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표정이 왜 그래요?”
그녀가 든 짐들을 보자마자 성큼 다가오던 화희가 멈칫 물었다. 수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하느라 애썼다.
“엄마가 무겁게 이런 걸 싸 주시잖아요. 내가 얼마나 잘 처먹고 다니는데 걱정도 참.”
“무거우면 이리 줘요.”
“내가 들 거에요. 우리 엄마가 나 먹으라고 싸준 건데 내가 들어야-.”
아, 안 되는데. 그녀는 투정 부리듯 말해 놓고 제풀에 눈시울이 뜨거워져 말을 멈췄다. 급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참았던 눈물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어, 어?”
화희가 전에 없이 당황한 표정으로 외마디 소리를 흘렸다. 수아 역시 자신이 당황스러워서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봇물 터지듯 쌓아둔 말을 쏟아내고 말았다.
“저기요, 나 살려줘서 너무 고마워요. 내가 그날 주, 죽었으면, 우리 엄마는 같은 날 제사상을 두 번이나 차릴 뻔했어. 우, 우리 엄마 너무 불쌍할 뻔했어요.”
“민수아 씨, 당신이 살아줘서 고마운 건 나-.”
“나요, 진짜 엄마 때문에 못 죽어요. 악착같이 오래오래 살 거야.”
서러운 아이처럼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는 그녀를 보고 화희가 짧게 신음을 흘렸다.
손이 모자라서 눈물을 닦지 못해도 목숨 걸린 동아줄처럼 그녀는 쇼핑백을 놓지 못했다.
서러웠다. 슬펐다. 착하고 좋은 우리 엄마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가족을 두 번이나 잃어야 해? 나는 또 뭘 잘못했길래 자꾸 죽어야만 하고?
차 안에 있던 민철이 나와서 화희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게 더 창피해서 그만 울고 싶었지만 봇물 터진 것처럼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조심스레 어깨를 감싼 화희가 손수건을 건넸으나 그녀는 등을 돌려 피하면서 연신 훌쩍거렸다.
“저리 가요,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아. 아니야, 죽는다니. 이런 말은 재수 없으니까 하면 안 돼. 아, 내가 뭐라는 거야. 나 왜 이래.”
해가 지면서 하늘과 거리가 빨간빛에 물들었다.
다 큰 여자가 길거리에 서서 훌쩍거리고, 한쪽 팔에 깁스를 한 남자가 우는 그녀의 주위를 안절부절못하며 빙빙 돌고.
차 안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창피함에 머리를 감싸고 있는 남자 하나가 보기 드문 풍경을 만들었다.
* * *
곤란한 일이었다. 눈물을 보인 이후 수아는 제대로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식사하면서도 내내 시선을 그 외의 다른 곳에 두었다.
아직 붉은 수아의 눈가를 힐끗거리던 화희는 이미 죽은 짐승의 내부를 잔인하게 파헤치며 물었다.
“고등어조림, 한 입만 먹어도 됩니까?”
“……진짜 이러기에요?”
“수아 씨를 울린 가증스러운 물짐승이니까요. 어서 빨리 없애버리는 게-.”
“먹어요, 다 발라 먹어요! 누가 고등어 때문에 울었을까 봐?”
화희는 눈을 흘기며 젓가락을 움켜쥐는 수아를 보며 미소짓는 척했다.
그는 그녀가 제 기분을 눈치채지 않게 내내 조심했다. 들떴던 기분이 민수아의 눈물 한 번에 단숨에 진창으로 처박혔지만 그것을 티 내면 안 된다는 ‘인내심’ 정도는 다행히 배웠으니까.
화희에게 어머니란 그저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출구’ 같은 것뿐이었다. 모든 생을 통틀어 그의 부모들은 도구로써 그를 낳았다. 평생에 걸쳐 따먹는 과일처럼 마구 이용했다. 익기도 전에 껍질을 벗겨 으깼고 짓무르면 사정없이 살을 발라냈다. 쓸모가 없으면 벌레가 파먹도록 흙바닥에 내팽개쳤다.
현생의 모친은 그를 부친에게 버리듯 던져 놓고 ‘통장’처럼 여겼으며, 그의 부친은 그를 조부에게 버려 놓고선 ‘적금’처럼 여겼다.
‘나요, 진짜 엄마 때문에 못 죽어요. 악착같이 오래오래 살 거야.’
그래서 수아의 말을 듣는 순간 배알이 뒤틀렸다. 죽지 않아야 할 이유가 피붙이라니, 그에겐 가당치도 않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시기 같기도 하고 미움 같기도 한.
가솔들 때문에 목숨을 억지 연명을 하고 있던 그녀가, 민수아의 말에 대번에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했다.
한 번도 제 발로 그를 찾아 주지 않던 신부였다. 그가 찾으면 마치 인형처럼 꼼짝 않고 내내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제 아비를 살리는 데에는 달랐다. 먼저 찾아 오고 심지어 손마저 내밀었다. 그들은 밤이 깊도록 뜨겁고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모든 것을 내주진 않았어도 제가 다가가는 것만은 허락했다 믿었다.
