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물론 지금의 ‘그녀’는 완전히 다르다.
민수아는 보기엔 여리지만 볼수록 의지가 강하고 심지가 단단했다. 그에게 위로를 건네고 위안을 줄 만큼이나 심성이 따뜻하기도 했다.
수많은 생을 통틀어도 이런 여자는 오직 민수아 단 한 명뿐이었다.
그녀를 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수아의 마음 한 자락이라도 더 갖고 싶고, 손끝만큼이라도 더 닿고 싶어서 애가 탄다.
그렇다면 피붙이를 향한 그녀의 눈물에, 진창으로 처박히는 이 감정은 치졸한 시기인 건가? 자신만 그녀의 애정을 오롯이 독차지하고 싶어서.
“왜 자꾸 그렇게 힐끗거려요?”
수저로 밥을 뜨던 수아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씹는 모습이 참 귀엽군요.”
“뭐라고요?”
“혼자 잘도 먹네요.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하는 나를 앞에 두고.”
화희는 일부러 다친 팔을 들어 보이고서는 억지를 썼다. 그녀를 잡아 눕히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자해한 것에 불과하면서, 능청스럽게도.
그의 집요한 시선에 수아가 숟가락을 놓고 얼굴을 붉혔다.
그래, 이런 걸 보니 이것은 시기가 분명했다. 오로지 민수아가 자신에게만 반응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조금은 질투가 섞인 마음.
낮의 키스가 떠오르자 황홀한 약에 취한 것처럼 기분이 급속도로 좋아졌다. 화희는 그녀의 입술에 머물려는 시선을 억지로 다른 곳에 돌리면서 웃었다.
이렇게 들쑥날쑥 오가는 제 감정이 어색하면서도 썩 나쁘진 않았다. 수치심을 조금만 감수하면 민수아의 다정함에도 취할 수 있었다.
그가 고등어조림을 노려보면서 입을 벌리자 수아가 어이없다는 듯 쏘아보았다. 하지만 투덜거리면서도 이내 두툼한 살을 발라 숟가락 위에 올려 주었다.
“입에 넣는 건 할 수 있죠? 이제까지 잘만 먹는 거 내가 다 봤거든요?”
생선을 좋아하지 않지만 막상 입에 넣자 달콤했다. 지금 같으면 수아가 타준 독약 같은 커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그녀의 동정을 아주 잘 이용한 화희는 식사가 끝나자 방으로 올라가려는 수아를 붙잡았다.
“차 마시는 것도 도와줘요. 이 가여운 팔로 무거운 찻잔을 들어 올리기가 버겁군요.”
“언제까지 그 가여움을 무기로 쓸 건데요?”
“날 똑바로 바라볼 때까지?”
“…….”
“낮엔 내가 수줍었다 치지만, 지금은 수아 씨가 날 똑바로 안 봐주네요.”
에둘러 낮의 키스를 언급하자 그녀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곤 먼저 소파에 가서 앉았다. 탁탁, 마지못해 옆자리를 치는 손길에 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려 시선을 돌려야 했다.
때마침 이 실장이 차 세트가 담긴 트레이를 밀고 왔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탁자 위에 그릇을 내려놓는 그녀에게서 험악한 형상이 그림자처럼 아른거렸다.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존재’일 뿐 먼지처럼 떠돌던 사념들은 ‘사념의 집합체’인 그에게 힘을 받아 형체를 갖췄다. 사념이 의지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예지’일 뿐이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다.
그래서인지 웬만큼 기가 약한 사람들은 사념들에 짓눌려 화희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이 실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사님 불러드릴 테니 그만 퇴근하세요.”
그가 말을 건네자 이 실장은 예의 바르게 웃었지만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민수아는 다르다.
“자, 똑바로 봤어요. 그러니까 찻잔은 그 가녀린 팔로 용감하고 씩씩하게 혼자 잘 들어 봐요.”
어느새 눈가에 붉은 기도 가셨고. 투덜거리며 그에게 찻잔을 넘겨주는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화희는 순간 흠칫했다.
잠깐 수아에게 희미한 그림자가 스치듯 보였다.
설마? 업과 비슷한 환영인가 싶어 자세히 보았으나 그림자는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떠돌던 사념 하나가 저택의 결계에 닿아 흩어진 게 느껴졌다.
저것이었나? 그녀를 다시 자세히 살폈으나 조금 전 그림자는 착각인 듯 깨끗했다.
그녀는 아홉 번째 전의 생에서 만났을 때를 제외하고 늘 사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를 향한 단죄는 왜 이리 끈질기고 지독한 건지 의심할 만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녀를 지킬 것이다.
