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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38화 (38/100)

38화

목의 선연한 손자국을 떠올리자마자 또 가슴이 아픈 것 같았다. 대체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했을까.

침대에 달려들듯 뛰어오던 윤성은 화희의 다리에 막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를 길게 뻗은 화희를 잠시 노려보던 윤성은 곧 수아에게 초조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은 거야?”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곧 퇴원해도 돼.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말도 안 해주고 데려가는 바람에 가까운 병원은 다 뒤졌어.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어, 괜찮다니까. 근데 윤성아, 시간 나면…….”

화희가 있어서 더 말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는데 더 가까이 오려던 윤성이 그를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좀 비켜! 이 새끼가 진짜!”

미간을 찌푸리며 윤성을 삐딱하게 올려다보던 화희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간만에 재미있네.”

하지만 웃는 얼굴과는 달리 이채가 스치는 눈은 살벌했다. 저번에 마주쳤을 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저기, 이사님.”

수아가 조심스럽게 불렀으나 화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시비 거는 윤성보다 가만히 앉은 그가 왠지 폭발 직전처럼 더 위험해 보였다.

“박화희 씨?”

두 번째로 그를 불러 보았으나 역시 무시당했다. 그녀의 말을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었기에 수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를 제쳐 두고 화희를 부른 그녀에게 기분이 상한 듯 수아를 힐끗 돌아본 윤성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재밌다고, 내가? 넌 뭔데 민수아를 마음대로 뺏어 가는데?”

“그러는 네놈은 뭔데?”

잠시 머뭇거렸던 윤성이 큰소리로 외쳤다.

“……민수아 남자친구다.”

“천윤성!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놀란 수아가 외쳤으나 윤성은 무시했다. 그녀에게 짧게 눈길을 주었다가 도로 윤성에게 시선을 돌린 화희가 혀를 차며 느릿하게 일어났다.

“아까부터 민수아, 민수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그렇게 버릇없으면 쓰나.”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성이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고개를 까딱여 피한 화희는 그의 다리를 세게 걷어찼다.

퍽, 묵직한 타격음에 소름이 돋았다.

“안 돼요!”

저만치 나가떨어진 윤성을 보며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화희가 힐끗 돌아보았다. 마주친 그의 눈빛이 매우 차가워 수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희게 질린 그녀의 모습에 기가 막힌 듯 짧게 숨을 흘린 화희가 윤성에게 다가갔다.

안 돼. 다른 땐 몰라도 지금은 때리지 마.

수아는 금방이라도 윤성이 어떻게 될 것 같아서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그만해요! 그만하라니까요!”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침대에서 내려서 달려가려는데 손등에 꽂은 링거 줄이 걸리적거렸다. 어떻게든 빼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막 끙끙대면서 일어나지 못하는 윤성을 걷어차기 직전인 화희를 보자, 수아는 있는 힘껏 바늘을 뽑아 버렸다.

순간 검붉은 피가 허공에 곡선을 그리며 튀었다. 손등이 찢어지는 아픔보다 제 피에 놀라 비명이 터졌다.

“악!”

그녀의 비명이 병실을 울리는 사이 튜브를 타고 역류한 피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수아 씨?”

놀라서 돌아본 화희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희게 질렸다.

넘어진 윤성조차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녀를 넘겨보고 병실 밖으로 소리치며 뛰쳐나갔다.

“여기요, 피가 철철 나요!”

빠르게 다가온 화희가 그녀의 손을 잡아 지혈하며 제 손가락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를 말리면서 수아는 바늘에 긁혀 찢어진 제 손등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냥 연결 부분만 빼면 됐는데 유혈 사태까지 일으키고 말았다.

아, 진짜 기절하고 싶다.

간절한 바람이 일었다. 수아는 제 피보다는 이 상황이 더 두려워 눈을 질끈 감았다.

* * *

아, 오늘은 여러모로 사기 치는 날인가 보다.

너무 멀쩡한데도 침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수아는 우울하게 한탄했다.

새파랗게 멍이 든 걸 빼곤 괜찮은 왼쪽 손엔 두꺼운 붕대를, 오른손에는 한 시간 ‘전’의 위경련을 위한 링거를 꽂았다. 마음도 사지도 매우 불편했다.

그녀가 피 묻은 환자복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병실 밖으로 자리를 피해 주었던 화희가 조용히 들어와 보조 의자에 앉았다.

뺨에 닿는 그의 시선이 따가웠다.

하지만 수아는 가슴까지 이불을 덮고 똑바로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던 화희가 먼저 말을 걸었다.

“변명할 생각은 아니지만…… 사실 내가 많이 놀랐습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았다. 그녀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그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민수아 씨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고 내 피는 소용도 없고. 정말 당신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극을 받으니까 그만 이성을 잃었습니다.”

