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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32화 (32/100)

32화

별말 아니잖아. 근데 왜 이렇게 말이 무겁게 느껴질까. 혹시 기억하라던 전생의 일과 관련이 있나? 더 물으려는 찰나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손짓했다.

“이만 퇴근합시다.”

“안 돼요, 밀린 일이 많아서.”

“내가 이대로 버티고 있어도 좋습니까? 낙하산보다 더한 소문이 날 텐데?”

“먼저 가면 되잖아요.”

“민수아 씨를 두고 갈 생각 전혀 없습니다.”

“이사님, 지금 땡땡이치라고 강압적으로 굴고 있어요.”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는 겁니다만.”

수아는 잠시 책상 위에 쌓인 일 더미와 그를 저울질해 보았다.

고용주의 말을 잘 들어야지, 암.

그래도 양심도 좀 챙겨볼까.

숄더백은 맨 그녀가 서류까지 한아름 챙기자 화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액세서리에요. 고용주에게 어필하기 위한.”

수아가 둘러대자 픽 웃은 그는 서류를 받아들고 문을 열어 주었다.

* * *

그와 나는 무슨 사이일까?

‘생존’에 중점을 둬야 하는 마당에 이런 감정에 신경 써도 되는 걸까?

저녁 식사 후, 그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다 문득 떠오른 의문이었다. 이것은 하우스 메이트 같은 장면이기도 하고 또는…… 연애 같은 장면이기도 하니까.

수아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화희를 쳐다보며 머릿속으로 ‘관계’를 정리해 보았다.

화희는 그녀에게 고용주이자 집 주인, 그리고 목숨을 구해 주는 기사님이었다.

사실 그는 주해린과의 관계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그녀는 ‘현’ 피앙세라고 불릴 입장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또 그리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건 여러모로 ‘생사’가 걸린 그에게 감정이 깊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키…… 키스를 했다.

그는 그날 이후,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더욱 친밀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일종의 ‘선’을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화희는 그녀에게 ‘직진’이었으니까 별로 달라진 건 없지만…….

그렇다면 이것은 ‘썸’일까?

“왜 그렇게 봅니까?”

“내, 내가 어떻게 봤는데요?”

수아는 화희가 말을 건네자 화들짝 놀랐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제 시선은 그의 입술과 가슴팍을 더듬고 있었다.

얼른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빛과 시선을 정비했으나 늦었다. 턱짓으로 자신을 가리킨 화희가 예의 ‘놀리는 표정으로’ 느물거렸다.

“야성미가 넘치는 표정?”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대체 그건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입니다. 야성적으로 나를 사냥해서 물어뜯고 싶다는 의지가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요.”

“하, 설마 내가요?”

“나쁘진 않습니다. 오히려 좋습니다. 남자는 특별한 여자에게만은 짓밟히고 싶은 로망이 있거든요.”

“그딴 로망은 처음 듣는데요?”

“민수아 씨에게도 분명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하얀 도화지를 보면 낙서하고 싶거나 아무도 밟지 않는 눈밭에 내 발자국을 찍고 싶은 정복욕과 비슷한.”

“이사님이 하얀 도화지며 눈밭이라고요?”

“당연하죠, 연애 경험이 전무하니까. 전에도 말했을 텐데요, 나는 매우 수줍고 가녀린 ‘동정적인’ 남자라고. 그러니 잘 보살펴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잖습니까?”

그때의 동정은 아프니까 간호해 달라는 뜻이었을 텐데!

“아름다운 뜻의 단어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지 마요!”

수아가 결연하게 외치자 어깨를 으쓱한 화희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용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대략 500년 정도 홀로 살았으니까.”

“잠깐! 지금 500년이라고 했어요? 설마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기억하는 생들의 시간을 모두 합하면 그 정도 된다는 거지. 처음 기억은 1000년도 더 전이고. 아, 이젠 헷갈리는군요, 환생이란 게 워낙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라서.”

입을 벌린 채 수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수롭지 않게 시간의 폭탄을 날린 화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표정을 살피다 물었다.

“말하지 말 걸 그랬나요? 무섭습니까?”

무섭기보단 그와의 거리가 까마득했으나 그렇게라도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수아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중얼거렸다.

“그렇다기보다, 음, 그래서 그랬군요.”

“어떤 점에서?”

“어른에게 버릇없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거든요. 특히 저번에 서 할아버지한테 막 반말할 때.”

“……그게 또 그렇게 됩니까?”

“그럼요. 어쨌거나 박화희 님께선 이번 생에는 경로우대가 중요한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났잖아요. 음, 나이를 따지기 애매하지만 요즘은 민증 나이를 우선으로 치니까 대세를 따르는 게 어때요?”

