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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37화 (37/100)

37화

“아기들도 있는데 목소리 좀 낮춰, 응?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그 새끼지? 그 새끼랑 한다는 거지?”

어떻게든 달래 보려던 수아는 그의 욕설에 입술을 깨물며 팔을 놓았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이렇게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굴면 또 싸움밖에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천윤성. 너 자꾸 이런 식이면 내가 널 봐야 할 이유가 전혀 없어.”

“... 하!”

그녀를 마주 노려보던 윤성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수아가 정말 진심이라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그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렸다가 감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심지어 울컥한 것처럼 눈시울이 붉어져서 눈이 반질거리기까지 했다.

빚 갚으러 나와서 오히려 상처를 주다니.

적잖게 상처받은 티가 역력히 드러나는 그를 지켜보고 있자니 수아의 심장 한쪽도 저릿해졌다.

아팠다. 마치 그에게 차디찬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그에게 준 상처를 고스란히 되돌려 받은 것 같았다.

북을 치는 것처럼 둥둥 울려 대는 통증이 점차 가슴 전체로 퍼져나갔다.

수아는 저릿한 가슴팍을 지그시 누르며 말을 골랐다. 그 사이, 크게 심호흡하던 윤성은 성마른 손길로 답답한 듯 목덜미를 쓸다가 목도리를 풀어 던졌다.

“저기, 미안해. 방금 말은 너무 심했…….”

막 사과하려고 입을 열었던 수아는 그의 드러난 목을 보고 콱 숨이 막혔다.

흰 목에 보라색으로 변해 가는 손자국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누군가 목을 조른 흔적이었다.

목도리를 풀고도 답답한지 니트의 윗부분을 잡아당기던 윤성이 경악한 그녀를 보고 크게 움찔했다. 수치스러운 표정으로 급히 목도리를 주워 목을 가렸지만 늦었다.

그의 자존심을 위해서 모르는 척하기엔 검붉게 변한 멍은 너무 지독했다.

“누, 누구야? 누가 그랬어?”

수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윤성이 표정을 가리듯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이를 악물었다.

“누나도 내 일에 상관하지 마.”

“윤성아…….”

“내 심정이야 어차피 알 바 아니라며?”

나지막이 내뱉은 윤성이 가려는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급히 따라 일어난 그녀는 그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다 상체를 펴기도 전에 가슴팍을 움켜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아까부터 시작된 통증이 갑자기 격해졌다.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 했지만 가슴을 크게 걷어차인 것 같은 격통에 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민수아?”

테이블을 돌아나가려던 윤성이 그녀를 뒤돌아보고 급히 뛰어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가슴팍을 누른 수아는 정신이 아득해져 신음만 흘렸다.

“너무 아, 아파…….”

“어디가 아픈 건데? 여기요, 누가 좀 와봐요! 좀 도와줘요!”

당황한 윤성이 그녀를 끌어안고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수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안간힘을 써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너…… 너…… 그…… 그거 참으면…… 아…… 안…… 돼.”

“지금 내가 문제야? 민수아, 어디가 아픈 건지 말을 해!”

“…… 으흑…… 다…… 다 ……아파…….”

심장부터 시작된 통증이 온몸에 퍼졌다. 꼭 누군가가 뾰족한 것으로 마구잡이로 찔러 대는 것처럼 아프고,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이 가빠서 더 이상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그녀는 윤성의 품에서 몸을 떨면서 신음만 흘렸다.

“민수아 씨?”

어디선가 나직한 목소리가 당황한 듯 그녀를 불렀다.

흐느끼듯 숨을 몰아쉬던 수아는 목소리를 쫓아 눈을 떴다.

화희였다.

허리를 숙여 자신을 굽어보는 그를 보자마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매달리려는 것처럼 양손을 뻗었다.

“나…… 너무 아…… 파요……. 주…… 죽을 것 같아요.”

“조금만 참아줘요.”

짧게 그녀의 손을 잡아 준 화희가 곧바로 수아를 안아 들려 했다. 그러나 그녀를 세게 끌어안은 윤성이 그의 팔을 매섭게 내쳤다.

“만지지 마!”

“비켜.”

이를 간 화희가 거침없이 윤성의 어깨를 세게 틀어쥐었다. 윽, 신음을 흘린 윤성이 버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이를 다루듯 쉽게 그를 뿌리친 화희는 수아를 받쳐 안았다.

그들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그를 보자마자 홍수처럼 갈라졌다.

“당장 민수아 안 내려놔?!”

