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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34화 (34/100)
  • 34화

    수아는 손을 잡은 채 계단을 내려와 그에게 제안했다.

    “더럽혀지는 데는 정원 일이 최곤데, 우리 함께 잡초라도 뽑을까요?”

    “……잡초 말입니까?”

    “네, 잘 살겠다고 악착같이 버둥거리는 애들이 불쌍하긴 하지만 눈에 안 띄는데 심어 주면 되고요. 깔끔해진 정원을 보면 마음도 정화되는 것 같아서 기분 전환에 아주 그만이거든요.”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하고자 생각나는 대로 떠들자 그의 눈빛에서 서서히 찬 기가 사라졌다.

    대신 화희는 어이없다는 눈길로 헛웃음을 흘렸다.

    “……민수아 씨는 진짜 이상합니다.”

    “아침부터 칭찬을 들으니 힘이 불끈불끈 돋네요. 그래서 잡초 뽑기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가 그녀를 이끌고 현관을 나섰다.

    아쉽게도 넓은 정원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잡초를 포기하고 낙엽이라도 쓸려고 했지만 너무 깨끗해서 포기하고 산책 삼아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눈부신 햇살 덕분일까, 그사이 꿈의 여운은 흔적도 없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아침 식사를 기다리면서 거실에서 차를 마셨다.

    현실로 돌아온 수아는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다는 아니더라도 얼마간 생활비를 내고 싶어요.”

    찻잔을 내려놓은 화희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그건 민수아 씨의 ‘선’입니까?”

    “선을 긋는 게 아니라 내 최선이에요. 목숨부터 의식주까지 온통 신세만 지니까 기분이 좀 그래서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민수아 씨가 빚지는 게 아주 마음에 드니까. 뭐든 빚을 달아 두는 편이 유리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갚겠다는데 뭘 달아 두기까지 해요? 빚쟁이 같잖아요.”

    수아가 뜻밖의 말에 질색했으나 화희는 정색하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빚쟁이와 비슷해요. 인연이란 그런 거니까. 민수아 씨가 지금 내게 일원을 빚지면 다음 생에서는 일억으로 갚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죠.”

    “어머, 그런 고리대금 사채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현자들이 현생에 업을 쌓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돈이 그 정도인데 감정이 쌓이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됩니까?”

    “아뇨, 생각하기도 무서운데요. 앞으로 남에게 민폐 안 끼치도록 착하게 살아야 되겠어요.”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이미 충분히 착한 법성애자다우니까.”

    “이번엔 법성애자라고 분명 그랬…… 아니지, 그게 뭐 중요하겠어. 음, 인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한 가지만 물을게요. 내가 전생에 박화희 씨에게 갚을 게 있는 삶을 살았었나요?”

    그가 잠시 찻잔을 기울이며 침묵을 지켰다. 덩달아 수아 역시 숨을 죽이며 긴장했으나 그는 곧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뭐로 보나 이쪽이 갚고 있는 걸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음껏 나를 누리시죠.”

    “싫어요. 착한 법성애자는, 아, 옮았잖아요. 어쨌든 착한 법.선.호.자로서 조건 없는 대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아쉽군요. 수아 씨가 마음껏 벗겨 먹어도 얼마든지 기뻐하며 당할 자신 있는데. 이렇게나 원하는데 날 벗겨 먹어주지 그래요?”

    혀를 찬 화희가 일부러 끈적한 말투로 느물거리자 수아는 기가 막혀 진심으로 따져 물었다.

    “벗겨 먹는 게 그런 뜻이 아니…… 혹시 그런 속어까지 야하게 들리게 하는 것도 초능력이에요?”

    “잡초 같은 음심을 이렇게 말로라도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수아 씨에게 아침부터 남자답지 않게 상쾌하게 보이려면.”

    “아, 진짜 말을 말아야지.”

    수아가 벌떡 일어나 식당으로 향하자 화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돌아본 그녀는 검지를 와이퍼처럼 흔들다 역시 폭소가 터져서 마주 한참 웃어댔다.

    * * *

    법무팀 미팅으로 요양원에 왔던 민철이 수아의 사무실에 잠시 들렀다.

    그에게 커피를 내준 그녀는 화희가 없는 틈을 타서 내내 궁금했던 일을 물어보려 말을 꺼냈다.

    “저기요, 변호사면 아무래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게 직업이죠?”

    “대략 그렇…… 윽, 혹시 커피에 담뱃재라도 넣었어요? 맛이 왜 이렇습니까?”

    왜 다들 내 커피를 싫어하지? 나는 맛있기만 하고만. 수아는 민철이 커피잔을 저 멀리 밀어 두는 걸 노려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들을 믿어요? 전생이나 영혼 같은 거요.”

