눈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같은 살기가 적나라했다. 민철은 얼른 입을 다물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를 지나친 남자는 품에 안은 여자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잠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민철이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남자는 애끓는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볼 뿐, 아예 그를 무시했다. 민철이 있다는 것도 잊은 듯했다.
본래부터 이 생에서 남자가 의미를 두는 것은 오로지 여자 하나뿐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얼마나 더 그녀의 죽음을 봐야만 하는 걸까. 점점 더 가까워졌다, 드디어 구할 수 있다, 희망했던 것을 비웃는 것처럼 그녀는 바로 그의 눈앞에서 죽었다. 운명이 희롱하는 것처럼 간발의 차이로.
세상에 존재할 ‘의미’를 잃는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 또한 놓아버릴 것이라 단호히 말했었다. 이제 끝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사하려 했지만 남자의 손짓에 문이 거세게 닫혔다.
방이 차단됐음에도 무겁고 찐득한 죽음의 냄새가 문을 타고 넘어와 공간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내 인생도 여기까지인가?
박화희가 없으면 배신자로 낙인찍힌 자신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아마도 조직에게 사냥감처럼 쫓기다가 결국 더럽게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다행이었다. 악마와 거래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보다 괜찮은 죽음이었으니까.
민철은 굳게 닫힌 문에 대고 공손히 인사한 후, 스위트룸을 나섰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는 제 할 일을 끝마쳐야 했다. 최소한 ‘지금’을 후회하지 않고 죽을 수 있도록.
<왜, 왜, 제게 이런 걸 보여주십니까?>
전생의 참혹한 기억을 보고만 21살의 어린 민철이 경악하여 묻자, 화희는 간단히 답했다.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설명’이라는 게 ‘이제부터 민수아를 지키는 일에 너의 모든 것을 바쳐라’라는 뜻이었다는 걸 몇 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을 했던가. 화희의 지원으로 구렁텅이에 빠졌던 현생은 간신히 구했다지만 남은 생의 시간과 노력은 몽땅…….
아니지, 이렇게 한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무 이상 없이 멀쩡해진 수아를 보고도 화희는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 인내만 발휘했을 뿐이다.
이대로라면 3년 전 옥외 광고판 사고 때의 유혈 사태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뒷수습하느라 며칠 밤을 새지 않으려면 한시가 급했다.
화희는 그때와는 비할 수 없이 민수아를 유별나게 대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민철은 다급하게 달려가 병실 문을 열었다가 기겁했다. 반사적으로 문을 닫았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으면, 옥외 광고판 건물주처럼 옥상에서 거꾸로 매달릴 뻔했다.
화희는 민수아의 침대 곁에서 공손하게 서 있었지만 자신을 흘깃 쳐다보는 눈빛은 매서웠다.
그래도 아까보다 좀 나아진 것 같기는 한데…….
민철이 어쩔 줄 몰라 서성이는데 잠시 후 화희가 병실을 나왔다. 그러나 멀리 가지도 않고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섰다. 민수아의 화난 목소리로 보아 내쫓…… 자리를 피해 준 듯했다.
좀 까칠하긴 해도 민수아는 자신을 구하느라 애쓴 화희에게는 대체로 고분고분한 편이었다. 그런 그녀가 그렇게 화를 낼 정도면, 화희가 또 소시오패스 같은 일을 저지른 모양인데…….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감히 박화희를 내쫓을 수가 있지? 그리고 다른 데 가서 기다리든가 하지, 이사님은 굳이 왜 문밖에서 저러고 있어?
가까이 가서 물으려던 민철은 화희의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그는 ‘기다리는 중’이었다. 3년 전보다 분위기는 훨씬 가볍지만 표정은 예의 비슷했다.
간발의 차이로 가까스로 구해진 민수아는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는 걸 목도하고 공황 상태에 빠졌었다. 그러자 화희는…….
* * *
<2017년, 비둘기 양로원>
“아주 복잡한 단계를 거쳤지만 어찌 보면 쉽기도 하지. 안 될 일은 무슨 수를 써도 안 되는 거거든.”
팥이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며 서태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말 참 쉽게 한다. 본인이 직접 몸으로 뛴 게 아니니까 그렇겠지.
민철은 소위 ‘대감’이라고 불리는 노인을 몰래 노려보았다.
민수아가 이 비둘기 요양원에 자리 잡게 하기 위한 작업은 무려 1년이나 걸렸다. 정말 눈물 없인 돌이킬 수 없는, 고되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민철은 민수아와 그녀의 어머니의 집 동네에 매일 ‘비둘기 요양원’에 대한 광고 전단을 넣었다.
힐링의 공간이자, 사고라고는 절대 일어날 수가 없을 만큼 너무나 평온한 쉼터라는 것을 온갖 미사여구로 꾸미느라 안 뒤져본 요양원 팸플릿이 없었다.
사고 이후 집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는 민수아가 전단을 보게 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나는 변호사인데 왜 이런 일을 하지?
문득 의문이 들었을 때 그는 구인 광고를 내고 있었다. 민수아가 지원할 만한 자리를 무려 150군데나 만들었다.
드디어 그녀가 이 요양원에 안착했을 때 ‘다 끝났다! 이제야 변호사다운 일만 할 수 있겠구나!’ 했지만 착각이었다.
