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35화 (35/100)

35화

“농담이었어요. 저도 이사님이 선천성 갑 증후군이라는 데는 동의해요. 음, 소시오패스라는 건 반대하지만. 좋은 일 많이 하시잖아요, 이렇게 복지 사업도 크게 하시는데요.”

“그거야 이미지 쇄신해서 잘 보이려…… 내가 오늘따라 말이 많군요. 아, 혹시 커피가 자백제입니까? 어쩐지 맛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그냥 커피거든요! 그것도 정성 들여 끓인!”

“다음부턴 절대 정성 들이지 마세요. 다이어트로 아주 좋겠어요. 아주 입맛이 뚝 떨어지네요.”

민철이 나간 후 수아는 커피를 마셔 보았다. 좀 쓰긴 해도 먹을만해서 새삼 억울했다.

일을 하려고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 이상하게 민철이 했던 말 중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이사님은 권선징악이 아주 확실하거든요.>

지금까지 그의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하지만 왜 간밤의 꿈이 떠오르는 거지?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젓고 다시 일에 몰두했다. 평범한 민수아에게는 권선징악보다는 일을 하면 나오는 월급이란 ‘보상’이 제일 중요하니까.

* * *

[……절망에 찬 그녀가 울부짖었다. 남자는 그녀를 ‘소유물’ 그 이상도 이하도 여기지 않았-.]

“빌어먹을. 젠장!”

빠르게 타자를 치던 윤성은 거칠게 키보드를 집어던졌다. 벽에 부딪힌 애물단지가 박살이 났으나 기분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글을 시작한 지 일 년째, 한글 파일에 쌓이는 글자 수만큼 확실해졌다.

자신은 글에 재능이 없다.

쓰면 쓸수록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무한히 반복하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일종의 영감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작가란 어쩌면 아버지가 짜놓은 계획에서 도피하기 위한 핑계였던 걸지도 모른다.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갖은 애를 다 썼으나 한계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젠 작업에 집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민수아의 차가운 말이 끈적끈적한 해초처럼 기분 나쁘게 머릿속을 내내 떠다녔다.

‘천윤성, 너 이딴 식으로 굴 거면 다신 오지 마.’

제까짓 게 뭔데? 지가 감히 나를 내쫓아?

처음엔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점차 의심이 든다.

혹시 민수아를 좋아하고 있었나?

생각해 보면 요양원에 필요 이상 자주 간 것도 그녀 때문임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

<꼭 아버지 때문이라면 올 필요 없어. 여기에서 일했다는 증명이 필요한 거라면 해 줄게.>

나무에서 떨어져 다친 그의 다리를 힐끗거리며 말하길래 비웃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윤성이 오기로 계속 나가자 그녀는 볼 때마다 불러서 지겨운 서류 작업이나 단순한 빨래 정리만 시켜댔다. 앉아서만 일할 수 있도록.

다리가 다 나아서는 멀쩡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나갔다. 늘 환자 취급하기에 그가 얼마나 남자답고 잘났는지 보여 주려는 치기였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윤성은 민수아에게 인생 상담을 하고 있었다.

<꼰대가 정해 놓은 정치인 따위는 되기 싫지만 그렇다고 죽도록 하고 싶은 일도 없어.>

<작가 지망생 아니었어?>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완성하고 싶은 소설이 있는 거야.>

<음, 뭐 어떠니? 하고 싶지 않은 것도, 하고 싶은 일이라고 치면 되지.>

말도 안 되는 위로를 해주지만 어떤 말이라도 편견 없이 들어줘서 그런가, 별말을 다 하게 됐다.

늘 그의 아버지를 우선시하던 주변 어른들, 그의 외모나 집안만 따지던 여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윤성이 불만을 내비치면 ‘호강에 겨운 철없는 소리’ 라던가,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정도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그에게 지나친 관심을 두지 않아서 시작된 호감이 결국엔 관심 끌려는 투정으로 바뀌었다.

돌아가신 엄마까지 언급하면서 샌드위치를 얻어냈을 땐 솔직히 기쁘기까지 했다.

조르고 졸라서 얻어먹은 샌드위치는 진짜 맛이 없었다. 햄, 계란, 상추를 넣고 어떻게 그리 맛대가리 없이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런데도 자신을 위해 서툰 손길로 열심히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후로도 내내 졸라댔다.

자존심 상하게도 윤성이 일방적으로 쫓아다녀서 이마저도 겨우 친해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새끼는 뭐지? 왜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 민수아 옆에 붙어 있는 건데?

그동안 요양원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 그녀에게는 ‘남자’가 생길 기미조차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그놈은 민수아를 제 여자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영역 표시하듯 자신을 훑어보며 비웃는 그의 눈길이 더럽게 기분 나빴다. 더군다나 그놈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매우 수상한 분위기가…….

