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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33화 (33/100)

33화

야오옹.

갑자기 목련 나무 아래에서 검은 형체가 후원의 담벼락에 올라서 날카롭게 울었다. 검은 고양이었다.

황궁에 날짐승이 있을 리는 없고 누군가 애완용으로 기른 듯했다. 적잖게 학대당한 듯 고양이는 바짝 마른 데다 군데군데 피딱지가 진 곳에 털이 빠져 있었다.

막 시녀에게 부탁해 먹을거리를 챙겨주려는 때, 복도에서 상시관이 외쳤다.

‘황태자전하 납시옵니다!’

남자가 들어오기도 전부터 피비린내가 그녀를 짓눌렀다.

숨을 멈춘 수아가 한발 물러서자 그것을 눈치챈 것처럼 남자가 바로 허리를 잡아챘다.

‘나는 비를 만나러 오는 날엔 검을 잡지 않습니다.’

뜻밖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믿을 수 없진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눈길을 내리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부드럽게 침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능숙하게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침의를 벗겼다.

수아는 협탁 위 향초의 불을 끄는 척하며 긴 비단 머리끈을 집어 들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목을 가로막은 남자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오늘도 비의 눈을 가리지 않겠습니다.”

“…….”

“아, 원하는 바가 없으면 나를 제대로 봐주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또 구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마치 협박처럼 들리는 말에 수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가리는 것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제 마음만은 보이지 않겠다는 나름의 항의였던 셈이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겠지. 원치 않아도 날이 갈수록 서로의 몸은 익숙해졌다. 그가 그녀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보지 않아도 그녀 역시 남자에 대해 알게 됐다.

잠시 망설이던 수아는 조용히 천을 내려놓았다.

“잘 하셨습니다. 나는 신부의 육체만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다정하게 속삭이며 그녀의 옷을 벗겨 나신으로 만들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곧바로 단단한 남자의 육체가 그녀를 벗어날 수 없게 옭아맸다.

수아가 눈을 감으려 할 때마다 손길이 짓궂어졌다. 그는 그녀의 예민하고 약한 부분을 빠짐없이 애무했다.

커다란 손이 여체의 곡선을 정성스럽게 쓰다듬자 아랫배에 열기가 들끓었다. 입술을 앙다물어도 신음이 샜다.

열락을 느끼는 자신이 수치스러워도 그녀는 어느새 그에게 젖어 들어 버렸다.

그의 피비린내는 어느새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솔향 같기도 한 그의 체취가 향기롭게 방안을 채우는 것 같았다.

수아를 내려다보며 눈을 맞춘 남자가 습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게 입 맞춰 보세요, 신부.”

그녀가 망설이자 그의 손이 예민한 지점을 스쳤다. 전율과도 같은 충격이 아랫배를 관통해 정수리까지 찌르르 울렸다.

“……아앗!”

얼떨결에 수아가 그의 가슴팍을 밀치며 허리를 뒤로 젖히자 남자가 양쪽 발목을 각각 잡은 채 잡아당겼다. 졸지에 무게 중심을 잃은 그녀의 몸이 그에게 더욱 밀착됐고 희롱은 더욱 짙어졌다.

“어서요. 그렇지 않으면 밤새도록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녀를 유혹하듯 가느다란 허리의 곡선을 진득하게 쓸던 그의 손가락이 탐스럽게 굴곡진 골반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속절없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응-.”

어떻게든 버티려 애쓰던 수아는 자신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놀란 것처럼 덜컹 내려앉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이 남자는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 걸까?

차가운 검날처럼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그는 몸을 맞대는 순간만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오로지 수아만 눈에 담았다.

그것이 싫으면서도 어떤 위로나 핑계가 된다.

이렇게 그에게 안기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배덕감이 자극으로 더해져 내부가 들끓는 것 같았다.

수아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의 붉은 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부드럽고 말랑한 그의 입술이 느껴지자마자 이성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가 입술을 맞대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턱을 잡고 거칠게 혀를 집어넣어 입안을 탐닉했다.

거침없는 입맞춤에 타액이 흘러내려 그녀가 혀를 깨물자 짐승처럼 목을 울린 그는 젖은 턱을 엄지로 훑으면서 가는 목덜미에 이를 새워 핥았다.

“참으로 예쁘군요, 나의 신부는.”

순식간에 찾아온 부유감이 아찔했다. 남자의 단단한 뼈와 근육의 느낌이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그녀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그의 어깨를 애원하듯 붙잡았다.

숨이 가빠 헐떡이는 수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의 반응이 매우 만족스러운 것처럼.

세상이 어지럽게 돌았다. 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거칠게 흔들리는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이 그저 세상에 남자가 전부인 것만 같은 행위였다.