이번엔 화희가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민수아 씨는 볼수록 이상하네요.”

“제가 감히 이사님만 할까요?”

거실에 달팽이가 기어가는 듯 느릿한 침묵이 흘렀다.

수아는 두근거리는 것처럼 들쑥날쑥 날뛰는 감정을 숨기려고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이상한 우리를 위해 ‘짠’해요. 이렇게 끼리끼리 모이기도 힘들 텐데, 참 대단하죠?”

“‘우리끼리’라고 해 줘요. 어감이라도 좋게.”

화희가 찻잔을 마주 들면서 투덜거리듯 대꾸했다. 그녀는 잔을 든 채로 그를 흘겨보았다.

“참, 한 마디를 안 지시네요.”

“민수아 씨가 이쪽에게 좀 져 주는 건 어때요? 이 대화의 시작은 그쪽의 야성미 넘치는 표정이었으니까 동정적인 인간에게 동정을 베풀어서.”

“좋은 단어를 자꾸만 나쁜 쪽에 이용하지 말죠?”

“그쪽이 이런 포인트에만 확실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더 쉽습니다. 순진한 이쪽은 민수아 씨가 이끄는 대로 따를 뿐이니까요.”

수아가 야한 말장난에 몸서리쳤으나 화희는 즐겁다는 듯 느물거리며 대꾸했다.

그 이후로도 찻잔을 술잔처럼 챙챙, 맞부딪치며 한참 옥신각신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시간의 흐름처럼, ‘관계’를 정의하기도 전에 감정이 깊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 * *

그날 밤, 잠자리에 누운 수아는 ‘전생’에 관한 화희의 말을 되새기다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있어 화희는 그저 ‘생존’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졌고 그의 마음이 궁금했다.

화희는 ‘민수아’를 살리는 것 외에 그녀와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 건지.

<당신이 괜찮아지면 대가만 받고 반드시 놓아주겠습니다.>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절절한 고백까지 하면서 목숨까지 걸고 왜 자신을 놔주겠다고 하는 건지, 그의 말이 점점 더 걸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은 오래도록 함께하자는 말이 아니었다.

어쩌면 화희는 그녀와의 미래보다 그와 그녀가 만난 이유 자체가 더 중요할지도 몰랐다.

긴 시간을 기억하는 그가 ‘민수아’의 생존에 유독 집착하는 이유, 그것은 처음에 그가 언급했던 그녀와의 ‘전생’의 하루일 것이다.

그와 나는 무슨 사이였을까, 혹은 나는 무엇이었기에 그렇게 절절해야만 할까.

잠깐 꿈속의 사극 장면이 스쳐 지나갔으나 수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그녀가 공주였다거나 화희가 정략결혼 상대자였다는 엄청난 스케일은 둘째 치더라도. 전생을 기억한다는 건 모래밭에서 특정한 모래 한 알을 찾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그러니 평범한 자신이 쉽게 기억해낼 거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한참 천장을 바라보며 머리를 애썼으나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잠에 빠졌을 때, 그녀는 또 그 꿈을 꾸었다. 이번엔 더욱더 생생하게.

수아는 자신의 모습을 자조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살결이 비치는 침의, 향유를 바른 결 고운 머리칼, 윤이 나도록 다듬은 피부, 빛처럼 반짝이는 장신구. 공주였을 때보다 더욱 곱고 사치스러워졌다.

‘태자비마마께서 어서 왕손을 잉태하셔야 합니다. 하면 입지가 단단해질 것이옵고 마마를 업신여기는 이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시장이 그녀를 단장시키며 귓가에 속살거렸다.

한동안 오지 않던 남자가 그녀를 찾기 시작하자 태자궁은 봄날의 장터처럼 들썩거렸다. 그 가운데 더한 수렁에 빠진 것은 수아뿐이었다.

왕손이라니, 덧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절대 살인귀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 낳는다 해도 결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황궁에서 키울 수는 없었다.

그녀의 가솔은 남자의 약속대로 따뜻한 남쪽으로 귀향 보내졌고 궁에는 그녀 홀로 남았다.

이제 지킬 사람들도 없이 오로지 의지로만 이 삶을 버텨내기 쉽지 않았다. 침전에 갇혀 남자만 기다리는 삶을 언제까지 버텨야 할지 까마득했다.

시녀들이 모두 나가자 수아는 답답한 마음에 손수 창문을 열었다.

막 봄이 찾아와 화단의 나무들이 꽃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그중 목련의 마른 가지에만 꽃이 피었다.

목련은 유달리 금방 지고 마는데 왜 이리 일찍 폈을까. 그녀는 때 이르게 홀로 핀 흰 꽃송이가 가련해 보여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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