민철은 오늘처럼 정기적으로 요양원을 방문해서 ‘체크’까지 해야 했다.
직접 그녀를 만나는 건 안 되고 ‘터줏대감’처럼 비둘기 요양원을 지키는 서태산을 만났다.
요양원에서 민철을 처음 만난 날, 서태산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 치면서 말했었다.
<참 웃기는 인간이지. 직접 만나면 ‘옛날 버릇’이 나올 것 같아서 몸을 사린다니.>
<덕분에 저만 죽어납니다. 그나마 민수아 씨가 이곳에 있으니 다행이지, 이전의 고생은 말도 못 합니다.>
수도관이 터져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배운 적도 있다. 아마 부실 공사를 한 건설 회사 사장도 그 사실을 그때 알았겠지. 분노한 화희의 뒷수습을 해야 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민철이 눈물 어린 회상에 잠긴 사이 서태산이 민수아의 근황을 성의 없이 전했다.
“은근 민 과장은 워크할? 위크홀? 하여튼 일만 죽어라 열심히 하는 그거야. 원장이라는 작자는 전전생에 뻐꾸기 아니랄까 봐 남에게 일 떠맡기는 게 아주 천성이더라고.”
그런 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화희가 매번 왜 만나라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태산은 민수아에게 큰 관심을 두지도, 열성적으로 지키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주 보지 않아서 데면데면해진 손녀 정도로 대할 뿐이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직접 나서시지. 나도 일다운 일 좀 해보게.
민철은 서태산을 보고 있자 은근히 불만이 솟아났다.
아닌게 아니라 3년 전까지 만사 제치고 ‘여자’를 찾아 헤맸을 때에 ‘비하면’ 화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아까운 능력으로 다른 일이라도 좀 해 주면 좋겠다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요, 시간이 지나니까 이사님도 덜 간절해진 게 아닐까요? 직접 안 오시고 저만 보내시는 걸 보면.”
그가 슬쩍 떠보듯 묻자 서태산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맨날 붙어 있어도 아직 멀었구만. 그 인간이 무엇이라도 참는 걸 본 적 있나? 충고 하나 하자면, 민수아에 대해 내가 전한 말 이상으로 아는 척하지 않는 게 자네 신상에도 좋을 거야. 지금 그 인간은 나도 시기하고 있다고.”
“예에? 시기라니요? 대체 뭘 참는 건데요?”
“그 애가 만졌던 물건에 손만 대면 다 볼 수 있는데도 굳이 왜 자네에게 말을 전해 듣겠어? 안 보려고 참는 중인 거지.”
민철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콧방귀를 뀐 서태산은 다 먹고 난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쪽쪽 빨다 잔디밭에 꽂았다.
“민수아는 아주 잘 살고 있으니까 죽을 힘을 다해 더 참아 보라고 해. 허구한 날 나만 들들 볶더니 아, 꼬시다.”
이 양반이 아까부터 남의 일이라고 자꾸 쉽게 말하네. 그리고 왜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려!
채신머리 없다고 욕하려는 찰나, 민철은 눈앞의 광경에 경악했다.
막대기 끝에서 작은 싹이 피어나고 있었다. 서태산이 불씨를 살리듯 막대기에 입김을 불어 넣자 새싹은 줄기를 뻗고 이파리를 키우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 나도 늙었어. 옛날에는 그래도 이만큼은 키울 수 있었는데 말야.”
역시 그냥 노인이 아니었구나!
제 눈을 믿지 못하면서도 민철은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들기는 서태산을 보며 슬그머니 불만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저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이런 데 틀어박혀서 민수아를 지키는 데는 이유가 있겠거니 억지로 납득하면서 말이다.
서태산의 말 중 한 가지는 맞았다. 기다리는 일은 박화희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전생의 기억을 오롯이 되찾자마자 자신을 뼛골까지 발라먹으려던 조부를 제압하고 HH그룹을 뒤집어엎은 후 힘을 키웠다.
그리고 36년 전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미 어마어마하게 커버린 ‘조직’을 뒤쫓기 시작했다. 3년이나 걸렸지만 이미 반쯤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민수아 일만 해도 그렇다. 결국 화희는 질색팔색하며 자신을 미친놈 취급하던 그녀를 제집과 회사에 앉혀 놓지 않았는가.
것 봐, 역시.
병실 문에 기대서 있던 화희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당장이라도 들어가려는 듯 손잡이를 잡았다.
그래, 아무리 민수아에게는 유달리 관대하다지만 그는 ‘박화희’였다. 기다리는 일보다 거침없이 행동하는 게 그의 본성이었다.
이사님답게 강하게 나갑시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을 내쫓다니 무슨 배은망덕한 짓입니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몰라도 민수아가 이사님과 틀어지면 중간에서 나만 힘들어진다고.’
복도 끝 모퉁이에서 화희를 훔쳐보던 민철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했다.
그런데 진심 어린 응원이 무색하게 화희는 손잡이를 놓고 도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래 놓고 답답한지 넥타이를 거칠게 빼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만 달싹거리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게 혼잣말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덩달아 답답해져 가슴을 두들기던 민철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모습. 전에 본 적 있는데?
……아, 또 기억난다. 오늘따라 왜 자꾸 예전 일이 떠오르는 거지?
그러니까 몇 달 전, 처음으로 민수아를 대면하러 가던 날 화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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