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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36화 (36/100)
  • 36화

    수아가 수신 버튼을 누르자마자 화희가 인사도 생략하고 물었다.

    -오늘 저녁은 밖에서 식사하는 게 어떻습니까?

    “어, 오늘이요?”

    -설마 오늘도 일이 늦게 끝납니까?

    “그게 아니고요. 윤성이랑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

    “여보세요? 안 들려요?”

    화희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전화가 끊긴 줄 알았다. 수아가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살펴보는 사이 그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아주 잘 들립니다. 민수아 씨께서 윤성이랑 약속이 있어서 저와 저녁 식사는 못 한다고 말씀하셨죠.

    “네, 그렇죠. ……왜 갑자기 극존대를 해요?”

    -하고 싶은 말을 참으려고 그럽니다. 그럼.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아, 이분 전화 매너 참. 근데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참아?

    수아는 핸드폰을 흘겨보다 뒤늦게 저번에 화희가 윤성의 호칭을 두고 투덜거렸던 일이 기억났다.

    천윤성 자원봉사자와 급한 미팅이 있습니다, 라고 할 걸 그랬나?

    수아는 잠시 핸드폰을 어이없이 쳐다보다가 곧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되도록 야근이 없도록 하려면 일에 속도를 올리는 게 급했다.

    오 분 후,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습니까?

    받자마자 대뜸 묻는 말에 수아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다.

    “멀리 안 나가고 요양원 근처요. 괜찮겠죠?”

    -안 괜찮습니다.

    “네? 설마 뭐가 보여요?”

    -…….

    또 답이 없었다. 이번엔 질문이 질문이니만큼 무거운 침묵으로 느껴졌다. 수아는 타자를 치느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었던 핸드폰을 손에 고쳐 쥐었다. 그래도 답이 없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보세요? 진짜 뭐가 보여요?”

    -보였으면 이렇게 통화만 하지 않겠지. 그러니 부추기지 마시죠.

    “내가 뭘 부추겨요?”

    -거짓말이라는 죄악. 그 죄악은 천년이란 긴 시간에도 건드려 본 적 없는 영역인데.

    “아, 놀랐잖아요! 지금 장난해요? 바쁘단 말이에요!”

    -뭐가 문젭니까? 아무리 바빠도 윤성이랑 저녁 먹을 땐 한가하실 텐데.

    “……어머, 인사부에서 급한 메시지가 왔네요! 그럼 이만.”

    이번엔 수아가 죄악까지 저지르며 먼저 전화를 끊었다.

    다시 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뭐지, 이 남자. 설마 질투하나?

    질투라면 진짜 안 어울렸다. 심지어 귀엽기까지 했다. 꿈속의 남자와 잠깐이라도 겹쳐 보았던 게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섬뜩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친김에 다시 전화를 걸어서 자초지종을 설명할까 하다가 남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관뒀다.

    다녀와서 어떻게든 풀어드리면 되겠지.

    키보드를 치는 수아의 손이 더 빨라졌다.

    * * *

    수아는 가까스로 정시 퇴근을 하고 요양원 근처의 사거리로 나갔다.

    스포츠카에 기대서 있다가 그녀에게 손을 흔드는 윤성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큰 키에 뽀얀 피부, 작은 얼굴이 마치 연예인 같았다. 가던 길까지 멈춰 서서 몰래 그를 힐끗거리고 있던 또래 여자들이 수아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삼 년 전만 같았으면 미남과의 동행이 웬 횡재냐며 으쓱했을 텐데.

    묘한 감상에 젖은 수아는 그에게 다가가다 멈칫했다.

    서늘한 표정의 윤성은 말 걸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운 분위기였다.

    마지막 만남이 그래서일까? 그럼 차라리 다행인데,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귀한 몸이 납셔 주셨네?”

    그녀를 보자마자 눈썹을 치켜세운 그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함부로 건드리면 바로 독설을 쏟아낼 것처럼 곤두선 게 느껴졌다.

    얘가 이런 느낌이었나? 당황스러워진 수아가 대답 대신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윤성이 퉁명스럽게 다시 말을 붙였다.

    “뭘 그렇게 봐? 나 만나는 게 그렇게 싫어?”

    “싫기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음, 저번에 그렇게 보낸 게 미안해서 그러지.”

    수아가 달래듯 부드럽게 대꾸하자 그의 눈빛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면서 앞장섰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식당 안은 유치원 놀이터 같았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부터 초등학생까지 한데 뒤섞여 우르르 뛰어다니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최대한 데이트로 여겨지지 않도록 고른 곳은 아구찜 전문 한옥 식당이었다.

    “꺄아아아!”