    못마땅하게 입맛을 다시던 그가 안경 너머로 수아에게 되물었다.

    “민수아 씨는 이런 일을 겪고서도 믿지 않을 도리가 있습니까?”

    “그건 그런데요, 변호사님이 이사님과 제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정확하게 답해 드릴 순 없지만, 일단 십 년 이상 모셨으니 웬만큼 다 알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나 오래요? 설마 이사님이 개인적으로 변호사가 필요할 만큼 사고를 많이 친…… 험한 일을 겪은 건 아니겠죠?”

    “뭐, 지금과 비슷합니다. 다른 건 그때는 이사님 단독이었다면…… 흠흠, 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사건 현장마다 두 분을 빼내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죠.”

    수아는 그에게 미안함 반, 고마움 반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사고뭉치 아이가 된 것 같아 민망하기도 했다.

    잠시 말을 멈춘 민철이 유심히 보더니 정곡을 찔렀다.

    “이사님을 어디까지 믿느냐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는 질문이겠군요.”

    “음, 못 믿는다는 게 아니라 가끔은 받아들이기 벅찰 때가 있어서요. 전 이렇게 되기 전까진 평범하게 자라왔거든요.”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워낙 이사님이 특별하시니까요. 내가 이사님을 믿고 모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다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선천성 소시오패스 갑 증후군에 걸린 보스 밑에서 연애 한 번 못 하고 이렇게 일만 할 수가 없…….”

    “내 보스기도해요. 계속 욕하면 이거 먹일 거예요.”

    심각한 이야기가 갑자기 화희의 뒷담화로 빠져들자 수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끊었다. 그가 억울하다는 듯 쳐다보아서 그녀는 협박하는 것처럼 커피잔을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갑 증후군을 부정할 순 없지만 까도 내가 깐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커피잔을 징그러운 벌레 보듯 질색하며 쳐다본 민철이 헛기침한 후 말을 이었다.

    “흠흠, 어쨌든. 전 이사님을 만나기 전에 쓰레기 같은 군상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특히 저처럼 비싼 변호사를 쓰는 부류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죠. 그런데도 잘 먹고 잘 삽니다. 양심이 있는 보통 사람들만 바르게 살면서도 힘든 일이 많단 말입니다.”

    잠시 뭔가를 떠올리듯 허공을 노려본 그가 자신의 재킷에 없는 먼지를 털면서 말을 끝냈다.

    “그래서 나쁜 놈들은 다음 생에 천벌 받을 거라고 믿어야 그나마 다리 뻗고 잘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사님은 권선징악이 아주 확실하거든요.”

    그는 가볍게 말했지만 ‘죄질이 나쁜 군상’을 언급할 땐 짙은 혐오가 묻어났다.

    수아는 잠시 의아해졌다.

    설마 예전에 험한 일을 많이 겪었나?

    변호사 일을 하면서 이토록 세상에 부정적이기엔 나이가 좀 젊어 보이는데.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젓던 민철이 뒤늦게 수아의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너무 많이 털어놓았다는 듯 서둘러 서류 가방을 집어 든 그는 나가다 말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경고했다.

    “그건 그렇고 민수아 씨. 앞날이 좀 성가시겠더군요. 이사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회장님과 주해린 씨가 힘을 합쳤으니까요. 아마도 민수아 씨를 미끼처럼 보고 있을 겁니다.”

    “네?…… 그쪽에서 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나요?”

    “회장님은 몰라도 주해린 씨는 아마도? 아시겠지만, 좀 특이 체질이라서요.”

    “특이 체질이라면 ‘영적 체질’이라는 거요?”

    “맞습니다. 그분들이 귀찮게 굴더라도 민수아 씨는 성질대로 하시면 됩니다. 뒤처리는 이사님이 알아서 하실 테니까.”

    “두 분 다 성격이 보통이 아닌 것 같던데 제가 어떻게요?”

    “회장님은 자기 혈육이라고 귀엽게 봐주는 양반이 아닙니다. 덕분에 어릴 적엔 이사님도 고생 많이 했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어른이라고 굳이 대우해 줄 필요 없다는 의미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말은 선천성 소시오패스 갑이 전하라는 말인 거죠?”

    “그 호칭은 잊어 주면 안 됩니까? 이사님이 민수아 씨에게만 사려 깊으시지, 남들에게는 개차반…… 흠흠, 많이 엄격하십니다.”

    이 사람, 저번부터 느낀 건데 생긴 거와 다르게 수다쟁이네. 다른 사람에겐 가차 없던데.

    수아는 민철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욕하는 척해도 화희가 다쳤을 때 얼마나 진심으로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지 보았다. 그래서인지 은근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마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확실히 버스 사고 이후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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