따지고 보자면 그는 사과할 만한 잘못은 하지 않았다. 아픈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주먹을 휘두른 것도 윤성이 먼저니까. 그리고 화희가 많이 봐줬는지 윤성은 얻어맞고도 제 발로 잘 걸어나갔다.

간호사가 와서 처치를 해주는 걸 지켜보던 윤성은 수아에게 단 한 마디를 남기고 갔다.

<앞으로 내 연락 받아.>

절뚝거리며 병실을 나가던 그의 뒷모습이 자꾸만 되새겨졌다.

윤성을 떠올리던 수아는 제 뺨이 뚫어질까,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겨우 대꾸했다.

“박화희 씨가 먼저 때린 것도 아니잖아요. 싸움을 잘하는 쪽이 이긴 걸로 쳐요. 그리고 진심으로 내 걱정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고마워하지 말아요.”

그런데 화희가 사과할 때는 언제고 돌연 단호히 말을 잘랐다.

“네?”

수아는 어이가 없어 그를 돌아보았다.

양 팔꿈치를 세워 깍지를 낀 채 상체를 비스듬히 앞으로 내민 화희가 그녀를 탓하는 것처럼 말했다.

“얼마든지 날 때리고 비난해요. 쓸데없이 그 애송이를 안타까워하지 말고.”

“네에?”

“내가 ‘윤성이’를 진짜 다치게 했다면 날 미워하고 원망했을 거 아닙니까? 아무리 ‘윤성이’가 먼저 날 때리고 욕해도.”

“저기,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애가 사정이 복잡해요.”

“내 사정도 충분히 복잡합니다.”

“이사님은 충분히 앞가림이 가능하지만 윤성이는…….”

“그럼 앞가림을 못 하면 무조건 봐줘야 합니까? 강하고 앞가림 잘하는 게 무슨 죄도 아니고, 원.”

갑자기 화를 내는 그에게 당황했던 수아 역시 점점 화가 치밀었다.

윤성을 때리며 자신을 돌아보던 화희의 차가운 눈빛이 떠올랐다. 분명 그 순간에 수아는 그에게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화를 푸는 게 목적이었지.

그래, 나는 섭섭했던 거구나.

새삼 깨닫자 수아는 창피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해졌다.

내가 그에게 우선순위가 되는 걸 바랄 자격이 있을까, 지금도 과분한데 더 바라면 양심도 없지.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은 그렇지 않았다.

남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는 그가 꿈속의 남자와 순간 겹쳐 보이기도 했다.

수아는 그의 찌푸린 눈을 마주 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화를 내는 와중에도 부축해 주려는지 손을 뻗는 화희가 어이가 없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러나 섭섭함은 더 커졌다.

심호흡을 한 수아는 그만 소리를 질러버렸다.

“왜 애는 때리고 그래요!”

그녀의 팔을 잡은 채로 화희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대로 시선만 돌리는 그를 쏘아보며 수아는 쌓아두었던 말을 쏟아부었다.

“이사님이라면 얼마든지 그냥 보낼 수 있었잖아요.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내 말도 씹고!”

“…….”

“저번에 봤잖아요. 나는 윤성이가 이사님한테 무례하게 구는 걸 말렸어요. 심지어 내쫓기까지 했다고요. 오늘은 걔가 그때보다 더 심하게 무례했죠. 그래도 내가 윤성이가 아닌 이사님을 말렸을 땐 뭔가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 줘요?”

“그건 수아 씨가 너무 애송이 걱정만 하니까…….”

“걔는 오늘만큼은 맞으면 안 됐단 말이에요!”

수아가 언성을 높여 말을 자르자 화희가 팔을 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생목으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중간부터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윤성이가 내게는 ‘친한 동생’이지만 박화희 씨에겐 그저 버릇없는 어린 애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알아요. 하지만 내 말을 들어줄 수도 있었잖아. 정말 박화희 씨가 위험했다면 나라고 가만히 있었을까 봐서요!”

드륵,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민철이 그들을 번갈아 보더니 빛의 속도로 문을 닫았다.

문소리에 흠칫한 수아는 악을 쓰는 것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병실 안에 그녀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처럼 남았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다 제풀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쓰러지듯 조용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는데 이불 밖으로 화희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민수아 씨, 내가 생각이 짧았…….”

“혼자 있고 싶어요. 너무 창피하니까 저 좀 오 분, 아니 한 시간만 혼자 있어도 돼요? 나 때문에 수고하셨는데 먼저 집에 가서 쉬어 주시면 더욱 좋고요.”

“……한 시간 후에 오겠습니다.”

화희가 병실을 나서자 수아는 마음껏 적막에 파묻힐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민망하고 미안하고 죄인 같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씨, 진짜.”

수아는 몰아치는 복잡한 마음에 이불 속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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