화희는 정신을 가다듬고 공간 안에 잡념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숨을 깊게 불어넣었다.
민수아는 자신이 만든 결계 안에서 안전하다.
그는 온갖 감정이 들끓는 마음을 숨기며 그녀의 모습을 남김없이 눈에 담았다.
* * *
“그쪽은 붉은 꽃나무가 들어가야 기가 보강된다고 했잖나!”
정원 한쪽에서 서 할아버지의 노한 음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정원수를 심던 남자 둘이 난처한 표정으로 수아를 넘겨보았다.
잠시 도면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에서 일하다 말고 중재자로 막 불려온 참이었다. 계획대로 정원 조경을 진행하는데 서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서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릴 테니까요.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살살 말씀하셔도 돼요. 그리고 위험하니까 조금만 뒤에 계시고요.”
수아는 난색을 표하는 관리팀과 일부 협의한 대로 감독자처럼 버티고 선 할아버지를 말렸다.
그제야 할아버지가 멋쩍은 듯 웃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미안하이, 내가 마음이 급해서 말이야.”
“김 할머니께서 붉은 꽃을 좋아하시죠?”
“흠흠, 그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풍수지리상-.”
“참 로맨틱해요. 제가 모레 할머니 입실하실 때 애쓰신 거 꼭 말씀드릴게요.”
“흠흠, 자연스럽게 말해줘. 누구처럼 너무 팔불출로 보이지 않게.”
“네, 대신 할머니 방에서 보이는 이곳만 허락 받은 건 양해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수아를 쳐다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투덜거렸다.
“이렇게 야무지고 고우니 그 팔불출이 더 안달했지. 거기에 딸린 군상들이 몇인데 아주 번거롭게 됐어.”
“예?”
“그래도 민 팀장이 잘 받아주는 모양이야? 사고 났대서 좀 들여다봤는데, 엄동설한에 팔불출한테만 봄꽃이 폈더구만.”
아무래도 화희 얘기 같은데 이상했다. 친숙하게 팔불출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지만 그녀는 사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수아가 그저 집에 일이 생겨서 월차를 낸 걸로 알았다.
게다가 봄꽃?
생각보다 화희와 가까운 사이인가? 전부터 둘의 대화도 그렇고 혹시 이분도 범상치 않은- 어?
미심쩍은 의문이 들려는 찰나 따가운 시선을 느낀 수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몇 걸음 떨어진 뒤쪽에서 누군가 뒷짐을 지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격식을 갖춘 정장의 노신사가 수아와 눈이 마주치자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사진보다 실물이 낫구만.”
곁에 있던 서 할아버지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그녀를 가로막았다.
“이곳도 담을 높여야 해. 온갖 짐승이 함부로 넘나드는 걸 막으려면.”
눈매가 강하고 자세가 꼿꼿한 노신사는 서 할아버지에게 성가시다는 듯 손짓했다.
“내 손주 피앙세 좀 보겠다는데, 너 따위가 감히 어딜 나서?”
“그 손주에게 허락은 받았고? 구렁이 따위야말로 썩 꺼져.”
뭔 새? 구렁이? 자신을 두고 벌어지는 듯한 날 선 대화에 당황하던 수아는 노신사를 자세히 살폈다. ‘손주’라는 말이 유독 걸렸다.
혹시 이분이 화희의 조부인가? 그 HH그룹 회장님?
노신사가 그녀를 노려보며 못마땅한 듯 타박했다.
“참 경우가 없구만. 어린 것이 먼저 웃어른에게 인사 왔어야지, 여기까지 오게 해?”
“안녕하세요, 저는 민수아라고-.”
잠시 고민하던 수아는 우선 예의를 차리자 싶어 허리 숙여 인사하려 했다. 그러나 서 할아버지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거리했다.
“지 경우도 안 차리는 놈이 남의 경우는 왜 찾아? 역시 씨도둑은 못하는 법이라더니, 조손끼리 고약한 말버릇이 어찌나 똑같은지.”
“같잖은 늙은이가 감히 얻다 말을 섞어?”
“같은 늙은이끼리 섭섭하게 왜 이래!”
수아는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는 두 할아버지를 말리려다 구경하듯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눈에 띄게 예쁜 여자였다. 긴 머리에 붉은 립스틱, 굴곡진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검은 원피스, 처음 봤는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좋지 않은 느낌으로.
어디서 본 거지? 그녀가 수아를 향해 팔랑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바로 앞까지 와서 호기심 넘치는 눈길로 대놓고 수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 눈길에 번쩍 기억이 스쳤다. 납골당 앞 정류장! 그래, 버스를 타려던 그녀에게 아는 척하면서 이상한 행동을 했던 그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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