끝도 없을 것 같은 뜨거운 밤이 어떻게 지났는지 몰랐다. 수아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은 한참 밝아 있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간밤의 기억이 떠올라서 깊은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그에게 안겨 신음하고 희열에 들떴던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심상이 적잖게 괴로워 그녀는 차마 눈을 뜨지도 못하고 옅게 흐느꼈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듯 어디선가 옅은 향기가 풍겨왔다. 조심스레 눈을 떴는데 머리맡에 흰 꽃이 보였다.

목련 한 송이가 가지째, 그녀가 간밤에 포기했던 비단 머리끈에 곱게 쌓인 채 놓여 있었다.

그가 오기 전, 창밖으로 하염없이 쳐다보았던 그 목련이었다.

그녀는 오후까지 내내 배게 위에 놓인 꽃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다 저녁 무렵에 맑은 물이 담긴 화병에 넣어 주었다.

금새 질 게 뻔하더라도, 가련한 꽃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피어 있길 바라는 소망을 담아서.

수아는 눈을 번쩍 떴다.

잠에서 깼는데도 희미하게 목련 향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아랫배는 아직도 뜨거웠다.

너무나 생생한 꿈의 여운에 그녀는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썼다 벗었다 잠시 버둥거렸다.

난 이런 쪽 판타지는 없다니까? 게다가 하필이면 상대가 왜 화희의 얼굴을 한 남자인 걸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격하게 의문스러웠다.

어떻게 꿈이 이토록 구체적인 스토리를 갖춰서 이어질 수 있지? 게다가 왜 이렇게 생생한 건데? 단편적이긴 해도 분명 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존재했고 순간의 감정까지 강렬했다. 마치 과거의 기억처럼.

설마?

혹시…… 이게 내 전생인 건 아니겠지?

아니야, 말도 안 돼. 평범한 내가 이렇게 쉽게 전생을 기억해 낼 리가 없다니까?

아무리 꿈이라고 부정해 보아도 꿈속 자신이 겪었던 감각과 감정을 떨쳐낼 수 없어서 그녀는 한참이나 천장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러다 목이 말라 시계를 봤는데 출근까지 시간이 많이 일렀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꿈이 계속될까 꺼려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출근 준비를 마쳤는데도 시간이 남았다.

발소리를 죽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수아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던 화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잘 잤어요?”

“…….”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꿈속에 보았던 남자와 화희가 매우 겹쳐 보였다.

발걸음을 멈춘 그녀가 얼어붙은 채 꼼짝하지 않자 신문을 내려놓은 화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런, 딱 봐도 잘 못 잤네요.”

수아는 가위에 눌린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긴 장신이 기척도 없이 조용히 움직이는 모습도 꿈에서 본 남자와 똑같았다.

섬찟한 두려움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꿈의 감정이 전이된 것만 같았다. 그가 두렵고 싫어서 이대로 뒤돌아 숨어 버리고 싶었다.

말도 안 돼. 이건 그냥 민망해서 그런 거야. 그렇게 야한 꿈을 꿔서 창피해서 그래.

수아는 다가오는 화희를 눈으로만 쫓으며 말도 안 되는 거부감을 억누르려 애썼다.

계단 아래 멈춰선 그가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더 말을 건네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는 그의 눈이 그녀를 압박했다.

뭔가를 초조히 기다리는 것처럼도 보여서 사실대로 말하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하지만 차마 꿈속의 남자 때문에 당신까지 무섭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 저기, 음, 대답이 늦었죠?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

“저기, 박화희 씨는 어떻게 한결같이 상쾌할 수 있을까 하고요. 이른 아침엔 사람이 좀 붓고 귀찮은 기색도 보이고 그래야지, 왜 늘 깔끔하고 그래요?”

억지로 꺼낸 말은 목에 모래가 낀 것처럼 까칠까칠하게 나왔다. 잠시 빤히 쳐다보던 화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럼 민수아 씨가 더럽혀 주시던가요.”

“……네?”

“아침부터 더러워야만 사람다운 거라면 마구 더럽혀 달라고요. 조깅이라도 갈래요?”

그의 흰 손이 반응을 떠보는 것처럼 그녀에게로 뻗어 왔다. 잠시 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전의 일을 반복할 순 없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헛기침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수아는 스치듯 가볍게 그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조깅은 싫어요. 그건 연약한 나만 더러워지는 것 같더라고요.”

막상 손을 맞잡고 보니 희한하게도 안심이 됐다. 그에게 들었던 거부감이 거짓말인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화희가 꽉 붙잡는 것처럼 깍지까지 끼는 바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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