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그녀는 생긋 웃더니 그때처럼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던졌다.
“벌써 언니가 화희 오빠 피앙세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근데 이 정도밖에 안 되면, 전 피앙세인 내 체면은 뭐가 돼죠?”
“갑자기 다들 왜 나한테 새타령을- 잠깐, 뭐라고요? 전 피앙세?”
“여기는 시끄러우니까 다른 데 가서 얘기해요.”
수아가 되물으려는데 여전히 대거리 중인 할아버지들을 돌아본 여자가 갑자기 팔짱을 꼈다. 질색하며 뿌리치려고 했지만 팔을 뺄 수가 없었다. 하늘하늘하게 생긴 것에 비해 힘이 무척 셌다.
“어, 이거 놔요!”
“이번에도 뿌리치면 가만 안 둘 거야. 저번에 내가 얼마나 기분 나빴는 줄 알아요? 기껏 구해 주러 간 건데.”
버스 사고 전에 날 구해 주러 왔다고?
수아가 순간 멈칫하자 그녀가 토라진 것처럼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흘겼다.
오늘 일진이 왜 이렇지?
저번주에 사일이나 월차를 내는 바람에 일이 잔뜩 밀렸는데 자꾸만 방해받는다.
수아는 얼떨결에 모르는 여자를 제 사무실에 들이고 커피까지 내주는 자신이 황당했다.
그런데 마지못해 내려놓은 믹스 커피를 보자마자 여자가 새침하게 잘라 말했다.
“나는 종이컵 따위는 입도 안 대요.”
“다른 컵은 없으니 그럼 마시지 마요.”
“무슨 손님 대접이 이따위에요?”
“내가 초대한 손님이 아니니까요.”
“어머, 내 남자를 빼앗아갔으면서 참 당당하네요.”
내 남자? 주먹이 절로 불끈 쥐어졌다.
본인에게 듣지 않고선 아직 모를 일이야. 수아는 속으로 ‘참을 인’자를 그리면서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를 자세히 훑었다.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난감했다. 화희의 전 약혼녀라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버스 사고를 알았던 건지.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녀 때문에 오히려 직행 버스를 놓쳤고 오히려 돌아가는 버스를 타서 사고를 당했다.
이것저것 따져보던 수아는 가장 평범하고 무난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이름이 뭐예요?”
“주해린. 민수아보단 내 이름이 더 예쁘죠?”
기분 나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오히려 흥, 아이처럼 콧소리를 낸 해린이 핸드백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더니 열심히 들여다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수아는 기가 막혀 쏘아붙였다.
“머릿결보단 예의부터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뭐라고요?”
“그렇잖아요. 멋대로 남의 직장에 찾아와선 무례하게 말하고. 왜 날 찾아왔는지 당장 불지, 아니 답하지 않으면 쫓아낼 거예요.”
흥, 또 콧소리를 내려 하기에 수아는 보란 듯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관리팀이죠? 제 사무실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있어서요. 지금 당장 경호 과장님을-.”
“어머, 이 언니 성격 진짜 이상해!”
해린이 다급하게 거울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 수아는 아까처럼 힘에 밀릴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네가 더 이상해요. 그러니까 내쫓기 전에 빨리 공손하게 답해요. 사고를 막으려 했단 건 무슨 뜻이에요?”
“음, 그냥 가끔 그런 게 보여요. 그래서 맞나 확인하러 갔었어. 화희 오빠 피앙세라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왜 자꾸 나더러 피앙세라는 거죠?”
“그야 화희 오빠가 숨겨 놓은 여자니까. 그래서 할아버지도 그렇게 부르시잖아, 왜 나한테만 따져요?”
“숨겨 놓은?”
“오빠랑 같이 살잖아. 오빠가 아무나 그 집에 들여놓는 줄 알아요? 우리도 갈 수 없으니까 귀찮게 여기까지 온 거고.”
수아는 위협하듯 들었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사실은 혼자 떠든 것에 불과하지만,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는 해린을 미심쩍게 노려보았다.
전에 날 만나러 왔던 이유가 ‘보여서’라면, 이 여자도 화희처럼 예지 능력 같은 게 있는 건가?
“기분 나빠. 다른 사람들도 ‘보인다’고 말하면 꼭 그렇게 쳐다보더라.”
그녀를 마주 보던 해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수아는 얼른 고개를 젓고서 캐비닛에서 숨겨 두었던 찻잔을 꺼냈다.
“아, 미안해요. 못 믿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내 일이니까 한 번 더 생각해 본 거예요. 자, 여기다 옮겨 주면 커피 마실래요?”