윤성이 막 욕을 짓씹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아버지, 천부신이 갑자기 제 방까지 찾아와서 놀랐는데 다음 순간,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다짜고짜 뺨을 후려치고도, 부신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정함을 가장한 어투로 물었다.

“부산에 가지 못할 이유라도 있더냐?”

폭력보다 그에게서 풍기는 역한 냄새가 더욱 참기 힘들었다. 윤성은 북받치는 화를 억누르면서 천천히 일어나 대답했다.

“……제가 가도 아버지께는 전혀 보탬이 안 될 겁니다.”

“누가 너 따위에게 도움을 바랄까. 그저 나 대신 아랫것들에게 말을 전하면 된다고 했을 텐데?”

“하지만 아버지, 저는 아직 제대로 일도 배우지 못했고 더군다나 정치 같은 건…… 으윽.”

부신이 갑자기 손을 뻗어 윤성의 목을 움켜잡았다. 목이 졸린 와중에도 그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말았다.

숨이 막혀서 컥컥대면서도 윤성은 핏자국을 보지 않으려고 애써 눈길을 돌렸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부신은 일부러 피 묻은 손으로 느릿하게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가 너를 너무 곱게 키운 게지. ‘안 되는 것’과 ‘하기 싫은 것’도 구분하지 못하다니.”

“……아버지, 제발요. 저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맞지 않…… 크윽.”

으스러뜨릴 듯 움켜쥔 강한 악력에 당장이라도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이를 악문 윤성은 흐릿해진 시야로 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알고 있었다. 여기서 한 마디만 더 대들면 그는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반항은 기껏해야 여기까지였다.

목이 끝까지 졸려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기 전에 윤성은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대답했다.

“……네…… 시키시는 대로 다 하겠습…… 니다.”

목을 조르던 손이 담을 넘는 뱀처럼 스르르 빠져나갔다. 주저앉아 격한 기침을 토해 내는 그의 머리 위로 부신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누리는 모든 것은 나, 천부신의 것이다. 그러니 내게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지. 그것이 아들 된 도리란다.”

그의 폭력이나 역한 피 냄새보다 이런 ‘애정’ 표현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 이따위로 학대하면서도 아들이라 봐준다는 식의 가증스러운 애정은 전혀 고맙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느라 대답하지 않은 척했지만 다행히 부신은 그대로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윤성은 부신이 피를 묻혔던 제 뺨을 거칠게 문질렀다. 손바닥에 진득한 피가 묻어나왔다.

이 피는 대체 뭐지?

겉으로는 관대하고 공정한 회장인 척하던 아버지는 점점 그에게 이런 면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차마 캐묻지 못했던 건, 그 답이 너무나도 두려워서였다.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어떤 끔찍한 사실에도 아직 그는 도망칠 힘이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철부지인 척하면서 피하는 것도 더는 먹히지 않으니 절벽 끝에 몰린 것처럼 막막했다.

윤성은 눈을 질끈 감고 제대로 숨을 쉬려고 애썼다. 누군가에게도 말 못 할 공포와 슬픔이 그를 먹어 치우려고 포악한 아가리를 벌렸다.

제발 누군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줬으면 좋겠다.

<하고 싶지 않은 것도, 하고 싶은 일이라고 치면 되지.>

민수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에게 가장 적절한 위로가 되었던 건 그 말이었다.

지금 이 순간 윤성은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위로가 절실했다. 수아가 만든 맛대가리 하나 없는 샌드위치마저도 너무나도 먹고 싶었다.

* * *

[잘 있냐고 한 마디를 안 물어보네.]

수아는 핸드폰 문자를 들여다보며 한참 고민했다. 어색하게 헤어진 이후로 윤성이 처음 보낸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감정이 더 얽히지 않도록 잘라 주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내쫓듯 보낸 게 너무 마음에 걸렸다.

원래 저번처럼 막무가내로 군 적도 없는 앤데 정말 무슨 일이 있어서 삐딱했던 건 아닌가 걱정도 됐다.

진짜 위한다면 솔직히 말해 주는 게 좋을까? 난 시한부와 같은 처지라서 앞길이 창창한 너와 더는 엮일 수 없다고.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다시 문자가 왔다.

[빚진 거 갚아요.]

왜 하필이면 빚이야? 대번에 남에게 감정적인 빚을 쌓지 말라고 한 화희의 말이 떠올라 찔끔했다.

수아는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뭘 해 주면 되는데?]

답장은 바로 왔다.

[가능한 빨리 만나. 지금 당장이라도.]

[그럼 이따 6시 이후에 요양원 근처로 와 줄래? 사정상 멀리는 못 나가서.]

막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윤성인 줄 알았는데 화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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