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28화 (28/100)

28화

“무슨 생각을 그리 합니까?”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한가로운 풍경과 수아의 복잡한 생각 중간에 이질적으로 끼어들었다.

성큼 걸어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는데도 그의 시선은 그녀를 피해 멀리 다른 곳을 향했다. 수아는 나른하게 기대앉은 그를 죽 살피다 오른팔에 새롭게 된 깁스를 보고 놀라 물었다.

“그쪽 팔만 왜 깁스를 다시 했어요?”

화희가 먼 곳에 두었던 시선을 돌려 그녀의 커피를 바라보며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너무 면상육갑할 일이라 말하기 창피한데요.”

“그럼 병원에 같이 오자고 하지 말던가요.”

“냉정하시기는.”

“그래서 지금 안 냉정하게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중인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연애를 해볼 걸 그랬죠.”

대답 대신 화희가 화가 난다는 듯 불쑥 눈을 치켜들어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대하는 게 맞는 거지?”

“갑자기요? 이런 상황에서 물으면 어떡해요?”

“그럼 누구한테 묻습니까? 당신의 선을 묻는 건데. 민수아 씨에겐 지켜야 할 선이 있다면서요.”

“어, 음, 그러니까 내 선은 독선과 최선 사이일까요? 독선은 절대 싫고 최선을 다해 잘 대해 주면 되는 것 같은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순 없습니까? 더 헷갈리는데.”

갑자기 화희가 다그치듯 묻자 당황한 수아는 떠오르는 대로 둘러댔다. 그러자 그가 아예 대놓고 인상을 썼다.

“당신이 날 무서워하는 건 싫고 그렇다고 너무 들이대면 변태 같다니 그것도 싫고. 당신과 닿는 게 너무 좋지만 한 번 손대면 멈출 수 없을 것 같고 자제하자니 세상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는 병신 같고. 날 보고 자책하는 건 싫지만 곁에 붙들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이고 그러나 또한 그것이 나를 동등한 남자로 보이지 않는 걸림돌이 되겠…….”

“아, 그만요!”

갑자기 화를 내는 그의 눈치를 보던 수아의 얼굴이 점점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한마디로,

그녀에게 남자로서 잘 보이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

일 것이다. 절절한 고백을 들은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려서 수아는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그런데 정작 말을 한 당사자는 진심으로 기분이 나빠 보였다.

“음, 저기, 어, 음, 그러니까 나는요…….”

뭐라고 답하려 했지만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키스를 남자랑 하지, 잘생긴 고양이랑 하냐고. 황당하고 부끄럽고 두근거려서 생각나는 건 원초적인 말뿐이었다. 그저 바보처럼 더듬거리던 수아는 설명을 포기했다.

“지금까지 매우 잘하고 있으니까 그런 쓸데없는 고민하지 마요.”

“……정말입니까?”

화희의 눈이 미심쩍은 듯 가늘어지자 수아는 헛기침하면서 시선을 피해 딴청을 피우다 말을 돌려 물었다.

“음, 그래서 팔은 왜 다쳤다고요?”

“욕실에서 당신이 도망치고 간 후에.”

“도, 도망은 누가요?”

“잘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안 갔으면 선을 넘었을지도 모르니까.”

“뭐, 뭐래!”

“그러니까 되바라진 음심을 죽이려고 혼자 애 좀 썼단 뜻입니다. 힘이 너무 들어가서 그만 이 꼴이 됐지만.”

음심 때문에 혼자 애쓰다니 뉘앙스가 왜 그래. 다친 사람을 앞에 두고 묘한 상상이 되자 수아는 부끄러움에 진 죄인이 되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컵을 내려다보았다.

굳이 안 쳐다볼 때는 언제고 이젠 집요하게 자신만 보는 그의 시선이 뜨거웠다.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처럼 컵을 들었는데 화희가 손가락으로 컵을 눌렀다.

“다 식은 걸 왜 마셔요. 가는 길에 새로 사죠.”

“어딜 가는데요?”

“수아 씨 어머님 댁요.”

“우리 엄마요?”

“거짓말하느라 쩔쩔매는 통화 소리 들었어요. 어머님이 걱정하고 계신 모양이던데 괜찮다고 얼굴 한번 보여 드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밖에서 기다릴 테니 가는 길에 잠시 들릅시다.”

“아, 고마워요.”

잠시 잊고 있었던 엄마 생각을 하자 수아는 말을 돌릴 겸 전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저기, 이사님 부모님은 어디 계세요?”

“양친 다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아, 미안해요. 괜한 걸 물어서.”

“미안할 것 없습니다. 차라리 그편이 세상에 이로우니까요.”