커피잔은 저번에 화희가 다녀간 후에 몰래 사둔 것이었다. 낯선 여자에게 이 정도까지 대접하고 싶진 않았지만 좀 더 캐물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해린은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묘하게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화희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나 남을 깎아내리는 말투가 무례해서만 그런 것 같진 않고.
아마도 그 환영 같은 것 때문일까?
해린과 닿은 순간 꿈에서 보았던 장면이 스쳐 갔었다. 분명 제 꿈의 한 장면이었는데도 해린이 주인처럼 보였던 그 환영은 뭐지?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아 줄래요? 꼭 화희 오빠 같잖아.”
“내가 어떻게 봤는데요?”
“난 아무것도 안 빼앗았어요. 오히려 언니한테 남자를 뺏겼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사과해야죠.”
빼앗다니?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꼭 말싸움에 이긴 아이처럼 으쓱하며 찻잔을 입에 대려던 해린이 갑자기 탄성을 흘렸다.
뭘 하나 싶었는데 금박을 입힌 찻잔에 비친 자기 얼굴을 쳐다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미안한 짓 했으니까 이 잔 나 주면 안 돼요? 여기에 비친 내가 너무 예뻐.”
얘, 정말 괜찮을까? 보면 볼수록 매우 남다른데. 어이가 없어진 수아의 의심이 걱정으로 바뀌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화희가 성큼 들어왔다.
한순간이지만 마주 앉은 둘을 재빨리 훑는 그의 얼굴에서 전에 본 적 없는 표정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과거와 현재. 기분 이상하지? 나도 좀 그래. 그래도 지금의 내가 더 예쁘-.”
그 사이에 해린이 끼어들자 눈을 가늘게 좁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보았는지 몰라도 그와 눈이 마주치자 해린이 움찔 떨면서 벌떡 일어났다.
“안 그래도 가, 가려고 했어! 난 할아버지 따라온 게 다야. 그리고 진짜 아무 말 안 했…….”
화희가 짧게 혀를 차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용이 들리지 않았는데도 해린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의아해진 수아가 가까이 다가서려고 하자 그는 앞을 막아서듯 손만 뻗어 문을 열고 그녀에게 설명했다.
“불청객에게 급한 일이 생겼나 봅니다. 인사도 못 하고 간다는군요.”
“너무해, 진짜!”
해린이 겁먹은 표정으로 쪼르르 달려나가자 문을 닫고 기대선 화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시끄러운 일을 겪게 해서.”
“아, 괜찮아요. 당황하긴 했지만 뭐,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그리고 그건 어릴 적 일입니다.”
“그…… 새라는 거요?”
차마 피앙세라는 말이 오글거려서 제 입으로 할 수 없는 수아가 되묻자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조부가 일방적으로 그 집안과 계약한 겁니다. 파기한 지는 이미 오래고.”
“음, 그래도 전 피앙, 아니, 해린 씨를 이렇게 보내도 되나요?”
“아무 사이 아니니까요.”
“해린이 생각은 다른 것 같던데요.”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민수아 씨 생각만 중요하지. 절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녀와 해린을 처음 번갈아 보던 묘한 표정이 걸렸지만 지금 진지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걸 보니 당황한 것 같았다. 와, 이 남자도 ‘당황’ 같은 걸 하는구나.
수아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오해 안 해요.”
“정말입니까?”
“네, 그러니까 눈에 힘 좀 풀고 앉으세요. 너무 박력 넘쳐요.”
수아가 해린이 앉았던 자리를 권하자 순순히 앉은 그가 느슨하게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짓씹듯 말했다.
“주해린은 타고난 ‘영적’ 체질입니다. 그래서 가끔 과거나 미래를 볼 수 있는 겁니다.”
“아, 그게 정말이었구나.”
“제멋대로 해석해서 탈이지만. 전생을 기억하면 현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가장 좋은 케이스죠.”
“전생까지 기억한다고요?”
그녀는 해린이 건드렸던 잔을 치우고 새 잔을 꺼려다 멈칫했다. ‘전생’이란 말에 순간 가채를 쓴 여자가 떠올랐으나 고개를 저었다.
“사람 흉내를 내니 인성이 저렇습니다. 본래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잊고.”
“그럼 전생에 사람이 아니었단 뜻이에요?”
그러니까 전생에 뭐였는지 보인다고 거지? 화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놀란 수아가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그럼 나는요? 뭐가 보이는데요?”
화희가 뜻밖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한참 쳐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시간을 들여서.
그가 뜸을 들이자 왠지 애가 탔다. 웃을 듯 말듯 입꼬리를 올린 화희는 음미하듯 느릿하게 답했다.
“당신, 온전한 민수아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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