    신발을 벗고 들어가던 수아는 아이들 놀이터가 있는 곳을 잠시 쳐다보다가 윤성을 돌아보고 넌지시 사과했다.

    “좀 시끄럽지? 근데 여기 되게 맛있대. 블로그 검색해서 찾은 거야.”

    잠자코 따라온 윤성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심지어 목도리와 코트도 벗지 않은 채 그녀가 말을 건네도 생각에 잠긴 듯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수아가 컵에 물을 따라 앞에 놓아주었더니 그는 픽 웃고서 중얼거렸다.

    “이런 데 처음 와 봐.”

    “……그래?”

    “여자랑 단둘이서는.”

    어감이 묘해서 수아는 대답하지 않고 슬쩍 그를 살폈다.

    그사이 좀 마른 것 같기도 하고.

    슬슬 진심으로 윤성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수아는 가라앉은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눈은 호강이었다. 아이들이 악을 쓰며 엄마에게 투정 부리는 것도, 또래끼리 모여 꺄르르 웃는 것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물을 한 번에 다 마신 윤성이 다시 물을 채우며 물었다.

    “어울리지 않게 애들 좋아하나 봐?”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에 수아가 그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내가 아이를 안 좋아하게 생겼어?”

    “귀찮다고 싫어하게 생겼어. 마음 꼴리면 다 버리고 훌쩍 떠날 것처럼 굴었잖아.”

    “…….”

    “표정 보니까 내 말투가 거슬리나 보네?”

    “내 표정이 뭐. 그냥 배고파서 그래. 내가 굶주리면 예민해지는 경향이 있어.”

    에둘러 말을 돌리자 윤성이 대뜸 그녀를 불렀다.

    “누나.”

    “……어?”

    “앞으로 누나라고 부를래. 어차피 이제 요양원도 못 나가니까 직함 따위 필요 없잖아.”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어쨌든 아줌마보단 나으니까.”

    “대답이 왜 이렇게 미적지근해? 누나라고 불리는 게 싫은 거야, 아니면 앞으로 나 안 본다는 말 하려고 나온 거라 그래?”

    “음, 저기 윤성아.”

    그가 먼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안색도 좋지 않은 그에게 싫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빤히 보던 윤성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을 잘랐다.

    “됐어. 오늘은 내 말만 들어.”

    “어, 할 말이 뭔데?”

    “민수아, 나랑 사귀자.”

    “……뭐?”

    “사귀자고. 나 부산 가게 돼서 자주 못 만나. 거리가 멀어지면 누난 그 핑계로 날 자를 거고, 난 앞으로 계속 누나를 봐야 되겠으니까. 특별한 사이가 되는 수밖에 방법이 없잖아.”

    말문이 막힌 수아는 눈만 깜빡이다가 컵의 물을 한 번에 다 마셨다. 어렴풋이 각오했던 일이긴 한데 생각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평범하게 대시한다면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며 거절할 수 있을 텐데, 계속 보고 싶어서 사귀자고 하는 거라니. 뭐라 말해야 마음 상하지 않을까. 그냥 솔직하게 말할까?

    그녀는 물을 마시면서 자신을 집요하게 살피는 눈길을 피했다. 그러다 결국 물컵을 소리 내서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누가 그런 이유로 사귀니? 앞으로 계속 만나는 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도 충분해.”

    “그래서 저번엔 날 그렇게 내쫓았고?”

    “그땐 네가 무례하게 굴었잖아.”

    “난 언제나 무례했어. 누나가 남자 때문에 새삼 날 거부한 거지. 그런데 그놈…… 그 남잔 누구야? 느낌이 아주 안 좋아.”

    “다른 건 몰라도 그 사람에 관해선 네가 알 것 없어. 함부로 말하지 마.”

    화희가 거론되자 수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딱 잘라버렸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성이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았다. 전보다 날카로워진 얼굴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니 다른 사람 같았다.

    무엇보다 눈빛이 어두웠다. 잠시 기분이 나빠 분위기가 가라앉은 느낌이 아니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제까지 윤성의 해맑기만 했던 건 진짜 모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사이 그를 변하게 할 큰일이 있었거나.

    최대한 마음 상하지 않게 하려면 솔직한 게 최선이야.

    결심한 수아는 크게 심호흡한 후 입을 열었다.

    “윤성아, 있잖아. 나 결혼할지도 몰라.”

    “……뭐?”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우리 사이는 변할 건 없…….”

    “나 부산 안 가. 아니, 못 가! 그러니까 빨리 거짓말이라고 해!”

    크게 충격받은 듯 희게 질렸던 윤성이 그녀의 말을 끊고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놀란 수아는 얼떨결에 그의 팔을 잡고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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