내팽개쳐진 윤성이 벌떡 일어나 쫓아가려 했다. 그러나 한 발자국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민철이 단호히 막아섰다.

“민수아 씨는 저희 이사님이 안전하게 모실 겁니다.”

“당신들이 뭔데…….”

“자, 여기 제 명함.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 주시죠.”

이미 화희와 수아는 보이지 않았다. 발을 구르며 욕설을 내지르는 윤성에게 명함을 내던진 민철은 식당 밖으로 급히 그들을 쫓아 나갔다.

“아파…… 너무 아파…….”

민철은 있는 힘껏 액셀을 끝까지 밟았다. 민수아에게 별 감정이 없는 그조차 동요될 정도로 그녀는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규정 속도를 무시하고 앞서는 차들을 무지막지하게 추월했다. 외줄 곡예 하듯 아슬아슬했으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정신 차려 봐요, 민수아 씨. 민수아 씨!”

본 적 없는 모습으로 다급하게 소리치는 박화희도 한몫했다.

기억이 흐릿하긴 해도, 분명 본인이 죽을 때조차 저런 표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제 품에 숨듯이 얼굴을 파묻는 그녀를 안타깝게 부르면서 화희가 연신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처음엔 대신 아프게 할 수 없다면서 안 된다고 거부하던 수아는 이제 어떤 자각도 없어 보였다.

“이사님, 정말 아무것도 보인 게 없었습니까?”

다급한 마음에 민철이 거듭 물어도 화희는 무시했다. 어차피 대답을 들으려고 물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버릇처럼 화희의 능력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화희도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아예 자신의 손목까지 물어뜯어 수아의 입술에 피를 흘려 넣는 그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돌렸다.

일 초, 이 초, 시간이 흐를수록 차 안의 공기가 차게 식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민철은 야차 같은 형상의 화희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손을 떨었다. 끝까지 밟은 액셀도 모자라서 이젠 신호 위반까지 했다.

그는 수아도 수아지만, 저런 화희와 차 안에 갇혀 있는 이 악몽을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러다 민수아가 덜컥 죽어버리면, 저 야차는 무슨 짓을 할까.

<당신이 죽으면 어차피 나도 죽어.>

아픈 와중에도 피를 거부하는 수아에게 화희가 내뱉은 말이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지금 뭐라고요?”

나이 지긋한 의사가 세 번째 설명했으나 눈을 부릅뜬 민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없단 말입니다.”

수아는 응급실에서 진통제를 투여받고 온갖 검사를 받은 후 일인실로 옮겨졌다.

박화희를 보호자로 둔 덕분에 응급 처치도, 검사도, 병실을 잡는 것도 막힘이 없었다. 그리고 검사를 받는 도중엔 병원장까지 직접 나와서 상황을 설명하며 수아를 지켜보기까지 했다.

그 일련의 모든 과정 동안, 화희는 수아의 곁에서 아무 말도 없이 그녀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스트레스성 위경련이라고요? 고작? 그것도 스트레스성?”

민철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지친 듯 자신을 피해 도망가는 의사를 쫓아나갔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수아는 차마 화희를 보지 못하고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썼다. 너무 창피하고 민망했다.

죄는 없지만, 중대한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그렇게 아프던 게 거짓말인 것 같았다. 병원에 도착한 순간 너무나도 멀쩡해졌다.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모두 그녀를 위중한 환자 취급하며 믿어 주지 않았다.

너무나 멀쩡한데도 평생 받을 검사를 다 받으니 사기를 친 기분까지 들었다. 심지어 스트레스성 위경련도 아닌 것 같았다. 겪어본 적 있는데 이 정도로 쉽게 끝나는 증상이 절대 아니었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병실에서 평안을 되찾았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심각한 분위기에서 벌떡 일어날 수도 없어진 수아는 이불 속에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다 살짝 이불을 들고 틈으로 침대 옆 의자에 앉은 화희를 훔쳐보았다.

의사가 갈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조용하던 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몇 번을 더 말해야 하나.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보듬던 화희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떨리는 손길은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래서 미안함에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저기요…….”

차마 얼굴을 직접 마주 볼 생각은 못 하고 이불 속에서 막 그를 불렀을 때였다.

병실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 관계자나 민철이라기엔 행동이 너무 과격했다. 이불을 조금 내린 그녀가 눈만 빼꼼 내밀었는데 화희가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애송이…….”

윤성이었다. 뛰어온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쉰 그가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민수아!”

“어, 윤성아?”

막 이불을 내리던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윤성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 역시 복잡한 심정이 됐다. 저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면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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