동이 트니 이미 신부는 없었다. 간밤, 지낸 흔적조차 없었다. 모든 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냉기가 가슴에 들어찼다.
예정된 선황의 처형 시 이후, 신부가 찾아왔을 때 화희는 처음으로 그녀를 박대했다.
그는 신부를 문밖에 세워 둔 채 찬 말을 던졌다.
‘비는 살리고 싶은 목숨마다 내게 하룻밤을 내줄 셈입니까?’
‘……제 아버지는 어찌 되셨습니까? 그것만 답해주시면…….’
‘글쎄요, 그대의 하룻밤이 얼마나 값어치가 있을런지.’
화희는 일부러 선황을 귀향 보냈다는 사실은 숨겼다. 어쩌면 죽는 게 나을 몰골이 되었다는 것도.
등불에 비친 창문의 인영이 사시나무 떨듯 떠는 걸 보면서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수치심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자신이 오히려 심히 모욕받은 것 같았다.
화희가 손짓하자 시관이 그녀에게 물러가라 말을 전했다.
‘결국 저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모양입니다.’
닫힌 문에 대고 곱게 인사하고 멀어지는 자태가 아슬아슬하기 그지없었다.
화희는 잠시 만족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곧 그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녀의 처소에 들이닥쳐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가 보였다. 손에 든 작은 칼로 목을 찌르기 직전이었다.
여자는 다급히 손을 휘둘렀지만 그가 달려드는 바람에 칼은 가까스로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짓입니까?’
화희는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억세게 틀어쥐며 제 품에 끌어안았다. 그가 닿자마자 여자가 소스라치며 그를 밀쳐 내려 애썼다.
‘놓으십시오! 저, 저도 아비를 따라 죽겠습니다!’
희게 질린 얼굴로 그를 거부하는 여자가 미워졌다.
어째서 이 여자는 나를 봐주지 않는가. 그녀를 지킨 건 그였다. 액받이라는 명목으로 평생 이용만 하던 그녀의 피붙이들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마땅한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자신만 증오하는지.
‘비께서 자진하지 못하도록 잘 모셔라!’
격한 분노가 인 화희는 시녀장을 불러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묶어 두라 이르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한동안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가 신부에게 독이 된다면 내버려 두는 게 옳았다. 아니, 이 정도까지 자신을 흔드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은 게 정확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반으로 갈라져서 시끄럽게 싸웠다.
자신을 거부하는 그녀를 내치고 싶다가도,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고 미치도록 품에 안고 싶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태자비 궁 주변을 맴도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이가 없어서 막 돌아가려는 순간, 뒷담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황태자의 총애도 끝났군요.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어여쁘면 뭐할까, 이리 목석같아서야 차라리 고운 조각상을 끌어안고 말지.’
화희는 도로 물리려던 걸음을 되돌렸다.
뒤뜰 큰 나무 아래에서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여자와 앞을 막고 선황의 측근이 보였다. 기존 황가를 배신하고 이쪽에 붙은 젊은 귀족이었다.
그의 신부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표정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액받이 주제에 아직도 자존심만은 고고하군. 차라리 내 청혼을 받아들이지 그랬소? 그랬다면 이 몸이 나긋하게 잘 길들여서- 으아악!’
화희는 더 듣지 않고 당장 검을 빼 들었다.
일부러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단칼에 베지 않았다. 길게 튄 붉은 피에 비명을 지를 줄 알았으나 그녀는 그저 한 발자국 움직여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저부터 베시지요.’
화희는 멈칫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내가 비를 베야 합니까?’
‘사람의 목숨을 해하는 걸 좋아하시니까요.’
화희는 피를 흘리며 바닥을 뒹구는 귀족에게 시선을 두었다. 당장 죽이고 싶어 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그녀의 눈빛이 검을 막았다.
자신을 모욕한 버러지가 아닌, 자신을 지키려 한 그를 혐오하는 눈빛이 매우 거슬렸다.
하지만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막상 여자를 눈앞에 두고 보니 욕심이 났다. 마음껏 눈에 담고 품에 안고 싶었다.
처음으로 그는 진심을 담아 신부에게 물었다.
‘비는, 내가 어찌 해 주길 바랍니까.’
‘제 답은 늘 같습니다.’
‘그대 대신 가족을 살려 달라?’
‘그들을 온전히 귀양보내주십시오. 제 마지막 청입니다.’
그녀가 담담히 마지막을 입에 담았다.
그것이 전보다 더 나빴다.
아무리 사지를 결박하고 구속한다고 해도, 죽어서라도 내게 벗어나려는 그녀를 막을 수 없을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결국 마음속에 단단하게 품고 있던 ‘미움’을 내려놓았다. 여자가 계속 살아야 미워하든 은애하든 할 수 있다. 그녀에 대한 제 욕심을 채울 수 있다.
‘비가 그리 원한다면.’
잠시의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인 화희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드시 약속하겠습니다.’
치맛자락을 붙들었던 그녀의 손이 그의 커다란 손에 잡혔다.
식은땀으로 젖은 작은 손을 꽉 쥐면서 화희는 비로소 깨달았다.
신부를 제 품에 온전히 두려면,
그녀보다, 그녀가 원하는 바를 지켰어야 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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