이만 출발하자면서 먼저 일어난 화희가 평이하게 부모의 죽음을 입에 담는 것을 보며 수아는 멈칫했다. 그런 그녀를 보자 앞장서다 말고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날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걸 보니 이런 대사는 생각만 하는 게 나았을까요?”

“그냥 내 시선 같은 거 신경 쓰지 마요. 어차피 이사님이 보통 사람이 아닌 걸 다 아는데.”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신경 쓰입니다만.”

화희가 코웃음 치며 하는 말은, 경험상으로 묻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수아는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저기, 그럼 첫 번째는 뭔데요?”

“당신 입술. 원래는 당신 눈빛이었는데 오늘 이후로 순서가 바뀌었…… 읍.”

“그 입술 닥쳐…… 아니, 닫아요! 아, 정말 이 남자는 어떻게 하는 말마다 차고 넘치기만 해.”

수아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그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두근거림이 도를 넘어서자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았다. 그러다 크게 떠진 화희의 눈과 마주치자 그녀는 불에라도 덴 듯 황급히 손을 뗐다.

손에 남은 입술의 촉감으로 키스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버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 멍하니 얼굴만 마주 보다가 수아가 먼저 빨갛게 불타오르는 얼굴로 도망치듯 뛰어가 버리고 말았다.

남은 화희는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며 여운을 즐기듯 잠시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천천히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랜 시간 끝에 제법 자연스러워진 미소였다.

4. 나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머, 우리 딸! 갑자기 어쩐 일이야?”

“외근 나왔다가 저번에 금방 헤어진 게 아쉬워서 잠깐 들러봤어요.”

수아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엄마에게 시선을 피하고 둘러댔다.

버스 사고 후, 내내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와의 긴 통화를 피했다. 사고의 여파로 공포에 질린 마음을 숨기는 게 어렵기도 했고 무엇보다 기대고 싶고 걸 참느라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자 그동안 참았던 못난 투정이 치받쳤다. 엄마에게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며 위로받고 싶었다.

엄마, 나 죽을 뻔했어. 엄마를 그렇게 등 떠밀어서 보낸 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후회되고…… 다시 못 봤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보고 싶었고…….

수아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괜히 집안을 둘러보는 척했다. 말없이 살펴보던 송 여사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힘든 일 있으면 바로바로 엄마한테 연락해. 새 아빠가 전세금 정도는 어떻게든 보태 준다고 했으니까 지금 사는 곳이 여의치 않으면 참고 살 필요 없어.”

“아, 엄마! 새아빠한테 그런 소리 하시지 마세요. 지금까지 신세 진 것도 죄송스러운데.”

결국 울컥한 수아는 괜히 엄마한테 투정 부리듯 엄마의 말을 끊고 말았다. 하여튼 눈치는 삼백 단이셔서-.

그러나 송 여사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 역시 딸에게 쌓인 게 많으셨는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남이니, 얘? 그이가 들으면 엄청 섭섭해할걸?”

“남 아니니까 더 그렇죠. 이 나이에 효도해도 시원찮을 판에.”

“별 게 효도니? 기댈 데 없이 떠도는 너만 좋은 남자 만나서 정착하고 잘 살면 돼.”

“요즘은 왜 맨날 이야기가 기승전결혼으로 끝나?”

“인생 낙이 다 거기서 거기란 얘기지. 당장 결혼 안 해도 좋으니까 제발 연애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그러란 얘기야.”

“요즘 너무 잘 지내고 있다니까. 걱정하시지 말라고 들렀는데 더 걱정하시면 난 어떡해?”

송 여사가 다시 수아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은 까칠한데 행색이 전보다 좋아진 걸 보니까 옮긴 회사가 좋다는 말이 영 거짓말은 아닌가 보다.”

그리고 그녀는 벼르고 있던 것처럼 반찬을 싸기 시작했다. 짜증 낸 것이 미안해진 수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고등어조림과 나물 반찬이 한가득 든 냉장고를 들여다보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역시 엄마가 최고야. 근데 멋진 새아빠 두고 늘 내 생각만 하시는 건 아니죠? 왜 이렇게 반찬이 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있어?”

현관문에 선 수아는 양손 가득 반찬을 받아 들고 송 여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한껏 냄새를 맡았다.

엄마에게선 늘 좋은 냄새가 난다. 편안하고 향긋하고 곧 잠이 올 것 같은.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어릴 때 살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그런 냄새.

아이처럼 비비적거리던 수아는 더 있다간 마음이 약해질까 얼른 집을 나와 버렸다. 양손 무겁게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머리 위로 베란다까지 나와 배웅하는 엄마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음이 묵직해진 수아는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억눌렀던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아서였다.

급히 서둘러서 모퉁이를 돌아서자 저 멀리 차에 기댄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